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9. 09:10ㆍ창작문학관
제 15장 홍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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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가는 골 댁과의 정사를 질펀히 끝내버린 추판석은 지쳐 늘어진 채로 미동도 않고 있는 그녀의 기미 낀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속살만큼은 여전히 젊은 여자 못지않은 탄력과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십년을 함께 살을 섞어온 사이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가는 골 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조강지처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가는 골 댁과 살림을 합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 자신도 결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두 사람의 마음속에 여전히 깊은 뿌리로 남아있는 또 다른 두 사람에 대한 한 맺힌 애증 때문이었다. 판석은 판석대로, 가는 골 댁은 가는 골 댁대로 그 뼈저린 아픔과 분노의 기억을 절대로 떨쳐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일부러 더 많이, 그리고 더 뜨겁게 두 사람은 서로의 몸뚱이를 탐닉 해 들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요즘 들어서는 아이들 눈치 때문에 그 밀회의 횟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빨리 가 봐. 정님이 돌아올 시간 됐어. 말숙이도 기다릴 테고.”
바지를 꿰 차며 판석이 중얼거렸다.
“알았어요. 그런 디 말이에요 정님 아버지.”
흐트러진 머리를 추스르고 난 뒤, 열심히 옷을 주워 입고 있던 가는 골 댁이 힐끗 판석을 돌아보았다.
“왜?”
“정님이 그 애 말이에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에요?”
“사람 싱겁긴. 느닷없이 그 애 얘긴 왜 꺼내고 그려? 열심히 하고 있겠지. 다른 때도 아니고, 고3아녀? 거기도 잘 알면서 뭘 물어?”
가는 골 댁의 흐벅진 방둥이 살을 철석 내리치며 피식 웃음을 흘리는 판석.
“내가 보기에는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서 하는 소리에요. 그 애가 혹시 지 에미 생각나서 허튼 짓이나 하고 다니는 게 아닌 가해서. 사춘기이기도 하잖어요.”
“그게 무슨 소리여? 그리고 그 기집 얘기는 왜 또 끄집어내고 그려? 왜? 어디서 정님이가 무슨 허튼 짓이라도 하고 다니는 걸 본 겨?”
그제야 판석도 정색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본 것은 아니고, 윗마을 사는 여편네가 시내서 오늘 정님이를 봤대잖어요.”
“그려서 정님이가 머스매하고 어울려 다니는 꼴이라도 봤다는 건가?”
“그렇다네요.”
“뭐?”
“그 여편네 말이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더래나 뭐래나. 하는 짓을 보니, 단순한 친구 사이 같지가 않더래요.”
“우리 정님이가 정말 그랬다는 거지? 단순한 친구 사이 같지도 않더라고?”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인데 단도리 좀 잘 시켜야겠어요.”
“음......”
“그렇다고 손을 대지는 말고요.”
“알았어. 당신은 얼른 가 보기나 혀. 말숙이 목 빠지겄어.”
가는 골 댁이 돌아가고 나서도 밤 열한시가 넘어가도록 정님이는 귀가를 하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학교나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 늦는 것으로 가볍게 넘길 일이었지만, 가는 골 댁의 귀 띰을 받은 이상, 오늘만은 예사로 그냥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 따끔하게 다잡아 놓는 것도 그 애 자신을 위해서나 스스로를 위해서도 두루두루 좋은 일이 될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가는 골 댁 말마따나 정님이 역시 참 불쌍한 아이가 아니던가. 그 어린 나이에 생떼 같이 생모를 잃고, 홀아버지 밑에서 설운 세월을 지내온 그 아이를 생각하면. 그런 까닭으로 판석 역시 정님이를 위해서 진작 가는 골 댁과 합쳤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생각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춘화에 대한 깊은 애증과 질긴 미련의 염이 오늘 내일을 거쳐 기어코는 여기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판석은 그렇게 마당 한 가운데 장승처럼 우뚝 선 채로 별빛 총총한 밤하늘을 하염없이 우러르는 것이었다. 정님이 엄마가 집을 나가던 날 그 밤에도 오늘처럼 이렇게 별빛이 하늘가득 흐드러져 있지 않았던가. 바로 그 때 돌담길 밖으로부터 풀잎 스치는 걸음 소리가 가만가만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정님이 발소리가 분명할 터였다.
“정님이냐?”
반가운 마음에 판석은 초다듬이질을 해 두리라 하던 생각조차도 잊고 말았다.
“네, 아빠......”
정님이의 목소리는 오늘도 역시 맥이 풀려 있었다. 꽤나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런 마음 상태로 남자친구를 사귀고 다닌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반가운 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 상태로나마 그런대로 자신의 삶을 다잡아 나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3 때가 아니던가. 아무리 딸자식이 이성 친구를 만나는 것에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라고 해도, 지금은 진실로 때가 아닌 것이다. 남자친구는 나중에 사귀더라도 오로지 학업에만 힘을 보태야 할 시기인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 어떻게 해서든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은 것이 그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배신한 그 여자에게 여 보란 듯이 복수를 해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것이 비록, 복수의 방법이 될는지 아닌지는 굳이 따져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야반도주한 여편네 여 보란 듯이 혼자서도 딸자식을 잘 키워냈다는 주위의 평판을 듣게 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요즘 공부하기 힘드냐?”
“아니에요. 그런데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 그야 애 저녁에 진작 차려 먹었지. 너는 어땠어? 저녁 잘 사 먹었어?”
“네.”
대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판석은 굳이 정님이를 초다듬이질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딸자식인 것이다. 저토록 고운 아이에게 그 어떤 녀석이고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정님이는 커갈수록 제 어미의 외모를 많이 탁 해 가고 있었다. 춘화 역시도 소녀 시절에는 정님이의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리라.
“배고프면 밥 좀 더 먹던가? 찬 밥 남았는 디.”
“됐어요.”
“그래, 그럼 정님아, 이리 와서 아빠 곁에 한번 앉아 봐.”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래. 오랜만에 우리 부녀 정담이라도 한 번 나누어 보자꾸나.”
역시, 좋게 한번 짚고 넘어가 보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불쌍한 딸자식이라도 챙길 것은 챙겨 주어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오히려 딸자식을 더 크게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리라. 부녀는 마당 한쪽의 평상으로 가서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며 쏟아질 듯 명멸하고 있는 밤하늘 별빛들 쪽으로 가만히 시선을 옮기는 것이었다.
“거참 별 한번 흐벅지기도 하다. 헌데 정님이 너, 오늘 말이여. 학교에서 죽 공부하다 온 겨?”
“네?”
정님이의 가슴은 순간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그런 질문을 던져올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학교에 남아서 여태 공부 하다 집으로 온 거 맞냐고 인석아?”
“그......럼요 아빠. 그런데 왜......그러세요?”
“저기 말이다. 오늘 누가 그러는 디 시내 나갔다가 거기서 너를 봤다고 해서. 니가 어떤 남학생하고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을 봤다는 겨.”
“제가요? 누가요? 아니에요 아빠. 절대 그런 일 없었어요.”
“정말이여?”
평소와 달리 많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판석은 그 여편네가 보긴 제대로 본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아빠. 고3이 그 시간에 어떻게 시내에 있어요. 그랬다가는 선생님한테 맞아 죽는데.”
“그려? 그렇다면 그 아줌마가 다른 아이를 너로 잘 못 본 거로구나. 하긴, 우리 딸 네미 말을 믿어야지 내가 누구 말을 믿겠냐? 하지만 정님아, 이 사실만은 잘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아빠는 오직 낙이라고 하는 것이 너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빠는 말이여. 오로지 니가 잘되는 거 하나 밖에는 바람이 없어. 너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고, 좋은 직장에 보내고 싶고, 또 좋은 신랑감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는 거 말이다. 아빠 마음 잘 알겠지?”
“알아요 아빠. 저도 고생하시는 아빠를 위해서 꼭 좋은 대학교에 들어 갈 거 에요. 저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올 한 해만 잘 참고 견디면 된다. 남자친구 같은 거야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얼마든지 사귈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아빠. 저 정말 오늘 시내에 나간 적 없었어요.”
“알어, 믿는다니께. 행여 앞으로라도 그러지 말라는 뜻이여.”
“알았어요. 그럼 저 이만 들어가 봐도 되요?”
“그래라. 몸 축나니께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지는 말고. 잠도 충분히 자 두어야 하는 겨. 그리고 출출하면 뭐 좀 더 먹고?”
“아니 됐어요. 씻고 나서 책 조금만 더 들여다보다가 잘게요.”
“알았다. 흐흠! 대학이 뭔지 꽃 같은 우리 딸 네미 다 잡는구나.”
“아빠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정님은 씻는다는 생각도 잊고서 가만히 벽에 등을 기댄 채,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시내에서 동기 오빠와 접촉한 사실을 아버지가 눈치 챈 사실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숨어 다니고 있는 동기오빠에 대한 걱정의 크기가 더 확대 되어 온 때문이기도 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인 것이다. 생각 할수록 동기 오빠가 그렇게 숨어 다녀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그런 지극히 오도된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할 뿐이다. 정작 국민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사려야 할 존재는 반민주적 독재 행각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는 파렴치한 정치 집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말을 들려준 동기 오빠의 설명이 역시 더 더욱 절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동기 오빠와 자신의 금지된 사랑 역시 지극히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행각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을 차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점을 감안 해 본다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라 반론을 가해 온다고 해도 아무 대꾸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들에게도 할 말은 많지 않은가. 금지된 사랑을 차마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원죄는 그 값만큼 댓 가를 치러 주면 그만이다. 그 대신으로 질기도록 반민주적 행태를 자행 하며 동기오빠를 괴롭히고 있는 독재 집단 또한, 그 값 만 큼의 댓 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었다.
오말숙은 마실 나갔던 어머니가 울안으로 들어서면서 연신 자신을 소리쳐 부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 부쩍 더 심해진 현상이었다. 공부역시,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동기오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정님이 언니와 동기 오빠가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아니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는 사실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그 순간부터 지속되어온 현상인 것이다.
“말숙아? 아, 이 년이 대체 귀에 못을 박은 겨? 왜 대답을 안 하는 겨?”
오랜만의 질펀한 정사로 인하여 걸음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하초 부위의 뻐근한 느낌에 빠져있던 가는 골 댁은 일부러 더 그렇게 딸네미를 소리쳐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었다. 이웃집 남자와의 밀월행각을 자식에게만큼은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그런 식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 나 지금 공부하는 중인데.”
제 방의 지게문을 빼꼼히 열어 보이며, 동그란 얼굴을 반쯤 내밀어 보이는 말숙. 그 표정에는 짜증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이구 대견한 내 새끼, 여태 공부하고 있었져? 그래 공부 하느라 출출하지는 않은 겨?”
막상 그렇게 말숙이의 얼굴을 드러내 보이게는 했지만, 정작 무슨 큰 볼일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가는 골 댁은 그런 식으로 재빨리 말을 돌려버렸다. 그러면서도 딸아이의 표정이 무언가 달라진 점은 없는 가하고 자세히 들여 다 보는 것이었다.
“괜찮아 엄마. 배 안 고파. 나 공부 더 해야 하니까 엄마 먼저 주무세요.”
“그러니? 대견한 것. 알았어. 그럼 공부 하다가 출출해지면 부엌에 가서 고구마 좀 집어 먹어. 삶아놓은 거 말이여. 빨리 안 먹어 없애면 쉬어 터지니께.”
“알았어요. 그럼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내 귀여운 새끼. 공부도 쉬엄쉬엄 해야 하는 겨. 너무 오래까지는 하지 말거라.”
“네 엄마.”
그러면서 내놓았던 얼굴을 두꺼비 혀처럼 냉큼 방 안으로 들여 놓는 말숙. 닫혀버린 지게문 안쪽에서 문고리 걸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저게 아무래도 사춘기지 싶어. 그렇지만 정님이 마냥 머시매들은 만나지 못하게 해야지. 공부하는 애가 머시매들은 무슨. 머시매들은 나중에 대학 가서도 만나게 하면 되니 께.
그런 생각을 하며 가는 골 댁은 다시 한 번 더 하초 부위의 뻐근한 느낌에 부르르 하고 몸을 떨었다.
가는 골 댁이 그렇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피곤한 삭신을 잠 귀신에 내 맡겨 버리고 난 뒤, 한참의 시각이 흘러 간 때였다. 그 때까지도 자신의 방 한쪽 벽에다 등을 기대고 앉은 채, 골똘히 생각에 젖어있던 정님은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탁! 탁!
“네......아빠.”
“아냐 언니. 나야.”
말숙이의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응당 아버지일 것으로 짐작했던 정님으로서는 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들어서는 말숙이가 이렇게 늦은 시각에 마실을 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니가 웬 일이니?”
지게문을 소리 없이 열어주며 정님은 말숙이의 동그란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학교 체육복 차림의 말숙이는 툇마루 턱에 허벅지를 붙이고 선 채, 두 손을 앞으로 끌어 모아 쥐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어린 시절의 말괄량이 모습이 들어있지 않았다.
“마실 왔어 언니, 잠깐 들어가도 돼?”
“마실? 어, 그래. 어서 들어와.”
“아저씨는 주무시는 거야?”
“그래.”
방문을 닫자마자 말숙이는 아랫목 쪽으로 스러지듯 다가가더니, 울퉁불퉁한 황토벽에다 등을 척 기대고 주저앉았다. 정님이 언니 집에 마실을 올 때 마다 늘 해 보이는 모습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정님이 역시도 살풋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 앉는다.
“공부하고 있었어 언니?”
고무줄로 묶은 갈래머리를 나풀거리며 정님 언니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말숙이.
“아니.”
“그럼?”
“그냥 이 생각 저 생각 좀 하느라고. 그런데 무슨 일이야? 너 요즘 들어서는 이렇게 늦을 때 안 왔었잖아?”
“흠, 나도 언니처럼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공부가 잘 안 되서 말이야. 그래서 언니 생각이 나서.”
“왜?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니? 아줌마 어디 아프신 거야?”
“아니야. 울 엄마가 아픈 게 아니고 그냥 내 마음이 좀 싱숭생숭해서.”
“뭐어? 기집애도. 어린 것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정님이가 콧등에 주름까지 세우며 웃는 시늉을 해 보이자, 말숙이의 동그란 얼굴은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변했다. 동기 오빠의 마음을 홀리는 정님이 언니만의 독특한 표정인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후우!”
“얘가 왜 이래? 어린 애가 웬 한숨? 말숙아, 너 정말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언니, 나 이제 어린 애 아니야. 그리고 나 말숙이라는 이름도 싫어.”
“말숙아?”
“말숙이라는 이름 싫다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야? 이름 때문에?”
그러면서 정님이는 더욱 더 콧등의 주름을 풀지 못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숙이라는 이름은 너무 고전적인 느낌이 물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숙이를 말숙이라 부르지 않고 어떻게 부른단 말인가. 그냥 숙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숙이라는 이름 역시도 크게 고상하다거나 세련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기야 정님이라고 하는 자신의 이름 역시 썩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니야. 이름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말을 해 봐. 언니한테 털어놓지 못할 고민이 어디 있니? 그리고 말숙이라는 이름이 싫으면 그냥 숙이라고 불러줄 게. 어떠니?”
“숙이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데 언니는 정님이라는 이름 마음에 들어?”
“내 이름? 아니야. 나도 별로야. 촌스러운 이름이잖니.”
“거짓말. 정님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예쁜 이름인데. 동기 오빠도 좋아하는 이름이잖아.”
“뭐?”
순간 정님의 콧등 주름이 거짓말처럼 지워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말숙이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배시시 웃는 표정으로 변하며 은근히 눙치고 드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말괄량이 기질이 완전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사실이잖아. 동기 오빠는 정님이 언니를 좋아하니까 이름도 좋아할 거란 말이지. 내 말이 틀려?”
“동기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정님이는 이제 정색한 표정까지 지어보이고 있었다.
“왜 그래? 동기 오빠가 사촌 오빠니까 언니를 좋아하는 거 사실 아냐? 그럼 싫어하기라도 한단 말이야?”
그러면서 속으로 고소까지 흘리는 말숙이. 애초에 동기 오빠만 아니라면, 정님이 언니를 이렇게까지 원망하게 될 필요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동기 오빠가 정님이 언니를 사랑하고 있는 마당에 있어서는 아무리 정님이 언니라고 해도 저절로 원망스러워지는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하지만, 동기 오빠도 내 이름을 그렇게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던데?”
그러면서 속으로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는 정님. 도둑놈이 제발 먼저 저려 한다고 지레 짐작으로 경직된 표정을 지어 보인 자신이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기 오빠가 정말 그렇게 말을 했다는 거야?”
말숙이는 동기 오빠 이야기를 더 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동기 오빠 소식이 궁금해서 온 마당에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아니, 직접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눈치를 보니까 그렇다는 말이야. 동기 오빠도 틀림없이 내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애. 그건 그렇고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말숙이 너 요즘 공부는 잘되는 거야?”
정님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동기 오빠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숙이와 제아무리 흉허물 없이 지내고 있다 해도 동기 오빠와 관련된 사항만큼은 오로지 혼자서만 생각하고, 간직하고, 그리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싶은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동기 오빠가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이 힘든 시기가 아니던가.
“언니, 나는 말이야. 동기 오빠의 웃는 모습이 정말 좋더라. 키도 크고 잘생기기도 했고, 또 마음씨도 착하고.”
말숙이는 정님이 언니의 속을 이미 훤하게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더 심통도 부려보고 싶은 것이다.
“동기 오빠 이야기는 그만두자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 해.”
“왜?”
“어? 응 그냥.”
“특별한 이유도 없으면서 왜 하지 말라는 거야. 싫어. 나 동기 오빠 이야기 더 할래.”
“말숙아?”
정님이 언니의 표정이 표가 날만큼 더 굳어진 모습을 말숙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쯤 해서 그만두고 물러날 때라는 사실 역시 충분히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알았어 언니. 그 대신 딱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그만 둘 게. 요즘 말이야. 동기 오빠, 왜 안 놀러 와? 그전엔 자주 놀러 왔었잖아.”
“......”
그러는 말숙이의 모습을 보며 정님은 자신도 모르게 콧등에 다시 주름을 지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어렸을 때가 갑자기 떠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 스스로도 그 얼마나 많이 동기 오빠를 좋아하고 따르곤 했던가.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이고. 지금의 말숙이가 동기 오빠를 좋아하는 것 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할 것도 없는 것이다.
“언니, 왜 웃어?”
말숙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가만히 내 쉬었다. 정님이 언니가 일단은 저렇게 콧등에 주름을 지었으니, 동기 오빠 이야기를 좀 더 끌어가도 좋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숙이 너, 동기 오빠가 그렇게도 좋으니?”
“피, 언니도 좋아하면서 뭘 그래. 동기 오빠같이 잘생긴 남자를 어떤 여자인들 싫어하겠냐고.”
그러면서 말숙이는 이렇게 더 속으로 덧붙이기까지 했다.
언니는 동기오빠를 사랑하고 있잖아. 사실은 나도 그래 언니. 나도 동기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언니한테 동기 오빠를 빼앗기고 싶지 않단 말이야. 미안 해 언니.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하란 말이야. 그리고 동기오빠하고 나는 나이 차이가 네 살로 적당하지만, 언니하고는 겨우 두 살 차이야. 옛날부터 부부 사이는 네 살 차이가 가장 적당하다고 했어. 결정적으로 언니하고 동기 오빠는 사촌간이라서 안 되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언니하고 오빠는 절대로 맺어져서는 안 되는 거야. 아니, 맺어질 수가 없어.
“그래 말숙아. 나도 네 마음 알아. 네가 동기 오빠를 많이 따르고 있다는 거. 하지만, 동기 오빠는 더 이상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을 거야. 아니, 놀러 올 수가 없어.”
“왜? 왜 올 수 없는 건데?”
말숙이의 동그란 두 눈이 크게 치켜 뜨여졌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기에. 동기 오빠가 정님이 언니네 집으로 다시 놀러 올 수 없는 이유보다 더 궁금한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그건 말이야. 오빠는 이제 대학생이기 때문이야. 대학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야 하잖아. 그러니 무슨 시간이 있겠니. 안 그래?”
“말도 안 돼!”
말숙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건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말숙이는 이미 정님이 언니가 그렇게 말하는 의도를 진작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니?”
정님이는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숙이의 그런 모습이 더 이상은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는 철부지 어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고3이었을 때도 자주 놀러왔었어. 대학교 공부 할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고3시절만큼은 아닐 거야. 그러니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니? 설사, 네 말이 맞고 내 말이 틀렸다고 치자. 그래도 변할 것은 없지 않니? 설령 공부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오빠는 이제 자기 나름대로 바쁜 일이 많아졌을 거야. 대학생이니까 학과 공부도 해야 하고, 또 친구들과도 어울려야 하고, 또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잖아.”
“거기다 언니와 몰래 만나서 연애도 해야 하고?”
“뭐?”
입을 굳게 앙다문 채, 무섭도록 자신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는 말숙이의 두 눈을 정님은 그저 경악의 눈길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흘러간 것일까. 마침내, 정님이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너......지금 그......게 무슨 소리니?”
말숙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가는 팔로 방바닥에다 두 손을 짚고 있는 정님이 언니의 가녀린 몸뚱이가 이제라도 곧 쓰러질 듯 매우 위태 해 보였기 때문이다.
“언니 미안해. 내가, 내가 그 말만은, 그 말만은 끝까지 피하려고 했었는데, 결국은 나도 모르게 그만. 정말, 정말 미안 해 언니.”
말숙이의 붉게 충혈 된 두 눈에서는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이 수제비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말숙이의 그런 모습을 놀란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정님은 마침내 모든 것을 다 깨달을 수 있었다. 그토록 소중하게 지켜온 자신의 금지된 사랑이 결코 완전한 비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금지된 사랑은 더 이상 안전하게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는 그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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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남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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