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 18:43ㆍ창작문학관
제 16장 추적자
46
추정님은 다시 또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뒤를 쫓고 있던 두 사내는 더 이상 모습을 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 역시도 추정님이 자신들의 미행을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이렇게 된 이상, 오늘도 오빠한테로 가 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래, 일단은 집으로 가자. 위험한 시도는 무조건 피하는 게 좋으니까. 만일의 경우, 나 때문에 오빠가 저 사람들에게 붙들려 가기라도 한다면? 그 땐 정말로 죄책감에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될 거야. 오빠, 미안해. 나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 오빠가 보고 싶어 미치겠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오빠도 조금만 참아 줘. 정님이도 이렇게 참는데, 오빠도 그래줄 수 있지?
정님은 한숨을 폭 내쉬며 동기 오빠가 숨어 지내고 있는 산동네 판잣집 셋방으로 향하던 발길을 포기하고, 다시 자신의 집이 있는 범골 쪽으로 걸음을 옮겨 딛었다.
“저 계집애가 또 눈치를 챘나 본데?”
“그런 것 같군.”
김 형사의 말에 이 형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형사,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런 식으로 가다간 시일만 질질 끌고, 진척도 없고. 무슨 특단의 수를 강구해야 되는 거 아녀?”
“글쎄, 그렇다고 해서 죄 없는 아이를 잡아다가 마구 족칠 수도 없는 일이고. 이거 정말 미치고 환장하갔구만.”
“죄가 없는 건 아니지. 데모를 주도한 주범 놈을 애인으로 둔 것도 죄라면 죄니까.”
“주범 놈의 애인이라...... 근데 말이다 김 형사. 그건 좀 무리한 생각이 아닐까? 생각 해 봐. 어떻게 이종사촌 지간을 두고 애인 사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냐 이 말이야. 아무리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타락했을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애인 사이라기보다는 그냥 좀 아주 가까운 이종사촌 지간이라고 해 두는 게 정확한 판단 아닐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는 한데,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면 결코 그런 게 아니지 않냐 이거지. 저 애 친구 애들도 하나같이 증언을 해 줬잖아. 심지어 자신이 지켜보는데도 불구하고, 둘이서 여학교 뒤편에서 만나자 마자 입맞춤을 하는 것을 봤다는 애도 있었고.”
“그게 참. 정말 아리송하단 말이야. 이종사촌 지간에 입맞춤이라...... 거 참!”
“자자 이 형사, 지금은 말이야.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거지. 저 애들이 애인 사이이든, 그냥 아주 가까운 이종사촌간이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는 무조건 저 계집애를 이용해서 그 자식을 체포하는 일이 무조건 중요한 거라 이거지. 안 그래?”
“맞는 말이여. 어쨌거나 저 지지배가 지금 눈치를 채고 지 집으로 가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더 따라붙어? 말어?”
“글쎄, 그거 참. 일단은 말이여. 완전히 귀가를 하는 것까지 확인을 하고 철수하지 뭐. 그래야 찜찜하지가 않지.”
“그래 보자구.”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추정님은 어느새 범골 마을로 들어서는 좁은 소로 숲길 언저리에 이르고 있었다. 그 숲길은 범골 사람들이나 학생들이 시내로 왕래를 할 때 이용하곤 하는 매우 호젓한 숲길이었다. 물론, 예전에 오춘이가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집을 왕래할 때 주로 이용하던 범골 뒷산의 안 범골 길 보다는 조금이나마 호젓함이 덜하긴 했지만 말이다. 범골 사람들은 주로 춘이가 이용하던 그 뒷길 보다는 지금의 이 길을 주 통로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님아!”
소로길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추정님은 갑자기 숲 속으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소스라칠 듯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누 누구?”
“나여! 범근이 오빠!”
범근이 오빠란 말에 추정님은 더 이상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 좀 더 속도를 빨리해서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잠깐만 정님아! 할 말이 있어!”
“왜 왜 이래요? 난 할 말이 없다는데?”
급기야 추정님은 책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정님이 너, 거기 안 서?”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의 거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추정님은 숨을 할딱 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님의 앞으로 재빨리 다가든 사내는 입가에 한 가득 회심의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도망을 가면 어디까지 간다구?”
“정말 왜 이래요? 나 정말 그쪽 싫단 말이에요. 싫다는데 왜 자꾸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 에요?”
“싫은 건 니 사정이고, 나는 이렇게 니가 좋아 죽겠는데 어쩌란 말이여?”
“소리 지를 거 에요?”
“질러! 여기서는 아무도 알아들을 사람 없을 테니께.”
“정말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어요? 나한테는 좋아하는 사람이 이미 있다니까요. 그리고 나는 댁 같은 남자 스타일은 싫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왜 이리 질기게 달라붙는 거죠? 이젠 제발 좀 그만 둘 수 없어요?”
“못 해! 나는 정님이 너 아니면 죽어도 못 산다고 했잖어? 오늘은 절대로 너 안 보내 줄 거여. 절대로.”
“네?”
“너를 오늘부로 완전히 내 여자로 만들어 버릴 작정이여. 그러니, 더 이상 도망 칠 생각은 말어. 어어어? 너, 거기 안 서? 당장 거기 안 서?”
“사람 살려요! 아빠, 사람 살려요!”
죽을힘을 다 해 다시 도망을 치기 시작하는 정님. 그리고 그 뒤를 미친 듯이 쫓아가는 사내. 그리고 마침내,
“아아아! 살려 줘요. 제발 살려 줘요.”
“그렇게 말을 해도 말을 안 듣고 도망을 쳐?”
쫘악!
“아악!”
“그만두지 못 해!”
뒤쪽으로부터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사내는 석고상이 된 듯 그대로 몸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골 댁의 집 역시 추판석의 집처럼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집을 둘러싼 돌담의 모습도 그대로였고, 싸리 문 역시도 그대로였다. 변한 게 있다면, 판석의 집이나 가는 골 댁의 집이나, 그 동안에 초가지붕이 석판(石板-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어 있는 것뿐이었다. 초가집도 바꾸고, 마을길도 넓히고, 어쩌고저쩌고 하던 새마을 운동의 여파가 그렇게 변화를 시켜 놓은 것이리라.
그동안에 구용섭이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채, 추판석의 집 동정을 엿보았던 바로는 오춘화와 구동철은 분명히 고향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 분명 해 보였다. 그 대신으로 구용섭은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추판석과 가는 골 댁의 관계. 그 사실을 알고 났을 때, 구용섭은 말 그대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아내를 빼앗긴 옛 친구 녀석이 자신이 한때 몸을 빼앗았던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어 있다는 사실. 생각 해 보면, 이 보다 더한 희극(喜劇)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구용섭은 가늘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 가는 골 댁의 신음을 귓가로 새겨들으며, 점점 더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굳이 가는 골 댁 앞에 다시 현신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러고 자살 행위도 될 것이고. 그래, 그 년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겄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아무리 완벽하게 변장을 했다고 해도 안심할 계제가 아니지. 만일의 경우도 대비해야 하니까. 그나저나 그 년을 대체 어디 가서 찾는다? 혹시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인천 땅 어딘가에 그대로 눌러 있는 거 아녀? 그려, 그럴지도 모르지. 그 년이 오히려 그런 점을 노렸을 수도. 아녀. 가장 확실히 짚이는 곳은 역시 서울 쪽이여. 그 년 생각도 서울이 그래도 가장 넓으니께 숨어 있기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 혀. 게다가 기집들이 일자리를 잡기도 상대적으로 가장 수월한 곳이기도 하잖여.
숨 넘어 갈 듯 계속 이어지던 가는 골 댁의 교성 소리는 어느 새 뚝 그쳐 있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삐그덕 열리는 지게문 소리. 그 때 돌담 밖 너머 위로 고개를 길게 빼어 들고는 안의 동정을 살피며 생각에 잠겨있던 구용섭의 모습이 추판석의 눈 안에 들어왔다.
“거기 누구요?”
판석의 말에 소스라칠 듯 놀라는 용섭. 하지만,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는 기왕에 돌담 밖 샛길을 따라 죽 걷고 있던 행인 행세를 하며 판석의 눈길에서 벗어나 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 용섭을 꿸 듯한 눈길로 쏘아 보는 판석.
“이봐요, 아저씨. 잠깐만 거기 좀 서 보쇼!”
그랬음에도 대꾸도 없이 돌담 끝머리까지 벌써 멀어지고만 낯선 노인.
“아, 어딜 자꾸 가요? 잠깐 거기 서 보라니께?”
후다닥!
“어어? 아니, 이봐요? 거기 안서요?”
정신없이 싸리문을 열고 쫓아나가 본 판석.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낯선 노인의 모습은 더 이상 발견할 수가 없었다.
거참 이상하네. 뭔 노인네가 동작이 저리도 잽싼 겨? 그나저나 못 보던 노인넨 디? 누구여 대체? 분명 우리 동네 사람은 아닌 디...... 분명히 소리를 엿듣고 있었단 말이여. 그냥 호기심으로 그런 건가? 그놈의 영감탱이 취향도 고약하네. 남의 동네 놀러 와서 남의 집 떡방아 찧는 소리나 엿듣고 있었단 말이여? 거 참!
“왜 그래요 정님 아버지? 말숙이에요?”
이미 마당으로 따라 나와 있던 가는 골 댁이 다시 싸리울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판석을 보고 하는 말이다. 말숙이는 오늘 아침에 이미 시내에 있는 제 고모할머니 집에서 자고 온다고 말을 했었다. 그랬음에도 혹시나 하고 말숙이가 벌써 돌아온 건 아닌지 놀란 가슴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말숙이가 아니고 생전 못 보던 노인네가 남의 집 담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잖어.”
“못 보던 노인네가요?”
“그려. 우리 동네 사람은 아녔어.”
“그거 이상하네요. 우리 동네 사람도 아닌 노인네가 이 늦은 시각에 이런 곳엘 왜 와 있대요?”
“그걸 내가 어찌 아남. 아무튼 나는 이만 가 볼라네. 정님이 올 시간도 벌써 지났고.”
“꼭 그렇게 꼬박꼬박 가 봐야 해요? 오늘은 말숙이도 없는 날인 디. 정님이가 무슨 어린네도 아니고. 지가 알아서 밥 해 먹고 공부 잘하고 잠자고 하겄지요.”
“당신 너무 밝히는 거 아녀?”
“밝히기는요.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요.”
“아무튼 일단은 가 봐야 겄어.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한이 있어두.”
“그래요 그럼. 하여튼 나보다도 더 딸네미가 우선이라니 께.”
“불쌍한 애여. 그러고 나한테는 하나 밖에 없는 딸네미여. 내가 아니면 누가 그 애를 챙겨 주겄어?”
“알았어요. 어서 가 봐요.”
“문단속 잘하고 있으라구. 가 볼 테니 께.”
“그 영감 때문에 걱정 돼서 그래요?”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 오늘은 말숙이도 없고, 당신 혼자 있는 집이라서 그러는 거지 뭐.”
“그러니께 갔다가 얼릉 돌아오란 말예요. 그럼 아무 걱정 할 것도 없잖어요.”
“알았어. 내 얼릉 갔다 올겨.”
가는 골 댁 집 싸리문을 나서서 자신의 집 쪽으로 향하는 판석. 그리고 그런 판석을 길 가 수풀 속, 나무 뒤에 숨어서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는 용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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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453014-56-274483
예금주 남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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