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장편소설]잎새의떨림87

2024. 8. 24. 13:38창작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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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여리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이 반지를 끼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내 시야를 벗어날 수 없고 숨을 수도 없다.

“선생니이임! 선생니이임!”

역시 효과가 나타나는군. 여리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늦춰진 것이 감지되어 온다. 역시 인간은 권위 의식 또한 무척 즐기는 동물이란 생각이 든다. 남자든 여자든 그 누구나 말이지. 아무리 제자 녀석에게 제 육신을 바친 처지라 해도, 그 제자 녀석으로부터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것은 과히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이라 하겠지.

반지의 힘을 이용하여 그대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이십 여 미터를 날아갔다. 그리고는 정확히 여리의 등 뒤에 내려서서 으스러져라 그녀의 몸뚱이를 껴안아주며 속살거린다.

“가지 마! 제발!”

“이거 못놓......아 아아아!”

제대로 반항조차 못하고 그대로 정신 줄을 놓고 마는 여리의 가녀린 몸뚱이. 다른 놈에게 네 몸이 한번 더럽혀졌다고 해서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내게 너 말고 다른 여자들이 또 있다는 사실이 무슨 큰 대수란 말인가. 그 사실을 네가 알았다는 것 역시 무슨 큰 대수란 말인가. 내가 아직도 이렇게 너를 질기게 원하고 있는데. 내가 아직도 너를 이렇게 거머리처럼 원하고 있는데.

축 늘어진 여리를 들어 안고서 다시 그녀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옷을 모두 벗기고 조심스럽게 침대위에 눕혀 놓는다. 호색한 또한 옷을 모두 벗고 완전히 나체가 된다. 천천히 침대위로 올라가 여리의 몸뚱이를 접수 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리의 뜨겁게 달아오른 몸뚱이 역시 자동으로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다음날 오전, 호정단 사무실.

최수종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호랑이 가죽을 덮어씌운 의자에 앉아 있는 호정단장의 좌우로는 정인철과 탁재현, 그리고 기타 간부들 및 각 구역 담당 책임자들이 죽 도열 해 있다. 호랑이 가죽 의자는 임꺽정 형님(?)을 모방한 것이다. 딱! 파! 그런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호정단장 자신은 자꾸만 감겨지려는 눈꺼풀을 연신 치켜뜨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극복 노력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그의 입에서 뇌성(雷聲)과도 같은 노성(怒聲)이 벽력(霹靂)같이 터져 나온다.

“최수종 단원은 고개를 들라!”

“예, 단장님!”

몹시 긴장한 표정으로 최수종이 푹 숙였던 고개를 발딱 세운다. 그리고는 애원하는 표정으로 호정단장의 얼굴을 하염없이 우러러 본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예, 저는 그저 단장님 처분에만 맡길 뿐입니다.”

최수종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온다.

“자랑스러운 호정단 단원 여러분, 여기 최수종 단원은 그 동안 몸을 사리지 않고 단장을 잘 보좌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한 순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 과오의 내용은 이 호정단장의 권한으로 영구히 비밀에 부쳐두는 바입니다. 이런 내 결정에 모두 이의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모두들?”

“예!”

단원들의 우렁찬 대답소리가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물론, 그들 모두 이미 다 훤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수종 단원을 완전히 용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 그러면 단장의 권한으로 최수종 단원의 처리 건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최 단원은 이 시간 이후부터 일 년 동안 제주도 위미로 떠나있어야 됩니다. 그 곳에서는 전의 반란자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중입니다. 최 단원도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내 말을 따르겠나 최 단원? 아니면, 정식으로 국가 법적인 심판을 받겠나? 선택은 최 단원 자유다. 위미에서 일 년 동안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 다음에는 다시 호정단 단원으로 복귀하거나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평범한 일반 국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단, 호정단이 아닌 다른 조직에서는 절대 활동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경고하지만, 분명히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전 반란자들도 마찬가지다. 최 단원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뜻을 잘 이해하고 기꺼이 위미로 떠날 각오가 되어 있나?”

“네, 단장님. 제 잘못을 깊이 뉘우치면서 기꺼이 위미로 떠나겠습니다.

“좋다. 당신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것은 나중에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최수종은 총총히 이 도시를 떠나갔다. 사실, 말이 귀양이지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오히려 휴가를 가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오히려 제주도 못 놀러가서 안달하는 사람들도 많지 많은가. 호정단의 귀양객들이야 호정단의 자금으로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하니 더 말해 무엇 하리오. 다만 한 가지 예전의 귀양객들처럼 그곳까지 걸어서, 또 배를 타고 가야한다. 그리고 위미의 귀양처에서는 단 한 발짝도 울타리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른바 위리안치(圍籬安置 조선시대 귀양 간 사람들에게 배소(配所)에서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두르고,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오로지 귀양처 그 공간 안에서만 머물러야 한다.-글쓴이 주)다. 그것이 바로 이 호정단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자들이 겪어야 할 기본적인 죄 값이다. 만일,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호정단장이 용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도주? 세상 그 어느 누가 감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은 바에야.

 

토요일 오후.

지난 월요일엔 최 기사 처분건과 정 기사와의 밀회 등으로 인하여, 화요일 오후에나 주미에게로 가 볼 수 있었다. 역시나 주미는 단단히 토라져 있었다. 어떻게 애 아빠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무심할 수 있냐고 울고불고 하는 데는 정말 진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아, 애 아빠 되는 것이 이토록 지난한 일이었던가. 그나저나 정 기사는 뭐고 밀회는 또 뭐냐고? 결국 그렇게 됐다. 최수종이 떠나버린 마당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새 기사를 채용해야 하는데,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정 가정부를 다시 내 자가용 기사로 전용 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뿔난 김에 가랑이마저 대어준다고, 그냥 그 여자의 골수에 맺힌 소원풀이 까지 시켜 주고 말았다. 좋았냐고? 허허 말 해 무엇 혀! 두 말 하면 잔소리지. 허흐음! 다만 아쉬운 건 내 스스로에 대한 다짐 하나를 스스로 내팽개쳐 버리고 말았다는 그 사실 뿐이지. 미안 하오 승주! 나 본래 이런 사람이라오. 딱! 파!

주미와 나, 그리고 새로 생긴 우리 집 식구 허주희까지를 포함한 세 사람은 이제 막 산후 조리원을 퇴원한 뒤, 그녀의 집으로 회귀하고 있는 중이었다. 운전기사는 당연히 또 다른 나의 거시기가 되어버린 정진희였다. 거시기는 거시기로되, 조금은 색다른 거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거느리고 있는 거시기들의 존재를 죄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그런 존재. 그러면서도 절대로 질투 따위는 하지 않는 존재. 호색무인이 제 아무리 많은 거시기를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그저 자기 또한 그 범주들 안에만 넣어주면 그것으로 그만이라 생각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정진희라고 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편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녀의 깊은 속내 까지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니, 그 내막은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여자라고 하는 동물의 원초적인 생리상 그것을 깊이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지. 뭐 어찌됐든, 상관없는 일 아닌가. 자기가 먼저 나서서 그러겠다고 선언까지 해 주었으니 말이지. 지가 먼저 그래놓고 만일 딴소리만 해 봐라. 그 땐 그냥 안 둘 껴. 그나저나 주미에게는 영원히 비밀이 되어야 할 텐데. 그리고 희정이도 마찬가지고. 아, 그 뿐이 아니군. 누르기 한판으로 간신히 달래놓을 수 있었던 여리는 물론이고, 혜린이, 진숙이, 소희, 심지어는 희원이까지도. 에고, 많구먼 많어. 딱! 파!

애 하나 더 생긴 것뿐인데,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다. 이제야말로 진짜로 살림을 하는 집 같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주미의 얼굴이 전보다도 더 활짝 피어났다는 점이다. 다른 여자들은 애 둘 낳고 나면, 단번에 아줌마 몰골로 변해버린다고 하던데, 이 여자는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애를 둘씩이나 낳은 여자인데. 말 그대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인이라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가슴을 파헤치고서 어린 주희에게 모유 수유를 해 주고 있는 저 모습마저도 더 사랑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심지어는 숭고한 느낌마저도 든다. 가슴 미워진다고 모유 수유를 말라고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주미.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아이 몸에도 좋고, 엄마 몸에도 좋다는 주미. 분유 따위는 필요 없다며 분유 장사 다 망해도 상관없다고 하는 주미. 사랑스럽다. 정말 사랑스럽다. 저런 모습이 바로 진정한 모범적 어머니 상 아닌가. 가만, 그러고 보니 또 한 가지 대견한 모습이 더 있다. 이 여자는 비록 똑똑한 색골일망정 오로지 한 사내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런 색골이라는 점이다. 그건 네 말이 틀렸다. 저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하고 한번 결혼했던 여자고, 또 너 모르게 다른 놈팽이하고 그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아냐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왜? 그거 있지 않은가. 느낌이라는 거. 느낌상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확언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한 확인 방법. 치사하기는 하지만, 과거회귀수법으로도 이미 몇 번 확인을 한 바 있다. 물론, 내 다른 여자들 모두까지도 말이지. 에고, 한심한 녀석. 그렇게까지 네 여자들한테 자신이 없는 거냐. 아녀, 그건 아녀. 그냥 심심해서 그래 본 거여. 딱! 파!

그날 밤, 호색무인은 모유수유를 고집하는 그런 제 아내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밤이 새도록 그녀를 열락의 세상 속으로 보내 주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심하게. 흐흐흐! 그의 또 다른 아내인 임신 소녀가 언덕위의 하얀 집에서 애타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주말 밤이라는 그 사실도 잊은 채 말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일요일 날 내내 언덕위의 하얀 집에서 호색한 녀석의 어린 제 아내 달래는 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삐져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정씨 성을 가진 호색한의 자기용 여기사 역시도 어린 그녀에게 몹시 시달릴 지경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임신 소녀가 제 호색한 남편과 그녀가 결국 배를 맞추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아무튼, 호색한 녀석은 그 날 밤도 어린 제 아내를 달래 주느라 밤을 홀딱 세울 수밖에는 없었다고 하니, 아무튼 뒤늦게나마(?) 여복 제대로 터진 놈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니지. 뒤늦게가 아니지. 고삐리 나이에 그 정도 여복을 누릴 정도면, 오히려 빠른 거지. 딱! 파!

 

월요일,

뭔 날이 그리도 치타 전력질주처럼 지나가냐구? 본래 날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예로부터 쏜 화살 같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제는 완전히 내게 복속(?)당한, 아니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린 의젓한 아이는 일요일 날에도 어김없이 언덕위의 하얀 집을 찾아왔었다. 물론,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 제 사촌언니에게 단단히 핀잔을 듣고는 울상이 되어 바로 제 집으로 쫓겨 가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에고 독한 것. 그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애한테까지. 그래서 이렇게 직접 그 애 집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를 해 주려고.

딩동!

“누구세요?”

의젓한 아이 엄마 목소리. 역시 아이처럼 의젓한 목소리. 모전여전이란 말이 쓸데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 물론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고사 성어를 응용해서 현대인들이 새로 조합해 낸 말이긴 하다. 아무튼, 그게 그거 아니겄는가. 딱! 파!

“예, 희원이 어머니, 허수창이라고 합니다.”

“에? 아아 아이고, 난 또 누구라고. 자 잠깐만 기다려요.”

여기서 또 하나 드는 의문. 희원이 엄마가 도대체 너 같은 호색한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저리 반겨주시니? 하는 의문 말이다. 혹시 너 우리 독자들 모르게 희원이 엄마까지 범한 거 아니여? 생각 하실지 모르겄다. 어허? 그 무슨 천벌 받을 망상을? 천벌은 쥐뿔! 멀쩡한 유부녀 이혼 시키고 임신까지 시킨 넘이. 그려. 나 유부녀 꼬셔서 이혼 시키고 임신까지 시킨 놈이여. 그 말 맞어. 하지만, 희원이 엄마는 아녀. 어디 여자가 없어서 저렇게 나이 잡수신 여자를 꼬실 겨. 젊고 예쁜 여자들이 세상에 널려 있는데 말이여. 그려, 그 말은 니 말이 맞는 것 같다.

사실, 그 사연은 이렇다. 희원이 엄마는 장인 장모가 이미 내게 큰 도움을 받았고, 또 희정이와 함께 실질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여자들 입이 그 얼마나 가벼운가. 장모님도 거기에서는 절대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여. 돈의 힘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그러한 모든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현상조차도 장인 장모나 희원이 부모 모두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쯤으로 치부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그만큼 두 집안 모두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처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톡 까놓고 말하자면, 지난 번 설악산 여행 중에 희정이가 우연히 ‘오빠, 희원이 집도 좀 도와주면 안 돼?’ 해서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희정이에게 돈을 건넸고, 그 돈이 또 장모님의 손길을 거쳐서 희원이 부모에게까지 순식간에 옮겨간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지당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니, 나를 이렇게 백년손님 반갑게 맞이하듯 하는 것도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 아니겄는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중에 혹시 진짜로 이 집의 진짜 백년손님이 될지도 모르지. 여기서 백년손님은 사위를 뜻하는 전통적 대체어임. 딱! 파! 물론, 그런 처사가 멀쩡한 대한민국 국민들 근로의욕을 마구 꺾어대는 짓거리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무작정 그러고 싶은 걸 낸들 어쩌랴. 희정이의 부모님 아닌가. 그리고 나중에라도 진짜로 사위가 될지도 모를 희원이의 부모님 아닌가. 그걸로 된 것이다. 딱! 파!

“어서 들어와요. 그런데 이를 어쩌지요? 집안이 너무 지저분한데.”

“아닙니다. 희원이는 집에 있나요?”

“네, 있어요. 그런데 어쩌죠? 저 애가 어제 오늘 지 방에 틀어 박혀서는 통 나올 생각을 않네요? 혹시, 희정이 집에서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아닙니다. 그냥 제 언니하고 조금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하하! 애들은 늘 그러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말씀 낮추시지요. 저는 아직 고등학생입니다.”

“아니 그래도. 그나저나 어서 들어와요.”

지나치게 황송해(?) 하는 희원이 엄마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단독주택으로서 제법 모양새가 나는 집인 것을 보니, 희정이 말대로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살만은 했던 가 보다. 거실 푹신의자에 앉기도 전에 희원모가 다짜고짜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인사부터 올리고 든다. 이거 참 연장자에게서 너무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안 그래도 진작 찾아보고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먼저 이렇게 찾아오게 했으니. 아무튼, 우리 집에 큰 도움을 베풀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정말 잊지 못할 거 에요. 어떻게 해서든 빠른 시일 내에 갚아 주도록 하겠습니다.”

음, 요즘 보기 드문 분인 것 같다. 차용증도 없이 그냥 쓰시라고 드린 것인데, 저런 말씀까지 하시다니.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그냥 받은 돈이니, 공돈으로 생각하기가 십상인데. 사실, 그렇지 않은가. 오로지 희원이를 생각하고 그냥 희사한 돈인데 말이여. 희원이가 유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또 다른 행복 아니겄는가. 딱! 파!

“아 아닙니다. 돌려받으려고 드린 돈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네? 그......게 무슨 뜻인지?”

이거 참, 너무 놀라시는군. 어떻게 설명을 해 드려야 혀. 무엇 때문에 그냥 돈을 드린 것이라고 해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실 껴.

“말씀 그대로입니다. 희원이가 참 착하고, 아이답지 않게 의젓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드리는 돈입니다. 그리고 희원이는 희정이 사촌이기도 하니까요.”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희원이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랍니다. 깜찍이 어머님. 여기서 깜찍이는 희원이 엄마한테 하는 소리가 아님. 혹시나 오해들 하실까봐 설라무네. 하기야 희원이 엄마도 처녀 때는 꽤나 깜찍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도 같음. 그러고 보니, 미인이시긴 하네. 그러니까 저런 애도 내 놓은 것이겠지. 딱! 파!

“아 아니에요.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하여튼, 희원이 아빠 일이 다시 잘만 되면, 그땐 꼭 반드시 갚아 줄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하, 정말 부담되게 하시네 그랴. 왜 자꾸 자식 같은, 아니 막내 동생 같은 사람한테 꼬박꼬박 하오체를 구사하시는 겨.

“말씀 낮추시라니까요. 그리고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희원이 정말 많이 토라졌나보네요. 오빠가 이렇게 직접 찾아 왔는데도 나와 볼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저 애가 본래 그런 애가 아닌데. 희원아! 희원아! 어서 나와 보렴! 여기 누가 왔을까? 너한테 정말 반가운 손님인데?”

예쁘게 생긴 엄마는 말 하는 투도 다른 엄마들하고는 다른건가. 그러고 보니, 주미도 그랬었지. 애 엄마였음에도 말 하는 폼이 참 매력적이었지. 그래서 내가 더욱 더 그 여자한테 빠져들게 된 것이기도 하고.

덜커덩!

뭔 소리? 그렇다. 느닷없이 희원이 방문이 확 열리는 소리였다. 녀석, 그럼 그렇지. 내가 왔다는데 니가 안 나오고 배겨? 어림도 없지. 흐흐흐!

“오빠!”

뭘 그리 놀라고 그려 이것아. 니가 좋아하는 오빠 얼굴 처음 보는 겨?

“그래, 오빠 왔다. 희원이 너 오빠가 왔는데도 왜 빨리 안 나온 거야?”

“그래, 너 그러면 못쓰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이 오빠가 어떤 오빠인데. 어서 오빠한테 사과 해. 어서!”

“몰랐어요 오빠. 바보같이 오빠가 온 줄도 모르고 그만. 오빠아!”

쪼르르르르! 덥석!

이건 또 뭔 묘사? 그렇다. 의젓한 아이가 쪼르르 내게로 달려와서는 덥석 안기는 모습 묘사다. 에고! 니 엄마도 옆에 있는데.

“어머머! 얘가?”

장모, 아니 희원이 어머님, 이해 해 주십쇼. 당신 따님이 이 정도로 이 사람에게 푹 빠져 있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당신 따님을 여자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귀엽고 대견한 막내 여동생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놈이 아무리 여자에 걸신 걸린 놈이라고는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고 싶네요. 딱! 파!

“희원이 너, 토라져 있었다더니, 그게 아니구나?”

끄덕끄덕!

앙큼한 것. 누가 모를 줄 알고. 너는 분명히 토라져 있었어.

“희원아, 못써! 어서 떨어져. 미안합니다. 이 애가 이렇게 버릇이 없네요.”

“아닙니다. 어릴 때나 이렇게 응석을 부려보지, 나중에 커서는 해 보라고 해도 못하잖아요.”

“그게 그런가요? 아무튼, 우리 애가 수창 군을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네요. 희원아, 너 그렇게도 이 오빠가 좋은 거야?”

끄덕끄덕!

아이답지 않게 얼굴까지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희원이. 고것 참! 대견하다고 해야하나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희원아, 오빠가 말이야. 지금 무지 바쁘거든. 그러니까 우리 또 희정이 언니네 집에서 보도록 하자. 토요일 날 저녁 때 꼭 놀러오는 거야?”

도리도리!

헉! 끄덕끄덕이 아니고, 도리도리? 음,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토록 잘 대해주던 사촌언니한테 그런 구박까지 받았으니. 나 같아도 큰 충격을 받았을 테지.

“어머, 희원이 너? 그리고 수창 군, 안 돼요. 모처럼 이렇게 방문을 했는데 음식을 좀 들고 가야지요. 내가 얼른 준비를 할 테니까 잠깐 만 기다리고 있어요. 희원이 너어?”

의젓한 아이의 엄마 표정이 두 가지로 갈라진다. 내게는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 딸아이에겐 예쁜 입술 앙 다물어 보이는 표정. 그 모습이 참 묘한 대조를 보여준다.

“아닙니다. 제가 정말 바빠서요. 그런데 희원이 너 왜 안 간다는 거야? 희정이 언니 때문에 그러니? 그 것 때문이라면 이젠 안심해도 돼. 이 오빠가 혼을 내 줬거든. 그리고 희정이 언니도 지금 많이 후회하고 있어. 니가 다시 오면, 꼭 사과 한다고까지 했으니까.”

“그나저나 수창 학생, 아까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희원이 하고 희정이 하고 둘이서 다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어머, 그래서 희원이 니가 그렇게 이틀씩이나 골부리를 했던 거구나?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그만. 그런데 왜 그랬던 거야? 희정이 언니가 너 한테 무슨 섭섭하게 한 일이라도 있었니? 설사,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동생인 니가 참았었야지. 언니한테 그러면 못 쓰는 거야.”

“알았어요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주머니, 희원이가 아니고 희정이가 잘못한 건데요? 희원이는 일방적으로 구박을 받은 것뿐인데요? 그 철부지가 지 성질을 못 이기고 그랬던 것인데요? 희원이는 정말 그 어린 나이에도 비할 바 없이 대견했는데요?

“아닙니다. 희원이 어머님. 희원이 잘못이 아니고, 희정이가 저 혼자 화를 냈던 겁니다. 사실은 저 하고 좀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화풀이가 엉뚱하게도 희원이한테 옮겨졌던 겁니다.”

“어머, 그래요? 이를 어째. 미안하다 희원아.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근데, 걔가 왜 그랬대요? 수창 학생처럼 훌륭한 사람에게 도대체 뭐가 섭섭한 일이 있다고. 걔가 복이 넘쳐서 그럴 거 에요. 그러니까 수창 학생이 이해를 좀 해 줘요. 잘 알겠지만, 희정이 걔가 평범한 다른 여자애들 하고는 좀 다른 면이 있거든요. 학교에서 집에서 말썽도 많이 피운 편이고. 하지만, 요즘은 많이 착해졌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비록 학교를 그만두었어도 별도로 가정교사 밑에서 검정고시까지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고 있고요.”

에고 쑥스럽구먼, 장모, 아니 희원이 엄니, 저 그렇게 훌륭한 분 아닙니다요. 알고 보면,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한에다가 깡패 두목이기까지 한뎁쇼. 희원아, 안 그러니? 너도 알잖니.

“하하하, 그렇습니다. 요즘은 많이 착해졌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이지요. 희정이 하고 다툰 이유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 때문입니다. 생판 모르던 남녀가 한 집안에서 같이 지내다보면, 그런 일쯤은 충분히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희원이 어머님?”

“물론이에요. 맞아요. 아무튼, 희정이가 그렇게 희원이한테 사과까지 한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네요. 희원아, 너 토요일 날 언니 집으로 놀러 가. 엄마는 네가 다른 곳만 아니면 얼마든지 네 언니 집에 가서 자고와도 좋다고까지 했잖니.”

“알았어요 엄마. 그렇게 할 게요.”

그러면서 반듯한 자세로 생긋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의젓한 아이. 에그, 대견한 것! 마치, 승주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군. 이참에 한 번 더 어린 승주의 모습을 보러 가 볼까? 갑자기 어린 승주가 보고 싶어지네. 어린 승주한테 아이스께끼, 아니 얼음보숭이도 사 주고 싶고. 딱! 파!

“희원이 어머님. 희원이는 언제 봐도 참 대견하고 의젓하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이 애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정말, 요즘 보기 드문 아이라니까요.”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엄마인 내가 봐도 참 대견한 점이 많은 아이니까요. 공부도 잘하고, 잘 뛰어놀 줄도 알고, 일가친척들하고도 잘 어울릴 줄 알고, 고분고분 부모말도 잘 듣고, 아무튼, 그런 아이이긴 한데, 어제 오늘 이틀씩이나 골부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생소하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이런 일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렇지 희원아?”

“이제 그만 해 엄마. 그리고 오빠. 쑥스럽게 자꾸 왜들 그래요.”

“하하하!”

“호호호!”

많이 유쾌해진다. 조금만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어온다. 하지만, 이쯤해서 그만 찌그러져야 하겄지. 매사는 과해서도 모자라서도 안 되는 법,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밖에서 이 호색한을 애타게(?)기다리고 있는 다른 여자도 있으니까. 그 이름 하여 정진희. 딱! 파!

“저기 희원이 어머님, 정말 이제는 가 봐야 하겠습니다. 희원이도 생각 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 같고 말이지요. 그리고 밖에 기사도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 대신 희원이 좀 데리고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도 되지요?”

“네, 되고말고요. 하지만, 모처럼 이렇게 방문을 했는데 아무 대접도 안 하고 그냥 배웅을 한다는 것이.”

“괜찮다니까요. 그 대신 다음에 와서 배 터지게 한번 얻어먹어 보겠습니다. 그 땐 정말 각오하셔야 합니다. 참고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잡채랍니다.”

“어머 수창 학생, 호호호! 꼭 그렇게 할 게요. 그럼 며칠 내로 꼭 다시 한 번 만 더 들려줘요. 잡채뿐만 아니라 맛있는 거 많이많이 준비 해 놓고 기다릴 게요.”

“하하 그렇게 하세요. 자, 희원아 가자.”

“네, 오빠.”

“지지배도. 너 이 오빠가 그렇게도 좋아?”

아닌 게 아니라 고삐리 곁에 찰싹 달라붙기까지 하는 의젓한 아이.

“하하하!”

“호호호!”

의젓한 아이의 손을 잡고서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몹시 미안해하는 장모, 아니 희원모와 다시 인사를 나누고는 재빨리 정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올라탔다. 나는 괜찮은데 저토록 송구스러워 하니, 내가 오히려 더 부담이 된다. 하기야, 그 정도 도움을 받았으니, 고맙기도 하겄지.

“많이 기다렸지요 정 기사?”

“아닙니다. 단장님.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안다 진희. 사실은 네가 나를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

“자, 갑시다.”

희원이를 의식해서 사무적인 태도로 출발 명령을 내렸다.

“어디로 모실 까요 단장님?”

역시 최수종 보다는 따까리로서의 능력이 떨어지긴 한다. 그 자식이 여리를 건드려서 그렇지 눈치 하나는 국보급이었는데 말이여.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마음이 많이 여린 편이여.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린 녀석인데, 그 정도로 봐 주다니.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할 수 없는 일이여.

“저기, 기사 언니. 그냥 언니 먼저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오잉? 뭔 소리? 지금 의젓한 아이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의젓한 소리 맞는 겨? 맞군! 맞어! 아니, 희원아. 너 또 왜 이러니? 이 언니는 말이여. 이미 이 오빠의 성은(聖恩)을 입은 사이란 말이여. 딱! 파! 니가 그렇게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상대가 아니란 말이여. 그랬다. 의젓한 아이의 의젓한 그 소리 때문인지 정 진희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입에서는 의외로 하늘나라 선녀님보다도 더 친절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우리 희원이?”

“그래 희원아, 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호색한 녀석도 함께 여 기사의 느글거리는 말투를 거들고.

“저 오늘 오빠하고만 단 둘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 기사 언니,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저기 단장님. 어떻게?”

그래, 허락해 주자. 진희 너에겐 미안하지만, 꼬마 숙녀가 모처럼 이렇게 요청하는데 굳이 못 들어줄 이유도 없는 일이지.

“그렇게 해요 정 기사. 오늘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어요.”

“아니 그래도......”

“그렇게 해요. 나도 오늘은 희원이하고만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네 단장님.”

미안하다 진희. 내가 네 서운한 심정을 왜 모르겠니. 그 대신 다음에 더 확실하게 꾹꾹 응응? 딱! 파!

가기 싫어하는 진희를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내놓고는 꼬마숙녀의 손을 잡고서 천천히 걸어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정류장 앞의 노점상에서 솜사탕 하나씩을 사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며 무작정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지 희원아?”

“그냥, 버스 종점까지 가요 오빠.”

“어 그래. 그런데 보자. 이 버스의 종점이 어딘가 보자. 오, 다목적 둑이구나. 야, 의외로 괜찮은 곳 같은데.”
“정말이요? 근데 오빠, 다목적 둑이 뭐 에요? 다목적 댐은 알겠는데,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 그게 그거야. 오빠는 말이지. 다목적 댐이라고 안 하고, 다목적 둑이라고 한단다. 될 수 있으면, 우리말을 애용하자는 취지에서 말이지. 너 이 오빠가 말이야 세상을 막 사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 삶에 있어서의 몇 가지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는 거 잘 모르지? 그건 말이야. 될 수 있으면 외래어를 남용하지 말자. 그리고 깡패 짓거리를 할지언정 될 수 있는 한 의적 쪽으로 나가보자 하는 것이야. 또 어머니께 효도하고, 나 하고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역시 철저히 의리를 지켜주고 도움을 베풀어 주자 하는 것이지. 물론, 여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너도 이미 알게 됐다시피 크게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희원아. 이 오빠는 말이야. 싫다는 여자 억지로 내 여자로 만든 적은 없어. 여자도 좋다고 했을 때, 기꺼이 내 여자로 만들었을 뿐이지. 희정이 언니도 그렇고, 주미 언니도 마찬가지야. 너 정말, 그거 하나는 알아주기 바란다.”

“알아요 오빠. 저도 오빠가 그런 사람이라는 거. 그래서 희정이 언니한테도, 우리 엄마한테도 주미 언니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 에요. 물론, 처음엔 많이 괴로웠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오빠의 그런 모습 그 자체를 그냥 인정하기로 했으니까요.”

“녀석, 기특하기도 하지. 그 대신 말이야. 앞으로 오빠가 너한테는 정말 잘 해 줄 거야. 이런 내 마음 잘 알지?”

“네, 오빠. 고맙습니다.”

애가 아니여. 정말 아니여. 그리고 뭐가 고맙다는 것이여. 그냥 이런 호색한 새끼! 해 버려. 하기야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만큼 요물 덩어리도 없는 겨. 잘 나가는 여변호사가 살인마 죄수와 사랑에 빠지는 경우를 한번 보라고. 그런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했을 겨. 그게 다 사랑, 그 사랑이란 요물 자석현상 때문 아닌 가 배. 또 승주 역시 마찬가지여. 대한민국 최고 인기 여가수가 뭐가 부족해서 나 같은 고삐리 자식을 단숨에 뿌리치지 못하고, 그 야밤에 산속 공원까지 일부러 나와 줬겠어? 그게 다 사랑이라고 하는 요물 자석현상 때문 아니여? 왜 이런 말도 있잖여. 여자는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마련이라고 말이여. 에고, 같다 붙이기는 잘도 같다 붙이는구먼. 딱! 파!

다목적 둑으로 향하는 구비지고 한적한 길을 시내버스는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고삐리와 국삐리 한 쌍(?)은 정말 모처럼(?)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한 쌍’은 그렇다 치고, ‘모처럼’이라고 하는 단어 역시 잠시 주목 해 보자. 물론, 의젓한 아이야 그 단어를 충분히 갖다 붙일 수 있는 건덕지가 있을 것이다. 호색한 녀석 여자문제 때문에 속을 많이 썩였기 때문이지. 하지만, 호색한 녀석은? 허구 헌 날, 제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녀석에게까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단어를 갖다 불일 수 있을까? 음, 그렇긴 하다. 껄적지근 하기는 하지만, 억지로 갖다 붙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왜? 여기서 말하는 ‘모처럼’은 국삐리와의 건전하고도 범생이스러운 시간 보내기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한마디로 다른 여자들하고 밤마다 질펀하게 그 짓거리를 하지 않는 모처럼의 또 다른 건전한 시간이란 의미인 것이지. 

그랬는 디, 그랬는 디, 허거덕! 또 뭔 일 났냐고? 아니여. 별 일 아니여. 가만, 근디 여기는 또 어딘 겨? 그렇군. 인적 뜸한 소공원이구먼 그려. 다목적 둑은 어디다 팽개치고 느닷없이 웬 소공원이냐고? 그게 말이여.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여. 의젓한 아이하고 그렇게 모처럼 건전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말이여. 다목적 둑 근처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 곱빼기까지 아주 맛있게 시켜먹고 말이여. 그 동네 옆 소공원으로 배를 꺼치러 둘이서 함께 들어갔던 거라 이 말이여. 그랬는 디, 그랬는 디 말이여,

“아니, 희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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