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7. 10:51ㆍ세상이야기
20년 끽연 생활을 접은 비결
필자가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쯤 전인 서기 1980년 무렵으로 기억이 된다. 그 당시 필자는 상업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는데 처음에는 담배를 직접 구매해서 피울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관계로 부친의 담배를 몰래 한 개비 두 개비씩 훔쳐내어 피우기 시작했다. 물론 항상 마음을 조아리면서 말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부친의 담배를 훔쳐 피우는 짓을 당장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비록 독하고 맛이 없게 느껴지는 담배이기는 했지만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정신적인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서 싫은 담배연기의 느낌 그 것 하나에만 오로지 집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친의 담배를 훔쳐 피우는 행각 역시 결국에는 한계상황에 봉착하고 있었다. 한 두 개비씩 훔쳐 피우는 정도야 크게 표가 나지는 않는다고 해도 여러 개비가 다량으로 연속해서 축나는 경우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담배를 직접 구입해 피울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집안 경제 형편상 꼬박 꼬박 용돈을 타 쓸 만한 처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택한 방법이 바로 어머니 지갑속의 동전을 훔쳐 내어 가장 하급 품 담배라 할 수 있는 ‘청자’담배를 사 피우기 시작한 일이었다. 고급담배인 ‘선’담배의 맛보다는 다소 독할지언정 그 가격만은 크게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 후 필자는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재수 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실력만으로는 4년제 지방 대학교조차에도 곧바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을 들여서 공부를 해도 모자랄 고 3 시절에 그런 치명적인 절망과 방황의 시기마저 겪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늘어나는 것은 당연히 흡연실력(?)이요 줄어드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랑의 마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재수생활 6개월 정도가 지나면서부터는 아침에 양치질을 할 때마다 헛구역질 현상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우기 전까지는 그런 현상이 전혀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단 한순간이라도 담배가 없으면 견뎌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대학생활에서만큼은 고등학교나 재수 생활 때의 그런 악몽(외톨이 생활)이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 또 다시, 그 지긋지긋한 악몽이 재현되면서 흡연이나 술에 의지해 고통을 잊어 보려는 욕구 역시도 날마다 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날마다 계속되는 담배와 술의 파상 공세 속에서 필자의 몸은 그야말로 망신창이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혈기 왕성한 때라서 그런지 그런대로 잘 버텨주고는 있었지만 지금 시기에 만일 그 시절만큼이나 음주와 흡연 생활에 젖어 산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무슨 중병 한 가지는 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필자는 지긋지긋한 외톨이 생활을 모면 해 보려고 또 다른 선택을 하고 만다. 대학생활 반 년 만에 다시 휴학계를 내고서 군 입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군대는 계급 집단이라서 그런지 사회에서 겪어왔던 그러한 종류의 따돌림 현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고참들에게 기합을 받는다거나 힘든 훈련생활이 날마다 계속되고는 있었지만 그런 생활이 오히려 더 정신적으로는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하자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 시기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문제는 역시 그 흡연 습관이 문제였다. 요즘 군대는 금연운동이 한창이라고 한다지만 필자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만 해도 금연 운동은 고사하고 주기적으로 한 번씩 사병들에게 담배 한 보루씩이 버젓이 지급되고 있던 시기였었다. 물론, 담배가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해서 지급을 받을 수도 있기는 했지만, 필자와 같이 사회생활 때부터 담배를 많이 피워온 사람들로서는 공짜로 지급되는 보급품 담배를 일부러 마다한다거나 굳이 다른 물건으로 대체해서 지급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의 보급품 담배로는 ‘은하수’와 ‘한산도’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청자‘와 ’선‘담배의 중간정도 급 담배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군 복무 중에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가장 강력한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일과시간 훈련 매 50분마다 주어지게 되는 10분간의 휴식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 10분간 휴식 시간이 시작될 때 마다 매번 교관이나 고참병들이 버릇처럼 되뇌는 소리가 하나 있었으니 말이다.
“자, 10분간 휴식. 모두 담배 일발 장전!”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참 많이도 들어보았을 말일 것이다. 그러니 힘들게 50분간의 훈련을 받고나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된 사병들로서는 당연한 듯이 담배를 피워 물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동료들이 맛있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그 시간에 나 혼자서만 멀뚱멀뚱 가만히 앉아 있는 다는 것도 왠지 멋쩍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고 말이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필자는 담배를 하루에 한 갑 이상씩 피워대는 생활을 여전히 계속 해 나가고 있었다. 삼시 세 때 밥 먹고 나서도 피우고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볼 때도 꼬박꼬박 피워 물었고 고참 들에게 얼차려를 당한 후에나 하급자들에게 얼차려를 주고 나서도 열심히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심지어 야간 외곽 경계(보초) 근무를 설 때조차도 몰래 담배를 피워 물기 일쑤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회생활 때 하루에 한 갑 반 이상을 피워대던 버릇이 군 복무 시절에는 거의 한 갑 수준 정도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줄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담배를 한가하게 피워 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탓이기도 했다.
그나마 전역 후에는 흡연양이 하루 한 갑 정도 수준에서 잘 유지되고 있는 편이었다. 아마도 군 생활 3년 동안에 그런 좋은(?)버릇이 들어 있어서였으리라. 그런데 이상한 점은 군 복무 시절에는 잠시 멈추어 있던 그 현상이 또다시 재발하고만 일이다. 바로, 예전에 양치질 할 때 마다 나타나곤 하던 그 헛구역질 현상 말이다. 아마도 군 복무 시절에는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량이 많았던 시절이라 니코틴이나 타르 성분 같은 것들이 땀과 함께 재빨리 체외로 배출되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데 이것은 오로지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그런 식의 흡연 생활이 5년 10년 계속되던 와중에 마침내 필자의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전환기가 닥쳐오고야 만다. IMF 경제위기 시절이었는데 수 년 동안 잘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느닷없이 명예퇴직을 당하고 만 것이다. 바로 그 시절에 필자가 잠시 선택했던 일이 황당하게도 어부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가까운 바다에서가 아닌 동지나해 쪽 바다에서 3개월간이나 머물며 고기를 잡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더 큰 문제는 힘든 뱃일보다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된 끽연의 양에 있었다. 평소 ‘88’담배 하루 한 갑 정도 수준에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흡연의 양이 어부 생활을 하면서 급작스럽게 하루 두 갑 수준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물을 던져 넣을 때나 그물을 당겨 올릴 때, 그리고 헤어진 그물을 기울 때는 물론이고 밥 먹을 때나 술 마실 때, 용변을 볼 때, 또 고참 선원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일 때 등등 하루 24시간 내내 언제나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고참 선원들이 늘 상 그런 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필자 역시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활방식을 따라하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바보 같은 핑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 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 하루에 담배 두 갑 가까이를 피워대는 버릇이 한참 뒤에까지도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10년 가까이나 더 말이다. 그러했으니 몸 상태가 건강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도적놈 심보가 아니겠는가.
그 후 다른 직장에 취직해 7년 정도가 더 흐른 30대 중반 이후로 드디어 내 몸에 이상한 징후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 담배 연기만 들이마시면 왼쪽 가슴속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는 현상이었다. 헛구역질 현상 역시도 수시로 계속되고 있었고 말이다. 이제는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당장 담배를 끊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나 니코틴 성분에 찌들어있던 몸은 필자의 그런 다짐을 가볍게 물리쳐 버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얼큰한 음식이나 술을 마시고 난 직후가 문제였다. 아무리 왼쪽 가슴이 아파오고 헛구역질현상이 심해진다 해도 그런 음식들을 먹고 난 후에 피워 물게 되는 한 개비의 담배의 맛을 도저히 물리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 이전의 금연결심이 수 십 차례나 어긋나게 된 주된 이유 역시도 바로 그 것에 있었다. 얼큰하거나 매운 음식, 그리고 술을 마시고 난 뒤의 구수하고도 독특한 담배 맛 느낌 그것 말이다.
결국, 39세로 접어들던 그 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어느 날인가 회사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던 중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혼절을 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그 때의 일이 선명하게 떠 올라온다. 갑자기 눈앞의 세상이 노랗게 변해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던 현상. 세상이 노랗게 변해 간다는 말이 실제로 존재하는 일임을 그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만화나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다행히 가족들이 목격하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 깨어날 수는 있었지만 그 때 이후로 필자는 지금까지 5년 동안 절대 담배를 피워 물지 않게 된 것이다. 아니, 피워 물 수가 없는 것이다. 담배 연기가 조금만 폐 속으로 들어가도 찌르듯 하는 왼쪽 가슴의 통증 때문에 담배를 억지로 피워보려고 해도 피워 물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약간 운이 좋았던 경우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몸이 먼저 알아서 제 때에 경고를 해 준 결과이기도 하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더 큰 병으로 발전을 하기 전에 몸이 제 때에 알아서 신호를 보내주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분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필자와 같은 운을 모두 기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희극인 이었던 故 이주일씨 같은 경우일 테고 말이다. 이주일씨의 경우에는 노년기에 접어들 때까지도 계속 담배를 피웠다는 것을 보면 필자처럼 가슴속의 찌르듯 하는 통증 현상이 일찍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 결론은 확실해 진 것 같다. 더 이상 담배로 몸을 망쳐버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금연 경험에 의하면 의외로 담배 끊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비록, 왼쪽 가슴의 통증으로 인하여 담배를 피워 물지 못하게 된 특별한 경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강제로 담배를 피워 물지 않게 되니 3개월 정도가 지나가면서부터는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다지 담배 생각이 나지 않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금연에 있어서는 3개월이 가장 큰 고비라는 사실을 산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시기만 잘 참고 견디게 되면 누구라도 담배를 끊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지금 필자의 글을 읽고 계신 골초 흡연자 여러분들께서도 꼭 실천을 한 번 해 보시기 바란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3개월, 그 3개월만 감옥에 갇힌 심정으로 꼭 참고 견뎌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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