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8. 17:42ㆍ허세창시문
[詩文]피아골을 지나며
피아골 계곡은 지금 온통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렇게 그 비감한 단풍 숲을
처연한 마음으로 묵묵히 헤치어 간다.
붉은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 가고
계곡의 물소리는 쉴 사이 없이 흐느껴 운다.
아, 저 핏 빛 단풍을 닮아있는 한 많은 사연들이
긴 긴 세월을 두고 켜켜이 맺히어 있음이련가.
피아골이여, 나는 지금 온몸이 떨리어 온다.
그대의 아픈 절규가 긴 메아리 되어
이리도 생생하게 귓전을 맴돌고 있음이련가.
싸움, 반목, 전쟁, 눈물, 비참한 죽음, 살육과 살육.
피아골이여,
그대는 지금 그러한 단어들을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인간들은 도대체 왜 그러한가요?
인간들은 대체 왜 그러해야 하나요?
그러나 피아골이여,
나 역시 진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도대체 인간들이 왜 그러한지를.
대체 인간들이 왜 그러해야 하는 것인지를.
그래서 더욱 그대는 눈물인 것이고
나 역시 이렇게 비감한 슬픔이던가.
피아골이여, 나는 지금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저 사나운 왜병들의 발길에 뒤쫓기던 끝,
속절없이 그대의 품 안에서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던
조선 의병들의 그 피 맺힌 사연들을.
저 조선 지배층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끝,
사나운 왜군들의 발길에 뒤쫓기어
속절없이 그대의 품 안으로 서러운 넋을 묻어야만 했던
동학 농민군의 그 슬픈 통곡 소리들을.
저 친일 지주들의 패악에 끊임없이 휘둘리던 끝,
급기야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그대의 품 안에서 마지막 삶의 끈을 놓아야만 했던
그 한 많은 산사람들의 사연들을.
아, 피아골이여,
이제 붉은 해는 완전히 산 너머로 지고
지금 여기 자주 빛 어스름만이 꿈인 듯 넘실거린다.
바로 그 붉은 노을 속을
나 이렇게 휘적휘적 헤치어 간다.
2008.10.25. 허세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