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3. 10:08ㆍ허세창단편소설
[短篇小說]화물차 운전수
許世昌 作
부릉! 부르릉! 부르우웅!......
기관 소리가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차의 외장도 거의 손상된 곳이 없이 깨끗해 보였다.
“괜찮지요? 3년 밖에 안 된 차라서 새 차나 진배없어요. 이거 이천 오 백이면 거접니다.”
“예, 차 상태는 좋아 보이네요. 그래서 오늘 제가 아주 결정을 지으려고 이렇게 돈도 다 준비 해 왔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저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한 달에 이 백 이십이 어딥니까? 게다가 가끔씩 내가 자투리 일거리도 내 드리니까, 그거 합쳐서 한 삼 백은 족히 가져가게 될 겁니다. 또, 유류비와 통행료는 우유회사에서 다 대주니까 걱정할 것 없고요.”
“삼 백 이라. 그런대로 괜찮군요.”
“자, 그럼 사무실로 올라가시죠.”
허 선호는 다니던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한 뒤로, 벌써 6개월을 아무 하는 일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식구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인지라,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물류 회사의 화물차 운전 일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지입 차주가 되는 것이었다. 화물차 운전이란 것이 전 직장 일에 비하면 크게 마음에 차는 일은 아니었지만, 허구 헌 날 집에서 식구들의 냉대나 받으며 소일하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물류 회사 부장이라고 하는 이 사람의 말에 의하면, 한 달 수입이 삼백은 될 것이라고 하니, 그 정도면 식구들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일을 하면 되는 건가요?”
“내일부터는 아니고요. 하루정도는 코스를 익혀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예, 내일 하루 정도만 전임자와 함께 코스를 먼저 익히세요. 일하는 거는 그렇다고 치고, 코스 정도는 정확히 익힐 필요가 있으니 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키 여기 있습니다. 차 명의는 회사가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까, 허 기사님은 그냥 끌고 가시면 됩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사무실을 빠져 나오면서도 허 선호는 꽤나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억 원 퇴직금 중에서 겨우 이천 오 백을 투자해 월 삼백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여보, 나 왔어.”
허 선호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그 어느 때 보다 당당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를 맞이해 들이고 있는 아내의 표정에서도 큰 기대감을 엿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일은 잘 됐어요?”
방바닥에 앉기도 전에 아내가 먼저 다급히 물어왔다.
“그럼 잘 됐지. 내 얘기 좀 들어 봐 여보. 우리가 처음엔 이 백 이십으로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요?”
“그게 아니고 월 삼백까지도 가능하다는 거야.”
“네에 삼백이요? 어머 좋아라. 그렇다면, 당신 전 직장 때 수입하고 별 차이가 없잖아요.”
이 정도면 그 얘기까지 일사천리로 해 치워 버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긴 한데, 퇴직금이나 상여금도 없고, 월차 연차, 그리고 각종 연금가입 혜택도 없고, 4대 보험 가입도 불가하다니까 거기다 댈 건 아니지. 더군다나 화물차를 몬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보기도 할 테니 말이야.”
“그런 소리는 말아요. 우리 코가 석자인데, 지금 남 눈치 보게 생겼어요? 아무튼, 당신 체면은 좀 깎이겠지만, 우리 식구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한 번 해 보세요. 그러면서 천천히 더 좋은 직장도 알아보면 될 테고 말이에요.”
“내 생각도 그래.”
“미안해요 오빠, 그 동안 내가 일부러 차갑게 대해 왔던 거. 그렇지만 그러는 나 자신도 속으론 많이 힘들었다고요. 그래야 오빠가 자극을 더 많이 받게 될 테니까.”
“나도 알아. 내가 왜 그 사실을 몰랐겠어.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까지 나왔을까 하는 것도. 미안해. 다 내가 못난 탓이야.”
사실, 그가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의 급격히 냉랭해진 태도에 있었다. 차라리 드러내 놓고 불만을 토로 해 주었다면, 오히려 그런 기분이 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를 않고 시종일관 얼음장 같은 태도로써만 자신을 대하고 있으니, 평소의 그 다정다감한 아내가 진짜 맞는지 의심이 다 들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허 선호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연애시절부터 서로 죽자 사자 하다가 어렵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까지 성공했던 그로서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깊이만큼이나 받은 상처의 그것 또한, 매우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밖에 없는 어린 자식 놈마저 대 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드는 데는 더 이상 견뎌 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여보!”
“사실 명예퇴직을 당한 것도 전적으로 내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여하튼지 경쟁에서 밀려나면 못나고 무능한 사람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 뭐.”
“아니에요. 당신이 왜 무능한 사람이야. 정치꾼들이 무능한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이 정치를 잘 했어 봐. 왜 오빠 같은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쫓겨났겠어. 다, 그 등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오빠가 이렇게 된 거라고요.”
“그렇게라도 생각 해 주니, 이제는 좀 힘이 나네. 고마워 여보!”
“사실이 그렇잖아요. 그 사람들 국민의 세금이나 받아먹고 앉아서 대체 하는 일이 뭐냐고요? 왜 진작부터 경제 위기 상황에 대처하지를 못했는데?”
“그 사람들도 하느라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거겠지 뭐.”
“그게 아니라니까. 오빠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에요. 그리고 오빠 회사도 그렇잖아요. 사정이 어려더라도 사람을 무조건 쫓아낼 생각만 하지 말고, 잠시 짐을 나누어 질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 저런 방법들 애초부터 다 제쳐놓고서 무조건 밀어내기만 하면 다냐고요? 그리고 그 김 부장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은 뭐가 그리도 잘나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자리보전하고 있대요? 그게 그 사람이 잘나서 그런 거 에요? 다 빽 써서 그렇게 된 거지.”
“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 그래도 어쩌겠어. 이제 와서 그래봤자 죽은 자식 붕알 만지기요, 빈 하늘에 주먹질이지 뭐.”
“그래도 이렇게 다 쏟아놓고 나니까 속은 후련하다 뭐. 정말 이 놈의 세상은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니까요. 오빠같이 얌전하고 빽 없는 일꾼은 억울하게 쫓겨나 트럭이나 몰아야 하고, 그 기생충 같은 정치꾼들이나 회사 간신배들은 끄떡없이 자리보전하고 있고.”
“하하! 그러고 보면 당신 같은 사람이 정계 진출해야겠어? 가정주부 다 때려치우고 말이야.”
“지금 농담 할 기분이 나요? 오빠는 참!”
사실, 그로서도 아내만큼이나 많이 억울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본다고 한들, 다시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분노를 삭여 보려고 무던하게 애를 써 오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 한 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찍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운전 일은 정말 위험한 거라던데......”
“알아. 그러니 조심할 게. 당신도 알지? 내가 지금 이렇게 피치 못하게 운전 일을 하긴 하지만, 결코 오래 갈 거는 아니라는 거.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다른 일자리를 빨리 찾아 볼 거라는 거. 일 하면서도 틈틈이 알아 볼 거야.”
“오빠......”
장성애는 직장문제 때문에 남편에게 의도적으로 차갑게 대했던 지난 일들을 떠 올려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미안한 표정이 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아내를 돌아보며 허선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따가 우리 식구 다 함께 바람 좀 씌러 나가 보자고. 오랜만에 외식도 좀 하고.”
“당신 아직 일도 시작 안 했어요. 월급도 못 탔는데 외식은 무슨.”
“너무 그러지 말아. 우리가 당장 굶어죽는 것도 아니잖아.”
“호호! 알았어요. 그냥 한 번 해 본 소린데 뭐.”
두 사람은 그렇게 실로 오랜만에 뜨거운 포옹을 한 채로 달콤한 입맞춤까지 나눌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의 오후, 세 식구는 그렇게 무려 6개월 만에 다시 예전처럼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가장의 실직으로 인하여 한숨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그들로서는 실로 억 겁 년 만에 다시 찾은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실내 놀이공원에서 그들은 함께 놀이기구도 타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었다.
“창수야, 모처럼 이렇게 놀러 나오니 기분 째지지?”
“네, 아빠. 짱이에요.!”
“하하하!”
“호호호!”
그런 그들을 돌아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모두가 기분 좋은 표정이 한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허 선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배웅을 받으며 새로 구입한 냉동 탑 차 의 운전대 앞에 앉아 있었다.
“정말 조심해야 해요 여보.”
“알았어. 염려 말라니까.”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허선호는 아들 녀석의 인사에 콧날까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들 녀석은 마냥 철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후사경 저 멀리 뒤쪽으로 아내와 아들 녀석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래, 다 너희들을 위하는 일인데, 무엇이 부끄러울 것인가. 이 한 몸 가루가 되어 부서진다고 해도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허선호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굳게 다져 먹는 것이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에는 또 다시 그녀 생각이 조금씩 차 올라오고 있었다. 홍나은, 회사 동료들과 함께 주점에 들렸다가, 그 곳에서 우연히 알게 된 술집아가씨였다. 35세의 중견기업 과장과 갓 스무 살의 홍나은은 누가 봐도 서로 어울릴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급격히 사랑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남몰래 새살림을 차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내 모르게 빚까지 내어 마련했던 보금자리였던지라 그의 마음은 늘 편안하지가 않았다. 비록,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는 해도 아내에 대한 애정의 감정 역시 완전히 식어버린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갈등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공주희를 쉽게 단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여리기만 한 그녀가 자신의 고민을 눈치 채고 훌쩍 달아나 버리기라도 할 까봐 그것이 오히려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는 남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두 여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1년 동안이나 지속시켜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 과장님 아이 갖고 싶어요.”
“그건 안돼!”
“그냥 이렇게 과장님 아이 하나만 낳아서 그 애와 함께 눍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은 거 에요.”
“그럼 나를 버리겠다는 건가?”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잖아요. 사모님한테도 미안한 일이고요. 저는 사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싶지가 않아요.”
“나은아......”
허선호는 그게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다. 자신이 냉정하게 아내를 버리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이런 생활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홍나은의 손전화기로 신호음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과장님?”
“그래 나야. 미안하다. 오랫동안 연락 못 해서.”
“정말 나쁜 사람. 그깟 일 못하게 된 것이 무슨 대수라고.”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니.”
“하여튼, 빨리 오세요. 오늘도 안 오면 나 그냥 팍 죽어 버리고 말 거 에요.”
“......”
“과장님? 과장......”
딸깍!
허선호는 그대로 손전화기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녀를 안 보리라 다짐까지 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화기에서는 계속 호출음이 울려오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애절한 통곡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 이번 한 번 만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된다. 성애와 창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돼.’
“나은아......”
“정말 미워 죽겠어. 그렇다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미안해...... 지금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불륜남녀의 안타깝고 애틋한 재회의 시간은 벌써 한 시간 가까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젠 가 봐야 돼.”
“벌써요?”
“벌써가 뭐야. 시간이 많이 흘렀어.”
“싫어요. 오늘은 나, 자기 안 보내 줄 거야. 절대로.”
“나은아......”
“과장님.....”
허선호는 허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홍나은의 팔을 억지로 떼어놓고서야 간신히 문을 닫을 수 있었다. 현관문 안 쪽에서 애처롭게 흐느끼는 그녀의 속울음소리가 가슴 속을 후비어 들고 있었다.
“어떻게 일은 할 만 하던가요?”
허선호가 미리 약속 해 둔 장소에서 뒤늦게 조수석에 태운 전임자에게 물었다.
“우유 일이란 것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할만은 합니다. 사실, 가장 힘들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육체노동이 아니고, 오히려 운전을 하는 동안 졸음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루 800킬로 가까이를 고속도로 위에서 뛰어야 하니 말이죠. 도로상태가 좋으니, 저절로 졸음이 쏟아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이 졸음 때문에 골로 간 사람들도 많습니다.”
“골로 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가요?”
“예, 시내도로에서야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아무래도 졸음운전을 덜 하게 된다지만 고속도로는 다르지요. 그래서 커피를 자주 마시게 됩니다. 수마를 쫒기 위해서 말이죠. 허 형도 앞으로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될 겁니다. 안 그러면 못 견뎌요. 하지만, 일 자체는 그리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하루 이틀만 익히면 별로 어려울 게 없지요. 떨쿠어 놓으라는 곳에다 정확히 제 시간에 떨쿠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글쎄, 그게 어떻게 될지. 그나저나 왜 이 일을 그만두시는 겁니까?”
“예, 제가 잠이 좀 많은 편이라 늘 조마조마 합니다. 이러다가 사고라도 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늘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일 치루기 전에 진작에 운전 일 때려치우고, 가게라도 하나 내 볼까 해서요.”
“가게라. 그것도 괜찮긴 하지요. 목만 좋으면 말입니다. 그래, 돈은 좀 모으셨어요?”
“에이, 돈은 무슨 돈을 모아요. 이런 일 하면 돈 못 모읍니다.”
“그건 또 왜요?”
“화물차 운전하는 사람들치고 부자소리 듣는 사람들은 없어요. 부자는커녕 빚이나 안 지고 살면 그나마 다행이게요. 대개가 다 할부로 차를 사서 일을 하게 마련인데, 그 할부금 다 갚기도 전에 덜컥 사고들을 내곤 하니, 그 한순간에 몇 년 동안 벌어 모은 거 고스란히 다 털어 먹고 맙니다. 죽지나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죠. 그러고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할부로 차를 사서 일을 하게 됩니다. 빚을 갚아야 하니 말이지요. 그러다 또 사고를 내고 마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물론, 사고 안 내고 꾸준히 일을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꼭 사고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그 텀이 긴 가 짧은가 하는 문제일 뿐이죠.”
“아,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허 선호와 전임자와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손 전화기에서 신호음이 울려왔다. 아내의 전화였다.
“어 당신이야? 왜, 걱정이 되서?”
“왜 걱정이 안 되겠어요. 당신 과속하지 마시고 꼭 방어운전 하라고요. 그나저나 어디쯤 가고 있어요?”
“응, 김천쯤이야.”
“김천이요? 생각보다는 많이 못 갔네요?”
“어? 어...... 당신 말대로 안전운전 하느라고 그렇지 뭐. 나는 과속 같은 거 안 하잖아.”
그러면서 허선호는 속으로 좀 뜨끔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홍나은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건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일이었다. 아내는 결코,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죽는다며 거품을 물지도 모른다. 아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 아닌가.
“그래요. 잘 하고 있는 거 에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안전운전 해야 해요. 알았지요?”
“그래 알았어. 당신하고 우리 창수를 위해서라도 늘 명심 할 게. 그럼 전화 끊자고.”
“고마워요 여보. 그런데 왜요? 아 맞다. 운전 하면서 전화하면 위험한건데. 이런 등신. 호호호! 안전 운전하라면서 내가 오히려 당신 운전을 방해하고 있었네.”
“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잘 자고, 창수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자고 있어요. 시간이 많이 늦었잖아요.”
“그래, 잘 자! 일 잘 하고 들어갈 게.”
“네 여보, 그럼 수고해요. 꼭 안전운전 하시고요.”
“그래, 이만 끊자고.”
“네.”
그렇게 아내와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임자가 물어왔다.
“애기 엄마신가 보군요.”
“예, 애기는 아니고 머리가 큰 아들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일을 택하게 되셨어요? 보아하니 이런 일 하실 분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전임자는 딱하다는 얼굴 표정까지 지어 보이고 있었다.
“뭐 일이란 게 딱히 누구한테 정해진 게 있나요? 아무거나 손에 잡히면, 그게 내 일이 되는 거지요. 어디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속으로야 좀 씁쓸하긴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허선호였다.
“그건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판검사 일을 한다고 해서 더 훌륭한 것이고, 농사일이나 노동일을 한다고 해서 덜 훌륭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우리같이 이렇게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무조건 무식한 사람이고, 사무실에 앉아서 편하게 펜대나 굴리고 앉았으면 무조건 똑똑한 사람이 되는 현실, 정말 문제가 있습니다. 운전 일을 하다보면, 정말 더러운 꼴 도 많이 보게 되지요. 동생도 한참 동생뻘쯤 되는 녀석들한테서까지 불쑥불쑥 반말지거리를 듣기가 예사입니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경찰서 같은 데 한 번 들어가 보세요. 이건 뭐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의경 녀석까지 함부로 혀 짧은 소리를 하고 드는 데는 정말 기가 다 막힐 지경입니다. 그것뿐인가요. 이제 들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우유공장에서 출납을 맡아보는 그 젊은 녀석 말입니다. 그 자식도 그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습니다.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이 탑 차 기사들을 대하길 마치 제 막내 동생 다루듯 하니 말이지요. 에이, 그 자식 얘기를 하니 또 열불이 다 나네.”
“아, 네...... 그 사람이 그렇게 예의가 없나요?”
“에이, 말도 마세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 사실 내가 이 일을 그만두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자식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건 뭐 어지간해야 말이죠. 말 그대로 안하무인이 따로 없어요.”
“네......”
그렇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묵묵히 입을 닫고 말았다. 허선호는 출납 담당이라는 그 젊은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일까를 궁리 해 보고 있는 중이었고, 전임자는 전임자대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차 유리 밖을 스쳐가는 스산한 풍경 쪽으로 가만히 시선을 던져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차는 부지런히 달려서 금호 분기점을 지나더니, 다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있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쯤을 더 달려서야 마침내, 우유 공장이 있는 소읍의 농공단지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유공장의 마당에는 각종 물류회사 소속의 수많은 냉동 탑 차들이 줄을 지은 채로 제 차례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제각기 자신들의 할당 물량을 받아 싣고서 수도권과 각 지방의 우유 대리점으로 향할 차들이었다. 허선호는 전임자가 알려주는 대로 공장의 뒤편쪽으로 차를 몰고 가서는, 빈 우유 상자들을 하차 시킨 뒤, 곧바로 세차장으로 가서 차량 내부와 외부를 깨끗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냉동 탑 차의 짐칸 바닥엔 전 날 배송 중에 터지고 새서 흘러나온 우유의 잔해물이 부패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늘어 붙어있었던 것이다. 전임자의 말로는 그렇게 이틀에 한번씩은 꼭 세차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차 후에는 다시 앞마당 쪽으로 돌아 나와서 주유기 옆에다 차의 옆구리를 대고는 연료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허선호는 주유기를 다루는 방법 또한 전임자에게서 배워서 익혀야만 했다. 그것으로 우유 상자를 받아 실을 준비는 일단 다 마친 셈이었다.
순서대로 우유 상자를 실은 차들이 공장 마당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싣는대로 바로 출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밤 열두시가 넘어야만 공장 정문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허선호 역시도 자신의 차에 우유 상자를 받아 실은 뒤에도 다른 차들의 꽁무니 뒤쪽에다 하릴없이 주차를 시켜 둘 수밖에 없었다. 전임자의 말로는 유효기간 표시 문제 때문에 그런다고 하는데,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출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탓으로 차 옆에 있는 화단의 테두리 한쪽에 쪼그리고 앉은 채, 전임자와 더불어 담배 한 대를 나누어 피우고 있는 데, 다시 손 전화기의 신호음이 울려왔다. 홍나은이었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마침 전임자가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서는 바람에 결국 전화기를 귀에 대고 말았다.
“과장님, 지금 어디에요?”
전화기 속 홍나은의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한결 더 침울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긴 왜 안 그럴 것인가. 그토록 매정하게 뿌리치고 와 버렸으니 말이다.
“미안하다 나은아. 오늘은 네게로 갈 수가 없어. 나는 지금 바빠......”
“뭐가 그렇게 바쁜데요? 나를 이렇게 버려두고 가야 할 만큼 그렇게 바쁜 일이 도대체 뭔데요?”
“미안하다. 나중에 들려줄 게. 그러니 오늘은 이만 끊자.”
“나중에 언제요? 또 안 오려고 그러죠? 안 돼요. 지금 당장 오세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나는 정말......”
나는 정말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 순간 허선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 나은아. 절대로 나쁜 마음을 먹어서는 안 돼. 내가 갈 게. 다른 생각하지 마.”
“정말요? 지금 당장 오신다는 거죠?”
“그래, 지금 당장은 아니고 몇 시간 쯤 있다가 갈 게. 여기는 지방이야. 아주 멀리 있어. 그러니, 가는 시간이 좀 많이 거릴 거야.”
“지방이라고요? 거긴 왜요? 하여튼 알았어요.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그 대신 꼭 오셔야 해요?”
“그래 약속할 게. 전화 끊는다.”
“알았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로.”
“그래, 나도 너 사랑해! 기다리고 있어.”
“네, 과장님.”
전화를 끊고 나서도 허선호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 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성애도 나은이도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굳이 꼭 한 사람만을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도저히 자신이 없는 일이다. 자신이 없어.’
어둠 속에서 전임자가 곁으로 다가오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네. 오늘 따라 저 자식이 왜 저러지......”
출납담당의 얌전한 태도를 보고 하는 소리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으나, 허선호는 굳이 그의 말에 대꾸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온통 현재의 자신의 처지와 여자들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다시 생각을 해 보아도 기가 막힌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일류대학을 나와서 일류기업에 들어가 한참 잘 나가고 있던 자신에게까지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비록, 위로금과 퇴직금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을 챙겨 나올 수는 있었다고 해도, 자신과 같은 젊은 청춘에게 있어서는 그깟 돈 따위가 문제는 아닌 것이다.
밤 열 두 시가 되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배송 차량들이 시동 소리를 울리며 하나 둘, 정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허선호의 냉동 탑차 역시도 바로 공장 문을 빠져나와 고속도로 진입로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전임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들어 왔던 길은 알고 있지요? 다시 그리로 빠져나가면 됩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배송처는 네 곳이라서 그렇게 시간에 많이 쫓기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늘 그런 건 가요?”
“그게 말입니다. 예전에는 대 여섯 군데 되었는데,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서 우유대리점도 장사를 접는 곳이 하나 둘 생겼습니다. 이러다가는 화물차 기사들도 밥줄 많이 떨어질 겁니다.”
“그렇군요.”
“어쨌거나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하는 데 까지 열심히 한 번 해 보세요.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요.”
“네, 저도 그런 생각으로......”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도 차는 벌써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허 선호는 될 수 있는 한, 화물차의 규정 속도인 시속 80킬로미터를 유지 하려고 했다. 아내의 신신당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전임자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80 놓고 다니는 차가 어디 있어요. 그랬다가는 늦어서 안 돼요. 그리고 80 놓고 다닌다고 해서 더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고 날 확률이 더 크니까요. 왜냐하면, 속도라는 것도 다른 차들과 어느 정도 보조가 맞아야 물 흐르듯 흘러가게 마련인데, 독불장군 식으로 혼자 앞에서 주춤거리다가는 위험한 상황을 맞을 확률이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못해도 100은 밟아야지요.”
“하기야 승용차들도 기본이 130인데, 화물차들도 100은 밟아야겠지요.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허 선호는 말이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임자의 말대로 시속 100 킬로미터의 속도를 유지한 채,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순천 방향 쪽으로 1시간쯤을 더 달리다 보니, 드디어 저 앞으로 이정표가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개통된 대전 진주 간 고속도로였다. 새로 생긴 도로라서 그런지 차가 별로 많이 운행을 하지 않고 길이 쭉 곧아서 운전하기에 더 없이 편한 길이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얼마 전부터는 많은 화물차 기사들도 경부고속도로를 놔두고 굳이 이 길을 선택하고 있다는 전임자의 설명이었다.
언제부턴가 옆자리의 전임자가 말을 건네 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미 벌써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코까지 곯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힐끗 돌아보는 허선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얼마를 더 달려갔을까. 허선호는 수마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음에도 곤히 단잠에 취해 있는 전임자를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차는 계속 갈지자 운행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다른 차선으로 추월해 나가는 자동차들에게서 긴 경적 음이 꼬리를 물며 멀어져 가곤 했다.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장성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한번 더 승용차의 긴 경적음이 파열음을 남긴 채 멀어져 갔다.
홍나은 역시도 환하게 미소를 짓는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고운 모습을 지켜보며 허선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나은아......”
바로 그 순간, 허 선호의 차는 주행차선에서 벗어난 채로 갓길로 향하고 있었다. 갓길 저 앞쪽으로부터 시커먼 물체가 하나 급하게 냉동 탑차 쪽으로 다가왔다. 허선호의 냉동 탑차 역시도 빨랫줄처럼 그 물체 쪽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며칠 후, 어느 지방 신문의 사회면 한 귀퉁이에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젊은 화물차 기사의 사연이 아주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일부러 주목해서 읽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2004.08.허세창
'허세창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소설]백일몽 (1) | 2025.02.19 |
---|---|
[단편소설]모기 (2) | 2025.02.09 |
[단편소설]노랑나비 머리핀 (0) | 2025.01.30 |
[단편소설]경매일지 (1) | 2025.01.18 |
[단편소설]假設舞臺 (1) | 2025.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