허세창단편소설

[단편소설]경매일지

허세창 2025. 1. 1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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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경매일지

 

지은이   허세창

 

모년 모월 어느 이른 겨울날의 일지

 

사람들이 듬성듬성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얼굴에 어린 약간의 긴장감을 본다. 시나브로 사람들이 불어난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결국 자리가 죄 들어차고 만다. 빙 둘러진 좁은 통로의 모든 곳 까지도.

소피 마르소 같은 얼굴을 한 여자의 시선이 자꾸만 나를 힐끔거린다. 짐작컨대 아마도 오늘 처음 이 곳에 행차한 것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저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만 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어린 청소년들까지 나서서 죽자 사자 하고 덤벼들지 모를 일이다.

집행관의 목소리가 굵직하게 확성기를 울려온다. 최대한 겸허한 태도로 얌전히 그의 목소리를 경청 해 본다.

그랬건만, 벌써부터 눈이 가물거리기 시작한다. 간밤, 백조들의 춤사위에 지나치게 심취했던 탓일까. 아직까지도 그녀들의 하늘거리는 튀튀가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집행관의 목소리가 비몽사몽간으로 울려오고 있다. 호박벌의 요란한 날개 짓 인양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마구 붕붕거린다.

포대기 속의 아이가 나를 돌아보며 연신 방싯거린다. 하지만, 문희 같은 모습을 한 아이 엄마의 얼굴엔 수심만이 그득하다. 그냥저냥 집안의 이 곳 저 곳을 차분히 휘둘러본다. 그녀의 처음 느낌만큼이나 꽤나 많이도 정갈해 보이는 실내. 어디 물새는 곳은 없냐고 물어본다. 괜찮다고 얌전히 대답해 주는 그녀. 보일러의 상태가 어떤지도 물어본다.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조단이 대답을 들려주는 그녀. 아이는 어느새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탁자위에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 있는 그녀의 뽀얀 손마디. 그 아뜩한 유혹을 떨쳐 내 보려 선순위 근저당이 잡혀있는 집인 줄 몰랐냐고 다시 물어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처연한 모습으로 가만가만 고개 짓만 해 보이고 있는 그녀. 어디 이사 갈 곳은 따로 정해 둔 곳이 있는지도 재차 덧 붙여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희를 꼭 닮은 모습으로 가만가만 고개 짓만 해 보이고 있는 그녀.

대학시절 학과여행 때의 그녀들 모습이 느닷없이 떠 올라왔다. 자꾸만 내 몸의 한 구석에다 자신들의 그것을 강하게 밀착시켜 오던 그 아뜩한 기억들. 문희의 얼굴을 한 아이 엄마의 집을 벗어날 때 느닷없이 떠 올라온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그리고 이리저리로 흩어져 간다, 소피 마르소의 얼굴을 한 여자 역시 다소곳이 그런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좀 체로 수마를 떨쳐내지 못하는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터벅터벅 그들의 뒤를 쫓아 나간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만큼이나 평화로운 모습이 또 있을까. 그런 아이를 꼭 끌어안고 차 창밖으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아이 엄마의 모습만큼이나 가슴을 쳐 오는 모습이 또 있을까.

겨울바다, 늘 혼자였던 곳. 하지만 그 날 만큼은 그렇게 셋이서 함께한 바다. 거친 파도가 사납게 몰아 쳐 왔다가는 하얀 포말을 흩뿌리며 곧바로 흩어져갔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성긴 눈발은 허공중을 이리저리 맴돌이 치고, 질끈 동여맨 아이 엄마의 포대기 끈 자락은 그 눈보라 속을 무섭도록 흔들거렸다.

사람들의 눈길이 죄다 내게로 쏠려와 있다. 소피 마르소의 얼굴을 한 여자의 타는 듯한 시선 역시 내 얼굴 위로 마구 쏘아져 온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고대하던 수확물들을 원만히 수중 안으로 갈무리 한다.

겨울바다. 셋이서 함께했던 바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둘이서 함께한 바다. 거친 파도가 끊임없이 휩쓸려 왔다가는 순식간에 또 저 멀리로 흩어져간다. 겨울바람은 여전히 그날처럼 거세게 몰아쳐 들고, 성긴 눈발 역시 그날처럼 허공중으로 맴돌이친다. 소피 마르소의 얼굴을 한 여자의 긴 생머리가 아이 엄마의 그것처럼 찰지게 허공 속에서 팔랑거리고 있다.

 

모년 모월 어느 늦은 겨울날의 일지

 

사내는 틀림없이 자신의 벗들을 대동하고 있을 것이다. 중개업소 사장 역시 진작 그의 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중개업소 사무실의 문을 힘차게 열어젖힌다. 곧바로 엄습해 드는 몸집 우람한 사내들의 송곳 같은 눈빛들. 말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좁은 사무실 공간 안을 어지러이 찢어발기고 있다.

불법전대인은 파렴치한 변명을 되풀이 할 것이다. 아무려나 곧바로 엄습 해 드는 무뢰한의 가증스러운 넋두리 넋두리들. 경매에 올려진 집을 남에게 떠넘기고도 저럴 수가 있다니.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장애인에게까지. 아니, 동물이 아닌 인간이기에 오히려 더 그럴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런 혐오감으로 더욱 더 냉혹하게 그를 몰아쳐 간다. 배당 날짜에 최우선 배당금을 수령하는 즉시, 곧바로 그 돈을 전차인에게 되돌려주라는 말로 마지막 오금을 박아 넣는다. 불법전대인의 악머구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자갈소리처럼 아갈리고 있다.

전차인은 오늘도 귀가가 늦을 것이다. 사나운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쳐 왔다가는 좁은 골목길 저 건너로 무섭게 뒹굴어간다. 그 차갑고 깊은 어둠 속 저 편으로부터 느릿느릿 이 쪽을 향하여 다가들고 있는 흐릿한 그림자 하나. 절뚝이는 걸음걸이. 전차인이다. 시키는 대로 꾹꾹 일만 하고, 주는 대로 고분고분 푼돈 받아서 하루하루의 힘겨운 삶을 지탱 해 가고 있는 보통인 사람들의 전형. 아니, 몸이 성치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그런 이들만도 못한 삶을 꾸려가고 있는 밑바닥 같은 인생의 전형. 나 역시도 얼마 전까지는 저 비슷한 부류적 삶을 고수(?) 해 왔다. 그러한 삶의 방식만이 마치 지고지순하고 숭고한 무슨 금과옥조라도 되는 양. 그래서 더 더욱 저런 사람들에게 신경이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 온갖 고뇌는 혼자서 다 짊어진 듯한 모습을 한 채, 취기 가득한 벌건 눈으로 물끄러미 내 얼굴만 건너다보고 있는 전차인 사내. 답답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배당 날짜에는 꼭 최우선 배당금을 전해 받아야 한다는 사실만을 반복 주입시킨다. 불법전대인으로부터 그 돈을 꼭 돌려받아야 새로 집 주인이 된 나와 재계약이 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의 대접에 마지막 이화주 한 대접을 그득히 부어 넣는다. 내 대접에도 술 한 대접이 그득이 부어 넘친다. 술대접을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각자의 목 안으로 쿨럭쿨럭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총총히 그의 집을 나선다. 전차인의 소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귓전에서 맴돌고 있다.

포대기 속의 아이가 나를 보고 연신 방싯거린다. 아이 엄마는 여전히 내 얼굴만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런 그녀의 습기 가득한 눈 안을 나 역시도 아주 한참동안이나 마주 들여다본다. 아이 아빠가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그녀의 낮은 중얼거림이 집의 현관문 앞에 다 이르도록 끈질기게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전등 단추를 누르자마자 굴속 같던 실내가 대낮처럼 밝아져 온다. 옷을 모두 훌훌 벗어부치고, 뜨거운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 안에다 가만히 찬 몸뚱이를 밀어 넣는다. 세포 속의 온갖 노폐물들이 슬금슬금 녹아나가는 느낌에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 내린다.

사독(蛇毒)이 퍼지기 시작한 니키아의 가녀린 몸뚱이가 마구 비틀거린다. 배신의 솔로르가 감자티를 뒤로 한 채로 그런 그녀에게 망설이듯 다가서 간다. 그리고 마침내, 니키아의 기운 몸뚱이는 그의 품안에 안긴 채로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가늘게 내 쉬고 있다.

순백의 영혼들이 저 높은 곳으로부터 저 낮은 곳으로 긴 아라베스크의 행렬을 지어 내린다. 비장미 가득한 밍쿠스의 선율이 그런 그녀들의 순결한 몸뚱이를 뱀처럼 휘감고 돈다. 가련한 니키아의 영혼이 배신의 솔로르와 더불어 마지막 순백의 춤사위를 나풀거리고 있다.

화면이 검게 변해 버린 한참 뒤 까지도 거실 벽에 그대로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애꿎은 소주잔만 연신 기울여 본다. 결국, 소주 한 병을 죄 비우고 나서야 침대 쪽으로 비틀비틀 다가가 본다. 그리고는 노곤해진 몸뚱이를 그 위에다 편안하게 부리어본다.

포대기 속의 아이가 다시 또 방싯거린다. 아이 엄마 역시 나를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짓는다. 나 역시 그런 그들을 마주 보며 가만히 미소 짓는다. 거센 파도가 쏴아 하고 밀려왔다가는 다시 또 쏴아 하고 물러 나간다. 하늘에서는 성긴 눈발이 거센 바람 속을 사납게 맴돌이 치고, 아이엄마의 긴 포대기 끈 자락은 소피 마르소의 얼굴을 한 여자의 그것처럼 하염없이 나풀거린다.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밀어 올린다. 찌부드한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서 비틀비틀 창문 쪽으로 다가서 본다. 잘 열리지 않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 칼끝 같은 찬 기운이 훅 하고 열린 가슴 속으로 꿰뚫고 든다.

밤새 내려 와 온 세상을 솜이불처럼 하얗게 뒤덮고 있는 순백의 결정체,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그것을 내어다 본다. 그 순백의 세상 속에서 작은 새의 무리들만이 명랑한 울음들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분주히 이 나무 저 가지 사이로 포르락 거리고 있다.

서둘러 사진기를 챙겨들고 뒷동산을 올라본다. 그리고 솔잎마다 가득한, 마른나무 가지들마다 그득해 있는 그 순수의 결정체를 곱다라니 사진기 안으로 모셔 들인다. 저만치 굵은 소나무 둥치사이로 얼룩덜룩한 산 짐승 하나가 날쌔게 비껴 나간다. 녀석을 겨냥한 까치 떼거리의 우악스런 울부짖음 역시 부동산 사무실 사내들의 그것처럼 송림 사이로 거칠게 흩어져 간다.

유치권을 고집하는 사내의 비릿한 조소, 그리고 송곳처럼 쏘아져오는 차가운 눈빛. 하지만 쓸데없는 허장성세에 불과할 뿐이다. 가장유치권임을 진작부터 다 파악 해 둔 터수에 그 무슨 부질없는 만용이란 말인가. 서류가방 속에서 유치권 부존재 판결문 사례본을 꺼내어 그의 앞에다 지긋이 밀어 놓는다. 시나브로 돌처럼 굳어져가고 있는 창백한 그의 얼굴을 느긋한 눈길로 가만히 지켜만 본다.

밍쿠스의 선율은 서서히 종장으로 향하고, 애마는 벌써 오늘의 최종 목적지에 닿는다. 전산기의 화면으로 진작 정체를 파악 해 두었던 바로 그 외딴집. 강 물결이 바람결을 따라 고기비늘처럼 퍼져 나가고, 희미한 별빛들은 그 물결위에서 꿈결인 양 번뜻거린다.

이런 곳에서의 삶을 오랫동안 꿈꾸어 왔다. 그러한 간절한 바람이 드디어 결실을 맺을 것인가. 상념을 채 물리기도 전에, 내 시린 손가락 끝은 어느새 외딴집 초인종의 단추위로 살포시 얹혀져 간다.

숙소 바닥의 온기가 온 몸으로 따뜻하게 번져오기 시작한다. 나른한 눈길로 휴대용 전산기 속 순백의 영혼들이 서러운 춤사위를 나비처럼 지어 내리는 모습을 본다. 단장을 끊어버릴 듯한 바이올린의 선율은 처녀귀신들의 한이라도 달래 주려는 듯 방안 구석구석을 뱀처럼 기어 흐른다. 추운 겨울 밤, 강변에서의 긴긴 밤이 그렇게 하냥 하냥 깊어만 간다.

 

모년 모월 어느 이른 봄날의 일지

 

대지 위에도, 산 위에도, 그리고 저 푸른 강 물결 위에도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이 화사하게 퍼져 흐른다. 달콤한 봄꽃의 향기 역시 연신 코끝을 비집고 들고, 나 그리고 그녀는 그 냄새를 한껏 들이켜 본다.

다시 또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눕혀놓고서 가는 가지 나무 그늘 아래 잠시 휴식을 취해보는 나 그리고 그녀. 말간하게 맺혀 나온 여자 이마위의 땀방울들이 참 보기에 좋다. 햇살이 실린 실팍한 이파리의 그림자 하나가 그 동그마한 이마 위에서 가만가만 어른거리고 있다.

나비는 날고 벌은 춤춘다. 흐드러진 색의 향연 속에 나 그리고 그녀가 있다. 눈부신 봄 햇살이 그런 우리들의 드러난 민 낯, 화사한 꽃잎들 위로 끝도 없이 해살 거린다, 진한 꽃내음은 그런 우리들의 코 아래로, 드넓은 꽃밭 저 멀리로, 그리고 강둑 저 건너까지도 끝도 없이 질금거린다.

뚝뚝 뜯어 모은 야생화 한 모듬을 여자의 가느다란 손아귀 안에다 꼬옥 쥐어 줘 본다. 여자의 고운 두 눈이 눈물 그렁해진 모습으로 아주 한참동안이나 그것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아주 가끔씩은 이쪽도 한 번 수줍게 돌아다보고. 보름밤, 초가집 지붕 위로 허옇게 피어오르는 박꽃의 그 미소가 소피 마르소를 닮은 여자의 입가에 곱다리니 걸리어 있다.

지그프리트와 로트바르트의 격렬한 몸싸움이 이어진다. 여자의 가느다란 손마디가 다시 또 내 손마디 사이로 이빨 끼어지듯 겹쳐져 온다. 오데뜨의 설운 몸뚱이는 흩날리는 꽃잎처럼 강물 속으로 지고, 여자의 입가엔 다시 또 가는 탄성이 삐져 흐른다. 그리고 기어코 꺾여 버리고 만 로트바르트의 까마귀 빛 날갯죽지, 그리고 기어코 강물 속으로 지고 마는 지그프리트의 설운 몸뚱이. 소피 마르소를 닮은 여자의 뽀얀 가슴이 내 품 아래서 가늘게 팔딱거리고 있다.

휴대용 전산기 화면의 뚜껑이 천천히 내려 덮인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런 미동도 없다. 진한 꽃 내음은 여전히 어두운 천막 밖을 서성거리고, 이름 모를 밤새의 지저귐 하나가 어딘가로 저 멀리 호르르 흩어져 간다.

바닷가에 면해있는 협소한 도회지답게 경매 법정 역시 꽤나 한산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르고 왔던 먹이 감을 다른 이에게 채여 버리고 만다. 허탈한 마음을 억지로 추스르며 다시 또 비릿한 바다 내음을 따라 부지런히 자전거의 발판을 굴려 나간다.

어린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새들의 지저귐이 낭자하게 허공중으로 흩어져 간다, 그리고 하염없이 귓전을 간질이는 계곡 물소리. 나, 그리고 그녀 역시 그것들과 더불어 온전히 하나가 된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여자의 동그마한 이마위로 송글송글 맺혀 나온 땀방울들을 조심스럽게 찍어 내 본다. 소피 마르소를 닮은 여자의 눈이 말간하게 내 눈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모년 모월 어느 늦은 봄날의 일지

 

오늘따라 더욱 더 고속도로가 붐비고 있다. 하지만 그다지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차 안 가득이로 흘러넘치는 라바야데르 탓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옆자리의 저 여자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선율에 깊이 심취해 있던 여자가 갑자기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드러내 온다. 나 역시도 아주 특별한 시간이 될 것 같다는 말로 여자의 그런 기대감에 충실히 부응 해 준다. 여자의 입가로 한가득 번져가고 있는 따뜻한 저 미소 느낌이 언제나 좋다.

거대한 도시의 밤. 여기저기 거리마다 건물들마다 휘황찬란한 밤의 불빛들이 마구 넘실거린다. 그 현란한 속을 여자와 더불어 천천히 거닐고 있다. 내게서 선물로 받은 의상이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으며 여자가 다시 또 찰싹 곁으로 매달려 온다. 그런 여자의 얼굴 위로 뭇 사내들의 비린 시선이 연신 스치듯 머물다 간다.

취기가 오른 얼굴로 자신의 목에 매달려 있는 목걸이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 저토록 흡족 해 하는 것을 보니 나 역시도 꽤나 만족스러운 기분이 든다. 병을 들어 다시 또 여자의 잔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술을 채워 넣는다. 내 잔에도 역시 찰랑찰랑 술이 넘쳐흐르고 있다.

여자가 다소곳이 두 발을 모으고 서서 메조소프라노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청초해 보이는 자태에 다시 한번 정신이 아뜩해진다. 색 좋은 노래방의 조명 불빛이 한층 더 낭만적인 분위기를 고조 시킨다. 여자의 가는 허리가 어느새 억센 내 팔뚝 안에 들어와 있다.

강, 광대한 도시의 한 복판에서 구렁이처럼 느릿하게 몸을 뒤틀고 있는 강. 태고 적부터 내려온 하고많은 사연들이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이도 그 안에 담겼으리라. 흐릿한 허공중의 별빛을 스쳐 온 물새들이 가만히 강물 위로 몸을 낮춘다. 그리고 내 품에 안긴 여자는 소피 마르소를 닮은 눈길로 가만히 그것을 지켜만 본다.

고급 대형여관, 첫 임장 때만큼이나 다시 보아도 이렇게 꽤나 정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부의 치장 또한 꽤나 우아하고 맛깔스럽다. 여자의 입가로 번져가고 있는 만족해 보이는 저 미소가 그런 내 느낌을 분명하게 더 많이 증거 해 준다.

라바야데르가 꺼지고, 한참이 더 지난 뒤 까지도 나도 그녀도 아무런 미동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내 눈가로 번져가는 습한 이 기운, 그리고 그녀 눈가로 맺혀 나온 촉촉한 저 물기의 느낌. 물빛 같은 도시의 밤이 시나브로 그렇게 깊어만 간다.

몸집 큰 도시의 경매 법정. 아무리 그래도 타 도시의 그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여자가 슬쩍 나를 돌아보며 은밀한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가격을 써 낸 노회한 입찰자와 더불어 최종 경합까지 치르고야 만다. 그리고서야 가까스로 거머쥘 수 있게 된 물건. 어느새 여자의 동그마한 이마 위에도 구슬 같은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져 있다.

최고가매수인, 언제 들어도 참 기분 좋은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낙찰자로 결정이 되어 버리는 그 순간, 십중팔구는 내 물건이 된 것이나 진배가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오늘처럼 치열한 경합 끝에 거두어 들였을 때는 더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물론, 최종 매수인으로 완벽하게 결정이 될 때까지는 아직까지도 두어 주가 더 남아 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은 취소라든지 하는 특별한 불상사는 거의 생기지 않을 것이다.

치열한 경합 끝에 걷어 들인 물건이 좋은 이유가 뭘까. 첫째, 그만큼 안전하게 수익을 확정 시켜줄 수 있는 물건이란 의미다. 법정지상권, 유치권, 선순위임차권, 소유권이전청구권가등기, 예고등기, 분묘기지권 등등 낙찰자를 괴롭히는 특수권리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될 수 없는 물건이란 뜻이다. 둘째,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떡고물의 양이 크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경합 없이 얻은 나 홀로 낙찰 물건의 경우, 먹을 것이 적거나 빛 좋은 개살구일 확률이 높다. 느닷없이 불거진 특수권리에 걷어 채여 뒤로 훌렁 나자빠질 수도 있다.

다시 돌아 온 우리를 보고 여관주인이 퍽이나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 그 모습이 꽤나 해학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자가 뒤로 돌아선 채 은밀한 웃음까지 지어 보인다. 곧바로 이어지는 여관 주인과 소피 마르소 애인과의 치열한 말의 공방전. 그리고 계속 흘러가는 시간. 결국, 손까지 내저으며 뒤로 물러앉은 그에게 배당일 까지는 무조건 건물을 비워주어야 한다는 말로 마지막 오금을 박아 놓고서 총총히 건물의 출입구를 빠져 나온다.

마침내, 길 건너편의 거대한 공연장 외벽으로 라바야데르의 커다란 화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두 손을 꼭 모아 쥔 니키아가 촉촉한 눈길로 가만히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다. 그런 그녀를 마주 보고 있는 여자의 두 눈 가에도 어느새 말간 이슬방울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브라만의 끈적한 눈길이 니키아의 가녀린 몸뚱이를 뱀처럼 휘감고 돈다. 그런 그에게서 멀찍이 물러나 바람 속 여린 이파리인양 파르르 몸을 떨고만 선 그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분노한 브라만의 눈길. 지친 노예가 니키아의 물동이속 물을 달게 받아 마신다.

솔로르가 니키아를 부른다.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작은 새처럼 포르르 그의 품 안으로 날아가 안기는 그녀. 그의 두 팔에 안긴 니키아의 몸뚱이가 풍차의 날개처럼 힘차게 휘돌아 간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브라만의 두 눈 안에서 다시 또 분노와 질시의 불길이 활활 불타오른다.

니키아의 여린 볼 위로 수리의 발톱처럼 쇄도 해 드는 감자티의 매운 손바닥. 끈 풀어진 추 마냥 아래로 축 쳐져 내리고 마는 니키아의 치켜든 단검. 절망한 그녀의 가녀린 몸뚱이가 비틀비틀 그 자리를 벗어나 간다. 알 듯 모를 듯 뒤섞인 분노와 차가운 미소가 감자티의 얼굴 위로 서서히 번져 나간다.

꽃바구니를 가슴 앞으로 모아 잡은 채, 비통한 춤사위를 하늘거리는 니키아의 여린 몸뚱이. 그런 그녀를 안타까이 지켜보고 있는 솔로르의 불 같은 눈동자, 그런 그를 꿰뚫을 듯 쏘아보는 감자티의 얼음장같이 냉혹한 눈길.

사독(蛇毒)은 시나브로 온 몸으로 퍼져 흐르고, 니키아의 여린 몸뚱이는 질정 없이 질정 없이 비틀거린다. 브라만의 손끝에 걸린 해독약이 흔들거리고, 그런 그녀를 차갑게 응시하고 있는 감자티 몸뚱이의 곡선 또한 가뭇없이 흔들거린다. 그리고 마침내 급격히 흐릿해지고 만 그녀의 동공 안으로 살처럼 날아들던 솔로르의 몸뚱이마저 아뜩하게 흩어져 간다.

다시 또 순백의 튀튀들이 장엄한 아라베스크의 행렬을 지어 내린다. 그리고 물처럼 차올라오는 가슴 속 이 먹먹한 느낌.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꼭 끌어 잡은 소피 마르소의 두 눈가에도 영롱한 이슬방울 하나가 번 듯 빛나고 있다.

 

모년 모월 어느 여름날의 일지

 

작열하는 태양이 세상의 모든 것을 녹여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제주의 여름을 마구 짓이겨댄다. 넘실거리는 비취빛 물결, 그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아이들의 상아 빛 재잘거림들, 낯선 이국인들의 푸른 눈웃음까지. 나, 그리고 그녀 역시 그들 속에 뒤섞인 채로 싫도록 협재의 여름을 만끽 해 본다.

거센 해풍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제주의 여름을 우악스럽게 쥐고 흔든다. 그 거친 속으로 이어진 바닷가 길을 따라서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발길을 옮겨 놓고 있는 나 그리고 그녀. 시시때때로 마주쳐 오는 나이 어린 올레 객들의 분방한 재잘거림과 이국인 순례객들의 파아란 눈웃음들이 눈부시게 올레 길 가득이로 퍼져 흐른다.

섬 도시의 경매 법정 역시 미리 들어왔던 대로 빈자리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중국인들 탓이고는 하나, 그것이 명확한 분석에서 나온 것인지 여부는 아직 잘 알 길이 없다. 집행관의 말에 골똘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경매꾼들의 모습. 그리고 그런 그들 속에 사이좋게 뒤섞여 앉은 우리들의 모습. 지난 계절, 바닷가 중소도시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만큼은 더욱 더 겸허한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 해 본다.

차순위 응찰자와 불과 200만원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법정지상권 물건 하나를 수중 안으로 거둬들인다. 그녀 역시도 고대하던 물건 하나를 처음으로 수중에 거두고 만다. 뭇 사내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 속에서 오늘따라 더욱 더 눈이 부시도록 소피 마르소의 얼굴이 빛나고 있다. 

분위기 좋은 바닷가의 술집, 내 잔에도 그녀의 잔에도 다시 또 한번 술이 그득하게 넘쳐  흐른다. 그리고 또 다시 부딪쳐 가는 축하의 술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모습으로 그녀의 빛나는 얼굴이 눈이 부시도록 하얀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

한라산, 반쪽 자리 이 땅 안에서만큼은 그래도 키가 가장 높다고 일컬어지는 산. 하지만, 중턱에 다 이르도록 우리의 발길은 더욱 더 경쾌하게만 이어져 간다. 아마도 이 나라의 가장 큰 섬에서 최초로 걷어 올릴 수 있었던 만족스런 그 성과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켜켜이 멀어 보이는 구름바다 속 그 거대한 솜뭉치들이 시선 안으로 차곡차곡 말리어든다. 태양 빛은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작열 해 대고, 드센 산바람은 두 몸뚱이를 날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마구 몰아쳐 온다. 소피 마르소의 긴 머리카락이 제주의 여름 하늘 속에서 더욱 더 기운차게 팔랑거리고 있다.

 

모년 모월 어느 이른 가을날의 일지

 

비에 젖은 회색빛 도시의 우중충한 건물들이 고기비늘처럼 허옇게 몸을 번들거린다. 마지막 계절을 준비하던 나무 가지 끝의 변색된 이파리들 역시 흠뻑 물기를 머금은 채로 바람결을 따라 살랑살랑 몸을 흔들거린다.

창문턱을 넘어 천정 줄기를 타고 온 빗방울이 그 아래 받혀놓은 세숫대야 속으로 쉴 새 없이 자유낙하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둑한 지하 셋방 안의 어린 남매는 배달 시켜 준 중국 음식만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남매의 손에 돈 몇 푼을 쥐어 준 뒤, 총총히 지하방을 빠져 나온다. 허리까지 반으로 접어 보이며 배웅을 하고 있는 어린 남매의 모습. 집수리 후에도 당분간은 아이들을 계속 이 곳에 머물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다.

가을비는 여전히 들쑥날쑥한 보도의 바닥 위를 거세게 후려갈긴다. 고시원 건물의 입구로 막 들어서다 말고, 그대로 걸음을 멈추어 선 채, 현관 바닥 이리저리로 흩어져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콩콩 쪼고 있는 비둘기 두 녀석을 아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본다.

고시원 운영 세입자의 악다구니를 꼭지에 매단 채, 급한 걸음으로 다시 현관 출입구에 내려와 섰건만, 녀석들의 모습은 이미 어디로도 간 곳이 없다. 대신으로 녀석들이 머물다간 흔적을 여실히 증명이라도 해 주 듯, 둘 중의 하나가 떨쿠고 간 잿빛의 깃털 한 끝만이 사람들의 흙발에 짓이겨진 채로 바람결을 따라서 이리저리 나풀거린다.

술집 고양이 녀석이 또 슬그머니 바지춤을 무지르며 지나간다. 고시원 건물주의 혀 꼬부라진 하소연은 벌써 한 시간째다. 그래도 크게 지루하지는 않다. 아무려나 저 사람은 전 건물주고, 나는 새 건물주가 아닌가. 한 시간도 좋고, 열 시간이라도 좋다. 그렇게라도 해서 하루빨리 아픈 속을 추스르고 순조로이 건물만 넘겨주면 그만일 뿐이다.

기실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인가.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자업자득인 것을.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렇게 흥청망청 빚돈을 끌어다 썼단 말인가. 알량한 건물 하나 믿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돈을 끌어다 쓰다가 패가망신을 자초한 자신의 원초적 잘못은 왜 따져 보질 않는 것인가. 따라서 고시원 전 건물주의 저 눈물은 악어의 눈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지금 포만감에 취할 수는 있을지언정, 저 사내를 결코 동정할 수가 없다. 수많은 빚쟁이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그어 놓은 원흉이 누구인가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건물을 낙찰 받아준 내게 고마움을 표해 와야 바른 도리일 것이다. 빚쟁이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도 나고, 그 빚쟁이들 역시 일정액의 배당금을 받아갈 수 있게 도움을 준 것도 바로 내가 아닌가.

휴대전화기의 신호음이 계속 울려온다. 액정화면 위에 떠 올라있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꿰뚫을 듯 재차 응시 해 본다. 질정 없이 설레고 있는 가슴을 이 이상은 더 진정 시킬 수가 없다. 고시원 전 건물주의 하염없는 넋두리를 뒤로 매단 채로 허겁지겁 술집의 문을 나서고 있다.

드디어 저 멀리로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오도카니 우산을 받치고 선 그녀의 모습. 가슴 속은 더욱 더 세차게 요동 쳐 오고, 질끈 동여 맨 그녀의 긴 포대기 끈 자락은 몰아치는 비바람 속을 질정 없이 너풀거리고 있다.

2015.10. 허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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