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장편소설]별빛의향연45

2024. 7. 31. 11:18창작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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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바닷물 색깔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듯싶었다. 그리고 평일이라서 그런지 관광객의 모습 또한 거의 눈에 뜨이지 않고 있었다. 홍련암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였고, 바람의 느낌, 파도 소리 또한 그대로였다. 다만 한 가지 그 때와 다른 것은 자신의 곁에 사랑하는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요즘 들어 방송에서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사람에 대한 소식조차도 거의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토록 그 사람에게 열광 해 대던 대중들조차도 그저 조용하기만 한 느낌이었다.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혹시 어디가 아픈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일이 생겼다면, 언론에서 먼저 호들갑을 떨고 난리가 났을 텐데. 그렇다면, 고향집에 무슨 일이라도?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김금채는 수심이 가득한 눈길로 푸른 동해 바닷물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과의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십년 만에 다시 이렇게 이곳에 와 보니, 많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도 틀림없이 나와 같았을 테지. 그렇지. 그토록 바쁜 사람이 어떻게 그 오래전 약속을 기억이나 할 수 있겠어. 비록, 아직까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는 해도 그것까지는 아닐 거야. 그때는 그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고. 그나저나 큰일은 큰일이구나. 그 사람 소식도 걱정이지만, 민정이는 또 민정이대로 애가 많이 타 있을 텐데.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이렇게 훌쩍 떠나와 버리고 말았으니. 이를 어쩐다? 하긴, 어차피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따위 일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으니, 더 이상은 미련 같은 것도 없지만. 미안하다 민정아. 너와 함께 한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이렇게 냉정하게 너를 팽개치고 말았구나. 내가 생각해도 나란 사람은 정말 구제불능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그 사람 생각 때문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를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하겠니. 그리고 진짜로 몸을 버리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그 일을 그만두고도 싶었던 것이고. 지금쯤은 아마 그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아 헤매고 있겠지. 괜히 죄 없는 너만 더 힘들게 생겼구나. 나쁜 사람들. 하지만 순순히 당신들 손에 잡혀주진 않을 거야. 민정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절대로. 아, 이대로 그 사람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리고는 그 넓은 가슴에 안긴 채, 나 역시 단 하루도 당신을 잊었던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을 하고 싶어.

그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 김금채의 눈앞으로 푸른 파도는 쉴 새 없이 포말을 흩뜨리고 있었고,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 역시도 연신 허공중을 갈라대고 있었다.

혹시, 고향집에 가 있는 것일까? 정말로? 그렇다면 나도 따라 가 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돼. 설사 그곳에 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어떻게 그 사람 앞에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자신이 없다. 아무리 나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진실로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리고 금철 오빠와 아빠도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정말 그러고 싶다.

그렇게 김금채는 홍련암에서 시간 반을 더 머무르다가 그곳을 벗어나는 길로 속초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픈 몸도 추스릴 겸해서 그들의 추적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몸을 숨기고 있을 방을 하나 구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당장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만큼은 어느 정도 수중에 지니고 있었다. 역시, 한적한 지방 도시라서 그런지 저렴하면서도 쓸만한 방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 중에서 그녀가 택한 방은 바닷가에 면한 동네의 허름한 어떤 집 뒤칸 방이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오랜 세월 혼자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가 집주인으로 있는 집이었는데, 그동안 이민정과 함께 셋방을 전전하면서 남자 집주인에게 수도 없이 치근거림을 당해 온 그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드는 도피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더 다행이었던 점은 방 계약을 하면서도 할머니가 굳이 신분증을 보자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향집을 등진 이후로부터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아직까지도 엄연히 법적인 사망자로 등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도 길바닥에서 우연히 주운 남의 주민등록증으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단 한번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녀가 지금까지 호구지책을 마련했던 일터들 역시도 굳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는 곳으로만 한정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미모가 뛰어난 젊은 아가씨였던 탓으로 길거리에서 가끔씩 있는 불심검문에서도 단 한번 단속을 당해 본적이 없었다. 단속은커녕, 의경이나 순경들 모두 오로지 그녀의 외모에만 정신을 팔곤 했던 것이다.

건강문제 때문이라도 더 이상은 힘든 일이 무리인 듯싶다. 술집 일, 다방 일, 공장 일 그 모두가 더 이상은 내게 벅차기만 하다. 또한, 그 사람들에게 걸릴 염려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경리 일도 할 수가 없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신분증 문제 때문에라도 더 안 될 일이다. 그래 쉬자. 처음 계획했던 대로 무작정 한 번 쉬어 보는 거야. 절약하기만 하면, 2년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에 아픈 몸도 좀 추슬러 보고, 바닷가 구경도 좀 하면서 요양을 해 보는 거지 뭐. 그러다가 가끔 한 번씩 설악산을 올라 보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몸에 무리가 가게 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오빠와 함께 했던 장소들만큼은 꼭 다시 가 보고 싶다. 정말 행복할 거야.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는 데도 말이야. 먹을 양식도 사 와야 하고, 취사도구도 필요하고, 침구도 준비해야 하고, 오빠 책과 음악을 구해 와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너무나 배가 고프다. 이러다가 그냥 쓰러지고 말 거야.

하지만 김금채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하고 있었다. 바닷가에서보다도 더 심하게 머리가 어질어 왔던 것이다. 구석 쪽에 놓아 둔 큰 여행용 가방을 비롯해서 천장과 벽에 붙어 있는 낡은 벽지들의 무늬까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마구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

김금채는 이마를 짚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시각, 이민정은 평소 출근하던 술집의 지하 밀실에 감금된 채, 김금철의 하부조직 부하들에게 몹시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이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입고 있던 옷 역시도 이리저리 찢어 발겨진 채, 누더기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가녀린 몸뚱이 역시 모진 구타에 시달린 뒤 끝이라서 그런지 바닥에 널 부러진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신만은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제발 잡히지 마 금채야! 그리고 이번만큼은 어디 가서라도 이런 일에 빠지지 말아야 해. 부탁이야 금채야.

 

45톤 유자망 귀상어 잡이 어선 하나가 냉동실 냉매로 쓰이는 암모니아 가스 연결배관이 요란한 폭음과 더불어 파손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조업을 중단하고, 대만 기룽 항으로 수리작업 차 입항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김덕순은 조기장(고기잡이배에 있어서의 부 기관장 급 명칭)과 늘 알력을 빚던 바, 기어코 서로 치고받으며 육박전까지 치른 죗값(?)으로 본국(대한민국)으로 강제 송환 당하기 위하여 배의 선실 한쪽 기둥에 밧줄로 몸이 묶여 있었다. 물론, 선장이나 기관장, 그리고 갑판장을 위시한 기간 선원(고참 선원)들 그 누구도 그가 두 사람이나 죽인 일급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배를 처음 탈 때, 길에서 우연히 주운 남의 신분증에다 자신의 증명사진을 위조 해 붙여가지고, 버젓이 그것을 사용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 한단 말인가? 조기장 녀석이 아무리 갈궈대도 끝까지 인내 했어야 했는데,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한 것이 큰 후회가 된다. 이대로 강제송환이 된다면, 내 정체는 곧바로 탄로 나게 될 것이고, 보나마나 형장의 이슬이 되어 버리고 말겠지. 미치겠군. 정말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김덕순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선장에게 용서를 빌고 불고 해 보아도 도대체가 벽창호처럼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장이나 갑판장, 조기장, 기간선원들 죄다 그에게 학을 떼고 만 것이다. 그러니, 그의 하소연이라든지 행동거지, 그 어떠한 것이라도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 해 보기 위한 가증스러운 연막전술로만 치부 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드디어 저 멀리로 기룽의 항구 불빛이 가물가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그 장면이 매우 낭만적인 느낌이라든지 이국적 향취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할 것이었지만, 선원들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느낌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달가운 기분은커녕 선장을 위시한 선원들 모두가 매우 꺼림칙하고도 떨떠름한 기분 상태에 휩싸여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배의 수리비 지출도 지출이지만, 함께 고생하며 어로 작업을 하던 동료 하나를 강제로 송환 해 버려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부터가 썩 좋은 기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선장님 예, 저 자슥 저거 꼭 송환 시켜야 하겠습니꺼?”

“와? 니는 용서 해 주고 싶나?”

갑판장의 말에 선장이 되 묻는 소리다.

“갑판장 니 지금 무슨 소리고? 저 자슥이 내게다 한 행동거지 니는 발써 다 잊었나?”

“와 잊었겠노? 안 잊었다캐도 일이 번거로바 하는 소리지.”

조기장의 발끈하는 말에 뒤이은 갑판장의 궁색한 답변 소리다.

“번거로바도 할 수 없는 기라. 저 자슥은 용서를 해 준다고 해결 될 놈이 아니고, 인간성 자체부터가 글러먹은 놈인기라.”

“에고야. 그래라 그럼.”

“조기장 니는 저 자슥이 그래 미운기가? 털끝만치도 용서하기가 싫을 정도로?”

바로 굽히고 드는 갑판장의 대꾸에 뒤이어 선장이 또 조기장에게 묻는 소리다.

“하문요 선장님 예, 선장님도 다 보셨지 않습니꺼? 저 자슥이 제게다가 대고 어떤 개지랄을 쳤는지를 말임더.”

“그래 봤다. 조기장 니 말이 맞다. 내가 봐도 저 자슥은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저래 용서를 빌어도 저게 다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하는 소리는 아니지 싶다. 그런데 말이다. 저 자슥을 송환 시키는 것이 당연타 캐도,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해야 하는가 그게 문제라 이거다. 자슥을 데불고 여게 공사관으로 그냥 넘겨버리는 게 나을지, 아니면, 좀 번거롭더라도 타이뻬이까지 데불고 가서 대사관에다 넘가주야 할지 말이다. 자네들 의견은 어떠나?”

“그거 참 성가시네요. 막상 저 자슥을 데불고 공사관이고, 대사관이고 가자고 하니, 누가 그 일처리를 하나 이 말입니다. 선장님이 하시기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라고 저 자슥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조업일수가 하루라도 줄어들면, 그 피해는 누가 감당하겠습니꺼? 안 글나 조기장? 선장님 예 그렇지요? 그래도 조기장 니가 저 자슥을 데불고 가서 넘길끼가?”

“그래야지. 내 하고 저 자슥하고 사이에 생긴 일인 데, 내사 직접 처리 해야지. 누가 처리 하겠노?”

“그라지 말고 말이다 조기장. 일이 번거로우니께 우리 이참에 저 자슥을 슬쩍 놓아 삐는 게 어떻겠나? 기어코 말이다. 우리가 지를 대사관에 넘긴다카믄, 그게 무서버서라도 지가 먼저 알아서 어덴가로 내삐지 않겄나 이 말이다. 그래 놓으면, 우리는 그냥 처음부터 모든 일이 없었던 일로 치부해삐면 되고 말이다. 그게 가능한 게 말이다. 저 자슥은 애초 출항 시에 승선자 명단에도 등재가 되지 않은 놈이라서 그런 기다. 우리가 나중에 분배금을 노나 가질 때, 저 자슥의 모가치는 무조건 제외시킬 것을 상정하고 그랬던 거 아니가? 그러니 저 자슥을 여기다 떨쿼 놓고 그냥 들어가도 아무 문제될 게 없다 이거다. 어떠나? 두 사람 생각은?”

“지는 찬성이지만 서도, 정말 그래삐도 아무 문제가 안되겠습니꺼 선장님?”

갑판장의 약간 캥겨 하는 말이었다.

“지도 굳이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더 선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러다 나중에 일이라도 잘못 돼 삐믄......”

역시 조기장의 망설임 섞인 말.

“아무 문제없다. 다 내게 맽겨삐. 기관장한테도 내려가서 그래 일러 둘 끼니께. 그라믄 말이다. 갑판장 니가 말이다. 저 자슥한티 가서 먼첨 엄포를 쏴 놔라. 그라고 밧줄도 끌러 주고. 그래 놔야 저 자슥이 지혼자 몸이 달아 슬쩍 눈치를 봐서 내삐지 않겄나?”

“알겠심더 선장님.”

“갑판장 보다는 지 일인데 지가 가 봐야 하지 않겄습니꺼 선장님?”

“아니다. 니는 더 이상 저 자슥 얼굴 보지 말그라. 그게 나을끼다. 내 말뜻 뭔지 알겄나?”

“알겠심더. 그리하지 예. 그럼 갑판장 니가 좀 수고 좀 해 도고?”

“걱정 말그라.”
“고맙다.”

“자 자, 어서 실행 않고 뭐하나?”

“알겠심더. 당장 가 보겄심더.”

그렇게 세 사람의 합의는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이 사실을 김덕순이 알게 된다면, 그로서도 굳이 마다할 합의 내용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둘씩이나 죽인 중범죄자로서 더 이상은 대한민국 땅 안에서 두 다리 쭉 펴고 살아갈 도리도 없는 바에야, 차라리 이렇게 낯선 외국 땅에 떨어져 숨어 사는 것이, 그나마 낫기는 할 것이니 말이다. 물론, 남의 나라에서 몰래 숨어 산다는 것 자체도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누이, 이제 우리 뭐 해 먹고 살어?”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폐업신고를 끝내고 함께 돌아온 춘균의 말에 춘이가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폐수 정화시설 설치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도, 공장 자체가 망할 정도까지는 아닐 터인데, 그래도 춘이는 이참에 아예 결단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도금공장을 억지로 이끌어 간다는 것 자체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금사업 자체부터가 이제는 완전히 끝물이기도 했으니...... 물론, 당장 공장 문을 닫아걸면 식구들 호구지책이 문제가 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동희까지도 느닷없이 유치원 교사 일을 그만둔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런 결단을 단호히 내려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한 곳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맏아들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언젠가도 아들 녀석은 그랬었다. 엄마가 하루빨리 공장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공장 문을 닫으면, 자신이 생활비를 다 대 줄 테니 아무 걱정 말라는 말까지도 겸해서. 아들의 말은 당연히 빈말이 아닐 것이었다. 연예인 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벌어들이는 돈이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액수였으니 말이다. 아들이 생활비를 대 준다면, 오히려 공장 일을 할 때 보다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도 있을 터였다.

“동신이 녀석을 믿고 있는 겨 누이는?”

“꼭 동신이가 아니더래두 우리가 당장 굶어 죽는 건 아니잖니. 공장 청산금도 있고, 또 너나 나나 어디 가서 무슨 일이든 못 하겠니? 우린 아직 젊기도 하고.”

“허기야 그 말이 맞는 말이긴 한디. 공장 처분한 돈으로 그럴싸한 가게라도 하나 내면, 밥 굶을 일은 없을 테고.”

“그려, 그렇게 하면 돼. 누구나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게 세상 이치 아녀? 그나저나 춘균이 너는 이제 어쩔 겨? 언제까지 그렇게 여자도 자식도 없이 내 밑에서만 붙어 있을 겨? 늙어죽을 때 까정 그냥 그렇게 처자식 하나 거느려 보지도 못하고 살다 갈 겨?”

“장개? 새삼스럽게 또 장개는 무슨...... 장개는 뭐 나 혼자서 가남? 여자가 있어야지 장개를 들지. 그러고 마음에 드는 여자도 없고.”

“왜 여자가 없어? 천지사방 널린 게 여잔 디. 너 혹시 아직도 그 여편네를 못 잊어서 그러는 겨?”

“누이!”

“깜짝아! 얘가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여? 아니면 아닌 거지?”

“누이, 듣기 좋은 소리도 삼시번이여?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미 죽어 없어져 뼈 부스러기하나 남아있지 않은 그런 여자한티 여지껏 연연 하고 있을 겨? 지발 이젠 그만 두란 말이여. 나 말이여. 한순간에 혹해서 탕아 짓을 했지만서두, 절대루 그 이후로는 그 여자 연연 해 본적 없단 말이여. 그런디두 왜 자꾸 누이는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의 속을 박박 긁어 놓는 겨?”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소리가 또 튀어 나온 겨. 앞으로는 절대 안 할티니께 노여움 풀어.”

“그러고 말이여. 나 누이 말이 아니더래두 진작에 누이한테서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참이여. 그러니 그런 걱정도 안 해도 돼.”

“정말? 그러면 독립하고서 어디로 갈 거니? 아니, 어디서 살 겨? 일은 뭐 해 먹고 살고?”

“아직 확실히 정해논 건 없어. 허지만, 조만간 꼭 누이 밑에서 벗어 날 요량인께 그리 알고 있으라고.”

“춘균아,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라.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거 같다. 춘화 년도 도대체가 어디로 꺼졌는지 아직까지도 일점 소식이 없고, 그저 남은 형제간이라고는 니 하고 나 둘뿐이 더 있냐. 그러니 니 하고 나 하고 그냥 의지가지로 함께 그냥 살아 보는 겨. 힘들게 뭐 하러 집을 나가? 방 얻을라면 돈 들고, 너 혼자 밥해 먹기도 쉬운 노릇이 아닐 것인 디. 이 집도 사람이 없어서 방이 남아도는 판에 말이여.”

딩동! 딩동!

“아무튼 누이, 이게 뭔 소리여? 초인종 소린 디?”

“가만, 동희는 아닐 테고, 그러면 또 형사들?”

그랬다. 동희는 느닷없이 바람이나 쐰다고 하면서 서울 오빠 집에 놀러간(?)다고 하고는 아직도 내려오지 않은 상태니, 형사들이 분명할 터였다. 동기가 학생운동의 주범 격으로 지목이 되고 난 뒤, 수사선상에 오른 뒤로 벌어지고 있는 사단이었던 것이다.

“나가지 말어 누이. 그냥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있으면 되는 겨.”
“안 돼. 그러다 더 큰 경을 치고 말아. 내가 나가서 잘 달래서 돌려보낼 테니, 너는 이층에 올라가 있어.”

“에이! 그놈의 자식은 쓸데없이 그런 짓을 저질러가지고서는 원!”

춘균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춘이는 일부러 더 슬리퍼 끌리는 소리를 크게 울려가며 대문 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갔다.

“누구세요?”

“네, 저기 혹시 여기가 서동기 선배님 집이 맞나요?”

의외로 젊은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그런데요. 아가씨는 누구에요?”

춘이는 깜짝 놀랐다. 형사들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오고 해서 제 녀석 후배 아이를 대신 심부름 보낸 것이라는 판단이 번뜻 들어왔던 것이다.

“예, 저는 서동기 선배님하고 같은 과 후배에요.”
“그 그래요. 저기 학생, 혹시 우리 동기 심부름으로 온 건가요?”

“네? 아 아니에요. 그냥 아주머니한테 드릴 말씀이 하나 있어서......”
“아니라고요? 그럼 도대체? 아참,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세워 놓고.”

문을 열자, 참하면서도 얌전해 보이는 젊은 아가씨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네, 어 어서 들어와요.”

첫눈에도 귀염성 있고 붙임성 있어 보이는 깜찍한 아가씨였다.

“잠깐만 학생, 내가 밖 좀 한번 살펴보고. 우리 동기가 요즘 형사들한테 쫓기고 있는 몸이라서 말이야. 혹시, 수상한 사람들한테 미행당하거나 그런 건 없었지요?”

“네? 아 네, 어머님. 그럼요. 저도 서동기 선배님이 학생운동 때문에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학생.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하니까?”

“네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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