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7. 09:24ㆍ허세창단편소설
[단편소설] 모욕죄
지은이: 허세창
오랜만에 산행을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기운이 많이 빠진 상태다. 몸이 상당히 피로하다. 게다가 투닥투닥 굳은 비까지 내려오기 시작하니,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가 찐득거리는 몸의 땀이나 씻어내고, 어서 빨리 자리에 누워야겠다.
했는데, 저기 저 파란 철대문 밖 우체통 밖으로 삐죽이 대가리를 내비치고 있는 허연 무엇. 뭘까? 전기요금 고지서? 수도요금? 가스요금? 건강보험료? 카드대금? 신문구독료? 생각 했는데, 쓱 뽑아들고 보니, 생뚱맞게도 겉봉에 떡 박혀있는 00경찰서 표식.
놀고먹는 기초수급자한테 뭐 뜯어먹을 거 있다고 경찰서씩이나......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쑥 뽑아들고서 녹슨 철 대문을 찌그덩 밀고 마당 안으로 쓱 들어서니, 그래도 제 주인이랍시고 반갑다 살살 꼬리쳐 오는 개. 제 딴에는 개집 안에서 빗소리에 취해 살풋 선잠이 들었었나 보다.
몸 씻고, 밥 먹고, 팬티 주워 입고는 벌러덩 침대 위에다 사지를 내뻗어 본다. 역시 내 집처럼 편안한 곳이 없다는 생각, 만족감, 혼곤한 수마(睡魔)가 한꺼번에 밀려들고.
갈증이 느껴진다. 전등을 켜고, 비틀비틀 주방 쪽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는 시원한 보리차 한 컵을 쭉 따라 마신다. 벽시계의 시계침은 벌써 새벽 한 시로 향하는 시간. 순간, 눈 가득 들어오는 탁자 위의 덩그런 그것. 00경찰서 표식이 뚜렷하게 박힌 허여 멀건한 그것. 소파 깊숙이로 허리를 밀어 붙이며 느긋이 그것의 겉봉을 뜯어 발긴다.
출석요구서
접수번호 0000-0000 귀하에 대한 모욕 피의사건(접수번호:0000-000000)의 참고인으로 문의할 사항이 있으니 0000.00.00 00:00시에 수사과 사이버범죄수사팀으로 출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건의 요지>
우리서에 접수된 접수번호 0000-0000 모욕사건 관련하여 질의할 것이 있으니 00시 00경찰서 사이버 범죄수사팀으로 출석하시기 바랍니다. 출석일정조율을 위하여 출석요구서 열람하시면 00시 00경찰서 사이버범죄수사팀 000-000-0000으로 전화하여 일정조율하시기 바랍니다.
<구비서류 등>
1, 주민등록증 또는 운전면허증
2, 구비서류2
3, 구비서류3
출석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거나 사건내용에 관하여 문의할 사항이 있으면 사이버범죄수사팀(000-000-0000)으로 연락하여 출석일시를 협의하거나 사건내용을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질병 등으로 경찰관서 직접 출석이 곤란한 경우에는 우편, 팩스, 전자우편 등 편리한 매체를 이용한 조사를 받을 수 있으며, 출장조사도 요청하실 수 있습니다.
0000.00.00
00시00경찰서
사법경찰관 경위 나경례
사법경찰관 경위 나경례
달포 후,
귀하와 관련된 모욕죄 피의 사건에 대하여 당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피의자는 0000.00.00경 인터넷뉴스 0000에 게제 된 고소인의 기사에 “못 보던 걸레가 또 하나 출현했구나. 인생이 참 불쌍하다.”라는 댓글을 게시하여 모욕죄가 성립함. 피해자의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음에도 범죄사실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 것은 피해자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모욕적인 언사에 해당한다. 피의자 범죄혐의 인정되어 00지방검찰청으로 송치합니다.
몇 날 후,
사건번호: 00지법 0000 형제 00000호
진정인 성명: 손해철
주민등록번호: 000000-0000000
주소: 00시 00구 00대로 0000번길00 00주택 0-000호
연락처: 000-0000-0000
고소인 성명: 갈취옥
진정취지: 고소인 갈취옥의 피고소인 손해철에 대한 모욕죄 혐의 고소 행위 자체가 사회 정의와 상규에 어긋나는 대단히 잘못된 행위임을 진정합니다.
진정내용: 공사다망에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본인은 고소인 갈취옥으로부터 인터넷뉴스 댓글에 부적절한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로 모욕죄 혐의 고소를 당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기사 내용에도 나와 있다시피, 고소인 갈취옥은 마약복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 과정에서 그에 불만을 품고 법정 소란 및 법정 모독 행위를 저지른 자입니다. 그 행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분개 및 지탄의 댓글을 올렸고, 저 또한 그 일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 저간의 사정이 있음에도 고소인 갈취옥은 반성과 자숙의 기미는 전혀 없이 오히려 자신의 그릇된 행위 기사 내용에 비판 댓글을 단 사람들을 모욕죄 혐의를 덮어씌워 기획고소 대리전문 변호사를 통하여 일괄적으로 고소를 자행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관련 기관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 있는 합의금을 노린 대량 기획고소 행위를 시도한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대한민국은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시피, 정당한 의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보더라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그 행위에 대하여 비판의 댓글을 다는 행위는 공공의 이익과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허용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물론, 비판의 과정에서 지나치게 저속한 표현을 하거나 욕설을 하는 행위는 지양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제가 보다 고상한 표현으로 마약 복용 및 법정 소란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저속한 표현을 사용한 점만큼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불의를 보았을 때, 감정이 격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비판의 과정에서 일부 과격하고 저속한 표현이 사용 되어졌다고 해도 사회 상규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 너그러이 용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연예인 하 모씨를 자살에 이르도록 한 탁 모씨 관련 OO지법 민사 3단독의 판결 역시도 그러한 취지를 십분 발휘한 현명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와 같은 판결 내용을 참조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씨 등의 댓글 표현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부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언정,탁 모씨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하는 불법행위라고 보기는 어렵다. A씨 등은 인터넷 포털에 게시된 뉴스 기사를 보고, 특정 유형의 범죄 처벌 수위나 범죄 예방 방안에 관한 의견을 제시 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차원에서 댓글을 작성했다. 사건 각 댓글에서는 욕설이나 비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으나, 표현 수위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범죄 같은 사회적 일탈 행위를 다룬 언론 보도와 관련해서 일반 독자가 언론 매체나 인터넷 포털 게시판에 의견을 표명하는 행위를 모욕에 의한 범죄나 불법 행위의 성립을 인정 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무례한 언사나 욕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죄의 성립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취지로 기각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물을 학대해서 죽인 맹 모씨 관련 뉴스 댓글 모욕죄 대량 고소 사건도 재판부의 합리적인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탁 모씨 사건, 맹 모씨 사건과 같이 상대적으로 수위가 덜한 범죄 행위에 대한 비판 댓글조차 재판부의 기각 판결 및 합리적인 판결 조치가 내려지는 데, 하물며 그 보다 더한 마약 복용, 법정 소란 죄를 범한 고소인 갈취옥에게 가하는 비판 댓글이야 더 언급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존경하는 판사님, 이 사안은 고소인 갈취옥이 먼저 중대한 사회적 범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누리꾼들의 큰 분노를 산 사안입니다. 그런 저간의 사정이 있음에도 그 행위를 비판한 뉴스 댓글자들을 과격한 표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적반하장격 모욕죄 운운한다는 것은 인간적 도리로 보나, 사회적 상규 및 도덕적 행위로 보나 대단히 불합리 하고, 적절치 못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판사님의 현명하신 판단과 명철하신 통찰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제 인격적 미성숙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고, 차후로는 절대로 함부로 뉴스 댓글을 달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직장을 잃고 기초수급자 생활을 하고 있는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러하오니, 판사님의 너그러운 처분을 깊이 기대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0000.00.00
진정인: 손해철
두어 달포 후,
사건 0000고약0000
피고인 손해철(00000-0000000)
주거 00시 00구 00대로 0000번길00 0동000호(00동,00주택)
등록기준지 00시 00구 00동 000
주형과 피고인을 모욕죄 판결에 의하여 벌금 500,000(오십만)에 처한다.
부수처분 피고인인 위 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하는 경우 금 100,000(일십만원)을 1일로 환산 한 기간 위 피고인을 노역장에 유치한다. 피고인에 대하여 위 벌금에 상당한 금액
의 가납을 명한다.
범죄사실 별지 기재와 같다. (단, 피의자는 피고인으로 한다.)
적용법령 형법 제311조(벌금형 선택), 제70조 제1항, 제69조 제2항, 형사소송법 제334조 제1항
0000.00.00
판사 오심순
검사 또는 피고인은 이 명령등본을 송달받은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정식재판의 청구를 할 수 있습니다.
보름여 후,
사건 0000초사000 사회봉사허가
신청인 손해철(000000-0000000), 무직
주거 00시 00구 00대로 0000번길00 0동 000호 (00동,00주택)
등록기준지 00시 00구 00동 000
청구인 검사 봉수호
허가대상사건 00지방법원 0000고약0000
1, 신청인에 대한 허가대상사건의 벌금 미납으로 인한 노역장 유치는 사회봉사로 대체하여 집행한다.
2, 신청인에게 노역장 유치 일당 8시간의 비율로 계산한 시간의 사회봉사를 명한다.
허가대상사건의 벌금 미납액 500,000(오십만)원(노역장유치 1일 10만원)에 대하여 사회봉사 대체 집행을 구하는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벌금 미납자의 사회봉사집행에 관한 특례법 제6조 제1항, 제4항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0000.00.00
판사 노장역
신청인은 이 결정을 고지 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신청인의 주거지를 관할하는 보호관찰소의 장에게 주거, 직접, 성명 및 주민등록번호, 가족 관계 또는 교우관계, 최종 학력, 특기, 특정분야 근무 경력 및 자격증, 사회봉사 허가 결정 내용, 운전면허증에 관한 사항 등을 신고하여야 합니다. (벌금 미납자의 사회봉사 집행에 관한 특례법 제8조 제1항, 시행령 제6조)
사회봉사집행 협력기관개요 및 위치안내
명칭 00관리공단00시00동관리소(대민지원-주거환경개선)
사업개요 공공시설 주거환경개선
일곱 날 후,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 보호관찰소에서 이리로 가라고 해서......”
“사회봉사명령이요?”
“예.”
“아직 시간이 안됐습니다. 좀 있다 여덟시 오 십 오 분에 다른 분들과 함께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 때 다 함께 출석사진 찍고 일 시작하시면 됩니다.”
“아 예.”
주택공사아파트 관리사무소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서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아직도 삼십여 분이 남았다. 하릴없이 터벅터벅 걸어 근처에 보이는 어린이 놀이터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가보니, 연세 지긋해 보이는 노인들이 관청에서 나눠 준 듯한 노란색 제복 상의 차림으로 제각기 손에 손에 쓰레기봉투와 집게 하나씩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섰다.
“사회봉사명령 수행 때문에 나오신 분들입니까?”
동변상련의 정(?)을 느끼며 그 중의 한 사람에게 정중하게 여쭤보니, 정색을 하고 손사래를 치는 노인.
“아니! 우리는 공공근로사업이지.”
초장부터 잘못 짚었다.
“그러시군요. 제가 다짜고짜 실례를 범했습니다.”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젊은이는 사회봉사로 나왔소?”
“예,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뭔 죄를 지었길래?”
노인의 옆에서 빤한 눈길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의 질문이다.
“예, 모욕죄입니다.”
“모욕죄? 그런 죄도 있어? 그게 대체 뭔 죈 디?”
“예, 마약 먹고 유죄 판결을 받은 여자가 법정에서 법정 소란까지 피웠다는군요. 그런 여자한테 걸레라고 했다고 오십만 원 벌금을 때려 버리네요.”
“증말? 그건 좀 부당한 디? 마약 먹은 걸레한테 걸레라 했다고 오십만 원 벌금을 멕여?”
또 다른 노인의 흥분된 목소리. 그제야 주변의 심드렁하던 노인들도 크게 관심을 표해온다. 하나같이 너 재수 염 붙었구나 하는 표정들이다. 역시 내가 특별하게 나쁜 짓을 한건 아닌가 보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도 이럴 진 데, 어떻게 경찰, 검찰, 법원에 주석하시는 그 잘난 나리들만이 죄다 그렇게 한통속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려 버릴 수 있는지?
“나는 말이오. 횡단보도 파란 신호등에 건너가고 있는데,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막 지나가는 거야. 그래 열이 받쳐 마침 들고 있던 우산대로 차 뒷 유리를 살짝 한번 쳐 버렸지, 그랬더니, 운전자 놈이 앙심을 먹고 그걸 고소를 한거요. 판사란 작자는 나한테 벌금 삼십 만원을 때려 버리고. 운전자 놈은 잘못이 하나도 없고, 나만 백 프로 잘못했다는 거지. 그런 몰상식한 판사 놈이 어디 있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노인의 흥분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오늘 나 하고 같이 사회봉사명령을 수행 할 동료(?)인 듯싶다.
“아저씨도 오늘 사회봉사 하러 오신 겁니까?”
“그래요. 기초수급자라서 돈이 없으니 벌금을 사회봉사로 대체하고 싶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건 승낙 해주더구먼.”
“저도 그렇습니다. 모욕죄 벌금 맞은 거 사회봉사로 대체 받고 온 길입니다.”
“그렇군. 그나저나 판사란 작자들부터가 문제라니까. 젊은이도 보나마다 억울하게 벌금을 맞았을 게 뻔해. 아무튼 반갑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데 이것도 다 인연이라면 인연일 테지. 그나저나 어서 가 보자고. 아홉시 다 되가는 데.”
“그래야지요. 그럼 어르신들 수고들 많이 하십쇼.”
“두 분 모두 기운 내시오.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 당하지들 마시고. 똥 밟았다 생각들 하고 무조건 참아야지 어쩌겄어. 그렇다고 판검사 멱살을 잡고 뒤흔들 수도 없는 일이고.”
처음 대화를 시작했던 노인의 고마운 덕담(?)을 뒤로 하고, 차 유리 폭행죄(?) 노인과 더불어 다시 관리사무소로 가보니, 우리 말고도 사회봉사명령을 수행하러 온 사람들이 이미 여럿 눈에 뜨였다. 관리사무소 직원들은 누가 새로 출입을 했거나 말거나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그저 각자 제 할 일들에만 몰두 해 있을 뿐. 몰두 해 있는 것인지 몰두 하고 있는 체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를 일이지만. 하기야 사회봉사명령 수행자들이 일 년 열두 달 끊이지 않고 들락거리니 그럴 만도 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침 출석사진 찍겠습니다.”
아침 아홉시 정각이 되자, 컴퓨터 모니터에 깊숙이 얼굴을 파묻고 있던 관리사무소 직원 하나가 갑자기 얼굴을 번쩍 들더니, 모든 죄수(?)들을 향하여 당당한 목소리를 낸다. 그러고 보니 사회봉사명령 수행 인원이 거의 예닐곱은 되어 보인다.
“새로 오신 분들이 계셔서 오늘도 역시 간단하게 봉사 수칙부터 안내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열두 시까지 작업반장님의 통솔 하에 모두들 같이 아파트 경내 청소 및 환경미화 작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두시부터 한시까지는 점심시간입니다. 점심시간 한 시간도 봉사시간에 가산이 됩니다. 그리고 한 시에 다시 출석 확인사진을 찍은 후, 다시 또 반장님 통솔 하에 아파트 경내 청소 및 환경미화 작업을 이어가시면 됩니다. 오후 작업 종료 시간은 저녁 여섯시입니다. 여섯시까지 작업을 하시고, 다시 관리사무소로 집합 하셔서 마지막 출석 확인사진을 찍고 귀가를 하시면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작업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나가시기 전에 출석부에 자필 서명들 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사회봉사명령 수행 선배(?)들이 먼저 순서대로 출석확인 사진을 찍고, 출석부에 자필 서명을 한 뒤, 총총히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도 신참인 우리 두 사람은 사회봉사명령서를 제출하고 본인 확인을 하는 등의 시간을 좀 더 가져야 했다.
“새로 오신 두 분을 포함하여 모두들 반갑습니다. 제가 오늘 작업을 통솔할 작업반장입니다. 일 자체는 그다지 힘든 작업이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 성실하게 작업에 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작업은 아파트 경내 바닥을 청소하고 난 뒤, 경내 곳곳 화단 나무 아래에 쌓인 낙엽더미를 죄다 끌어 모아서 마대자루에 담아 경내 뒤편 공터에 쌓아두는 일입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작업 시작합시다.”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저마다 하나씩 빗자루와 쓰레받기 하나씩을 챙겨 드는 것을 보고, 신참들도 그대로 따라 하려는데, 작업반장이 특별히 내게만 요청을 해 오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손수레를 끌고, 다른 분들 뒤를 따라 가시면 됩니다. 그게 오늘 아저씨가 담당할 소임입니다.”
아무려나 고개를 끄덕이고, 이미 저 만치 앞쪽으로 비질을 해 대며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꽁무니를 손수레를 밀며 따라붙었다. 손수레에는 삽이나 쇠망치, 그리고 곡괭이 등속 같은 것들, 그리고 커다란 종량제 봉투와 마대자루 여러 매가 함께 실려 있었다.
“저 분들이 바닥의 쓰레기들을 쓸어 모아 여기 손수레의 종량제 봉투에 담게 되면, 쓰레기가 다 찬 봉투를 저쪽 쓰레기 하치 장소에다가 가져다 놓아두는 겁니다. 그러면 쓰레기수거차가 와서 알아서 다 실어가요.”
곁으로 다가온 작업반장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예.”
“그런데 아저씨는 무슨 죄로 이런 곳까지 오셨소? 보아하니 이런데 오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아마도 내게서 느껴지는 고상함 풍모 내지는 얌전해 보이는 외양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서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 왔었다.
“예, 모욕죄입니다. 마약 먹은 여자한테 걸레라 했다고, 벌금 오십을 때려 버리네요.”
어린이 놀이터에서 했던 설명을 반복 하는 일이 크게 마뜩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명색이 작업반장이라는 사람이 일부러 관심을 가지고 물어온 질문을 그냥 묵묵부답으로 뭉개버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문제요. 이놈의 나라가 대체 어찌 될라는지. 하여튼 나라가 개판이라니까.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으니. 모욕죄만 해도 그래요. 이 모욕죄라는 것이 우리나라하고 중공과 같은 일부 몇 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괴나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독재국가들한테도 없는 법이라는 거요. 물론, 베트남이야 지금은 많이 개화가 되긴 했지만 말이오. 그게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성격이라서 그렇다지 아마. 그런데도 이놈의 나라는 그놈의 잘못된 법을 쳐 없앨 생각조차 않으니, 하여튼 국회의원이라는 것들이 문제요. 물론, 국회의원 몇 놈이 나서서 진작 폐지 법안을 상정 해 놓고 있다고는 하는데, 벌써 몇 년째 잠만 쳐 재우고 있다니 그게 뭐요?”
명색이 작업반장이라서 그런 것일까? 예상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국회의원들이랍시고, 하는 일도 별로 없이 퍼질러 놀고만 자빠졌으니 큰일입니다. 국민의 혈세가 아까워요. 이런 악법들에 국민들이 어떤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저는 차제에 고위공직자 특권폐지 법안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회의원들이 말입니다. 무려 이백여 가지의 특권과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군요. 매월 약 천 이백 오십 만원씩, 매 해 일억 오천만원의 세비에다가 일곱 명의 보좌관을 두며, 연간 특별활동비 오백 육십사 만원, 간식비 육백 만원, 해외시찰비 약 이천 만원, 차량관련 지원비 천 칠백 사십 만원, 택시비 천만 원, 야간 특근비 칠백 칠십 만원, 문자 발송료 칠백 만원, 명절휴가비 팔백 이십만 원 등 국회의원 일인당 일 년 간 칠억 칠백 만원이 듭니다. 그것뿐입니까. 선거가 있는 해에는 삼억 원을 받고, 그러고도 선거비용은 국고에서 환급이 된답니다. 지방선거나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에도 삼억 원까지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가히 국민의 혈세를 퍼 먹는 하마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뿐입니까? 판검사 변호사들도 죄다 썩었어요. 이른 바 전관예우라는 거 말입니다. 고위직 판사 또는 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어떤 사건을 맡아 수사나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도출 해 내는 경우 같은 거 말입니다. 이거 또한 정말 썩은 관례입니다. 이러니 공정한 재판 결과가 나오겠어요? 제가 겪은 모욕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말이죠. 마약을 한 당사자가 직접 고소한 게 아니더군요. 이른 바 모욕죄 합의금을 뜯어내는 용도의 기획고소 전문 대행 변호사가 있다는 겁니다. 피고소인 일인당 합의금 백만 원씩을 노리고 범죄자와 변호사가 작당을 해서 저지르는 일이란 것이죠. 판사나 검사 경찰관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눈도 깜짝 안 하고 멀쩡한 사람을 모욕죄 허울을 덮어씌워 전과자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겁니다. 누가 그러는데, 그들도 어떻게 해서든지 실적을 많이 올려야 승진에 유리해 진다나 어쩐다나. 이게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침까지 튀겨가며 예정에도 없던 열변을 토해 놓으니,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보고 있는 작업반장.
어느 정도의 작업 후, 모두들 잠시 담배를 태워 물게 된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다른 죄수(?)들의 억울한(?) 푸념들까지 실컷 경청 해 볼 수 있었다. 상습도박에 사기, 횡령, 폭행, 절도에다가 심지어 성 추행범까지, 서양말로 치자면 말 그대로 레퍼터리도 다양한 죄수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손가락을 내 손으로 직접 자른 거요. 도박을 끊어 보자고. 하지만, 그게 어려운 일이더군. 손가락을 끊고도 또 이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으니.”
“사기는 무슨 사기? 돈을 안 갚는다는 것도 아닌 디, 그 개자석이 그샐 못 참고 사기로 나를 고소한 겨. 정말 못돼 쳐 먹은 놈이라니께!”
“먼저 돌을 들어 나를 치려기에 방어 차원으로 어쩔 수 없이 벅칼(부엌칼)을 든 것인 디, 판사 그 개자석이 나만 가지고 폭행죄로 벌금을 때려 버린 겨. 판사 그 개자석을 갈아 마시고 싶다니께.”
“아, 길가에 다 썩은 고물 자전거 하나가 굴러다니기에 무심코 집어탔다가 이 꼬라지가 됐지 뭐. 애당초 그걸 자전거포에 팔아먹을 생각 자체를 말았어야 하는 디. 그놈의 타이어가 빵꾸가 나버리는 바람에 그만. 참 내! 뒤로 자빠져도 코피가 터진다더니 원!”
“성추행이라는 게 말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바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 이거요. 계집이 저 한테 대쉬 해 오는 사내가 마음에 들면, 얼씨구나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것이고, 지 맘에 안 들면 곧바로 성추행으로 몰아뻐린다 이거요. 계집의 기분 여하에 따라 박력 있는 놈이 될 수가 있고, 또, 같은 사안을 두고도 그냥 추잡한 거머리가 되어 버린다 이거요. 죄의 유무 판가름 여부가 오로지 계집들 마음먹기 노름에 달려 있다 이거요. 이게 대체 무슨 지 맘대로 법이오? 절대적 기준이라는 게 없고, 고무줄 늘였다 줄였다 하듯, 귀에 걸었다 코에 겄었다 지들 멋대로 판단을 내려버리는 것이 그 무슨 법이란 말이오? 나는 말이오. 진심으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대쉬를 했던 거요. 나는 무조건 네가 좋다. 그러니 우리 한번 진심으로 사귀어 보자. 그랬을 뿐이라 이거요. 그런데 아 그 썩어 비틀어질 년이 내 진심도 몰라주고 무작정 성 추행범으로 고소를 해 버렸다 이거요. 기가 막힐 일 아니오? 아, 요즘 남자들, 성추행 무서워서 어디 여자들한테 접근이나 할 수 있겠어? 이래가지고서 청춘사업이나 제대로 해 볼 수 있겠냐 이거야. 가뜩이나 출산율도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데, 이래 가지고서 젊은 남자가 제 마음에 드는 여자하고 짝 지어서 마음대로 장가나 가 볼 수 있겠어? 나라가 개판이야.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라고 하면, 되려 나라가 먼저 나서서 적극적으로 남녀 간 만남을 성사시켜 주고, 장려를 해 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 무슨 시대착오적 남녀칠세부동석 짓거리란 말이야? 에이, 드러워서 나도 이제는 장가들지 않고, 애도 안 낳고, 평생 그냥 혼자 살아 볼 거요. 여자고 나발이고 더 이상은 만사가 귀찮고 그저 짜증만 난다니까.”
성 추행범(?)의 발언이 끝이 나자, 작업반장이 하늘 쪽으로 고개를 치켜들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고, 도박꾼, 사기꾼, 횡령범, 폭행범, 절도범들은 저마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들을 주억거리는 것이었다.
“나도 그래요. 생각 할수록 정말 기분이 더럽습니다. 마약복용에 법원모독죄까지 범한 마약쟁이를 걸레라 칭했다고 되려 내게 벌금을 때려 멕이다니. 하여튼, 아까 반장님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우리나라는 이 관(官) 벼슬아치들부터가 큰 문제입니다. 국회의원들의 터무니없는 특권도 그렇고, 법조인들, 다시 말해서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뻔뻔스런 전관예우 관행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우리 국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리타분한 낡은 규제 같은 것도 그래요. 바로 이 규제에 묶여서 소위 말하는 스타트업 자체부터가 국내에서는 그냥 무덤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 국방부에서도 인정한 스마트폰 보안 기술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껏 힘들게 기술을 개발했는데도 국내에서는 각종 규제에 묶여 활성화 되 보지도 못하고, 그냥 해외에 그 기술이 팔려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또, 카드결제를 보다 편리하게 하는 신기술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하여 이미 개발됐는데도 관의 묻지마 식 규제 관행 때문에 정작 국내에서는 써 먹지도 못하고 있고, 비대면 원격진료 같은 것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벌써 크게 활성화가 되어 있는데, 이놈의 나라만 관과 의사단체가 짝짜쿵 한통속이 되어 활성화 자체를 가로 막고 있는 기막힌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원격진료 관련 스타트업을 시작한 사람들 대부분이 사업을 접을 판이라고 하네요. 또한, 휴대용 X레이 장비를 만든 회사도 그렇습니다. 외국에서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당연히 취급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이놈의 나라만 그놈의‘전문가만 취급’규정만 들먹이며 보급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외국 업체들이 벌써 거센 추격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서 그것을 처음 개발한 우리나라 회사는 OEM, 다시 말해서 주문자 부착 생산방식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 국민의 세금 쳐 먹으면서 제 할 일들을 내 팽겨쳐 두는 한심한 놈들이 아닐 수 없지요. 타다 서비스 같은 것도 그래요. 국회의원 놈들과 택시업체가 한통속이 되어 묻지마 식 때려잡기를 해 버린 결과가 지금의 이 불편한 택시잡기 현실도 초래하고 있는 것이죠.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탈거리 수단이 넘쳐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모두들 아무 말이 없다. 다만, 묵묵히 보일 듯 말 듯 고개들을 주억거리며 담배 연기만 길게 내 뿜고 있을 뿐이다.
점심 식사 후 오후 작업 때는 모두들 녹초가 다 되어버리고 말았다. 치워도 치워도 좀체 줄어들지 않는 산 같은 낙엽더미였으니 말이다. 사회봉사명령 수행자들의 입에서 저마다 한마디씩 욕설이 터져 나오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저녁 여섯시,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어김없이 돌아가듯, 마침내 오늘 하루 일과도 죄다 끝이 났다. 마지막 저녁 출석사진을 찍고, 모두들 귀가를 서두르는 시간이었다.
하루는 이렇게 때웠지만, 앞으로 삼 일 하고도 반나절을 더 이런 식으로 버텨야 한다. 잔뜩 찌푸려진 기분으로 집 쪽을 향하여 터벅터벅 발길을 옮겨 놓고 있는 모욕죄 사회봉사명령 수행자.
도시의 서편 저 멀리 하늘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어차피 오늘은 일정이 다 종료됐으니, 더 이상 누가 참견하고 자시고 할 까닭도 없는 일일 터. 그냥 길가의 벤치에 엉덩이를 철퍼덕 붙이고 앉아 피곤한 눈길을 들어 저 먼 하늘 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한줄기 습한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와서는 지친 내 심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가고, 발치 근처에서는 비둘기에다 참새인지 박새인지 뭔지 모를 무리가 어지러이 뒤섞인 채, 밥 좀 달라며 부지런히 회돌이를 치고 있다. 종이 다른데도 어떻게 저렇게 함께 어울리게 되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도심지에서의 부족한 먹이 다툼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요즘은 비둘기가 유해 조수라 하여 함부로 먹이를 던져주면 안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엄청난 행운아일 것이다. 새장 속에 갇힌 채 마음껏 나래도 펴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동네 새 장수 가게 앞에서 늘 보아왔으니까.
검은 구름이 슬슬 몰려들더니, 급기야 빗방울까지 후두둑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잽싸게 등 가방에서 접이 우산을 꺼내 펴 들고는 총총히 집 쪽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그랬는데, 저건 또 뭐? 우리 집 파란 철대문 밖 우체통 밖으로 삐죽이 대가리를 내비치고 있는 허연 저것.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고 긴장된 마음으로 쑥 뽑아 들고 보니, 역시나 경찰서 표식이 뚜렷이 새겨진 육시랄 그것. 열화가 치미는 대로 들입다 녹슨 철 대문을 걷어차며 마당 안으로 쓱 들어서고 보니, 오늘도 역시 개 녀석은 제 집안에서 빗방울 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나 보다.
마지못해 꼬리 흔들어 대는 개 녀석을 오늘 한번 날 잡고 그냥 시쿠어 버려 말어? 하고 있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연신 작업반장의 그 말이 아까 그 비둘기 참새 놈들처럼 정신없이 회돌이질을 쳐 대고 있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이런데 오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보아하니, 이런데 오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보아하니, 이런데 오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