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31. 11:15ㆍ창작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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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을 사랑 해
몇 날 며칠을 두고 내려오는 빗줄기
또 때로는 작달비, 이슬비, 구슬비
또 때로는 작은 바람에 섞인 소슬비 마저......
그래도 한결같이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
승주!
아, 당신만을 사랑 해! 당신만을 사모 해!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그리고 또 이렇게 몇 해가 가도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렇게
당신만을 사랑 해! 당신만을 사모 해!
당신을 그리다 지쳐버린 그 어느 날에는
자전거의 발판을 열심히 굴려 어디로 가고,
당신을 그리다 눈물로 얼룩진 그 어느 날에도
등 가방 배불리 꾸려지고, 또 어디로 가고,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렇게
당신만을 사랑 해! 당신만을 사모 해!
승주!
당신을 그리다, 그리다 이렇게
말라비틀어진 꼬투리로 죽어간다고 해도
당신을 그리다, 그리다 이렇게
썩어문드러진 껍질의 잔해로 바스러진다고 해도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렇게
당신만을 사랑 해! 당신만을 사모 해!
그러기를 한결같이 이렇게 간구 해 보는 시간
장대비는 아직도 이렇게 창문을 마구 두들기는데
작달비는 여전히 이렇게 내 아픈 가슴 마구 두들기는데
(김승주에 미친 어느 고삐리 소년의 비밀 일기장 넋두리 중에서)
아, 여기가 바로 우리 승주가 태어난 그 동네란 말인가? 그리고 이 정겨운 제주 올레길. 그래, 저기 보이는구나. 아이들이 보인다. 저 아이들 중에 우리 승주도 분명히 끼어 있으리라. 그래, 저 아이가 바로 승주인 게 틀림없어. 아! 승주야! 승주야! 가슴이 마구 요동질을 쳐 온다. 어린 승주는 저기서 저렇게 제 친구들하고, 소꿉놀이에 여념이 없는데, 나만 왜 이렇게 몸이 떨리고, 마음이 긴장이 되고,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그래, 오랜 세월, 너무나도 그녀를 사랑해 왔기에 이럴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 몸을 앞에 두고서도 가슴이 설레고, 몸이 떨리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테니까.
“얘들아!”
“네?”
“저요?”
“......?”
“그래, 너희들 모두다. 그런데 이 중에 승주가 누구지?”
이미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비록, 어색하게 쳐 올린 단발머리에 남루하고 헤어진 하양 검정색 치마 차림의 그녀이긴 했어도. 그랬다. 1960년대 초반엔 부잣집 아이들이든, 가난한 집 아이들이든 모두가 다 그렇게 약간은 추레한 차림들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때이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0년 안팎이라,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고, 또 그 여파로 인하여 나라 자체가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인데, 국민들 행색 수준만이 일방적으로 부자 나라들의 그것과 닮아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어불성설이요, 모순적 염원 아닐까?
“예야!”
“예야아!”
“......?”
“그렇구나! 네가 정말로 승주 맞니?”
끄덕끄덕!
“그렇구나. 니가 바로 승주구나. 근데 우리 승주는 지금 몇 살?”
아, 눈물이 쏟아지려고 한다. 내가 왜 이러지?
“다......성 사알. 긍데 앙조씬 누궁야?”
별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겄습니다. 아, 기어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양하하하! 앙조씨 운다!”
“옹? 징짜다. 앙하하하!”
“......?”
두 아이는 그렇게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 하는데, 승주는, 우리 승주만큼은, 아니 우리 승주 누님만큼은 그래, 웃지 않는다. 그리고 재미있어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고운 눈을 둥그렇게 치켜 뜬 채로 가만히 내 모습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 어쩌면 저리도 의젓할까? 겨우 다섯 살인데.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아이일 뿐인데.
“그래, 아저씨는 지금 우는 거란다 얘들아. 승주를 만나 너무 기뻐서 이렇게 우는 거란다. 승주야, 이 오빠는 말이야. 니 아빠 제자란다. 그래서 이렇게 지나가다 말고, 너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거야. 아빠 지금 집에 계시니?”
도리도리!
“어디 가셨는데?”
“웅리 앙빠능 징끔 징 집에 엉서!”
그래 승주야. 아니, 승주 누님아! 사실 나는 말입니다. 누님의 아빠 동정이 궁금한 게 아니랍니다. 아닙니다. 누님 아빠, 아니 장인 어르신의 동정도 물론 궁금하긴 합니다. 딱! 파! 화상, 정신 차리고. 짜샤! 가만히 있어. 나 지금 대단히 심각하단 말이여. 흐흐흐! 이 화상, 완전히 넋이 나갔네. 에그 불쌍한 우리 화상! 혜은이 하나 때문에 완전히 바보가 다 되어 버린 우리 화상! 끌끌! 이를 어쩌냐? 짜샤야! 너 정말 안 찌그러질 겨? 지금 찌그러져 주면, 계산 영원히 면제 해 주지. 흐헉! 정말? 아 알았어. 화상, 너 그거 정말이지? 그래 짜샤! 히히히! 얼른 찌그러져야지 후다닥! 화아! 그 자식, 오늘 신기록 경신이다. 빛보다도 더 빨리 움직이는 존재를 목격하다니. 이건 기적이여 기적! 가만, 아인시타인 성님께서 빛보다도 더 빠른 존재는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다고 했으니...... 그래 좋다. 빛보다 더 빠르게는 아니고, 빛보다 조금은 느리게 빨리 사라졌다고 해 두지 뭐. 시방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렇구나. 그럼 이 오빠가 승주 아빠도 못 만나고 가야겠구나.”
“항지망, 승주네 집엥 승주 옹마 잉때요.”
승주 누님 친구님, 누님은 제발 나서지 마요! 아닙니다. 나서도 돼요! 내가 왜 이럴까. 아무리 승주 누님한테만 미쳐 있다고 해도, 승주 누님 친구를 차별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미안합니다. 승주 누님 친구님!
“정말이니 승주야? 이 아이 말이 맞어? 너네 집에 지금 엄마 계셔?”
끄덕끄덕!
“우 웅리 옹마는 징금 집엥 잉서.”
어떻게 할까? 승주의 손을 잡고, 아니, 승주 누님의 손을 잡고, 아니 업고, 둘이서 함께 승주 누님 집으로 가 볼까? 가서 정말로 승주 어머니, 아니 장모님의 모습을 직접 한번 봐 봐? 그래, 한번 봐 보자.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만나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나저나 어떻게 생긴 여성일까? 어떻게 생긴 여성이기에 이토록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생산 해 낼 수가 있었을까? 듣기로 낙랑극단 여자 단원 중에서도 최고의 미인이었다고 하던데? 그러니 미모야 두말 할 것도 없을 테고. 그래, 어서 가 보자. 우리 승주가, 아니 우리 승주 누님이 대체 장모님의 어디를 어떻게 닮았기에 이토록 어여쁘게 생겨난 것인지를 꼭 확인 해 보자.
“그렇구나. 그럼 승주야, 지금 당장, 너희 집으로 가 볼 수 있을까? 승주 네가 오빠 안내 해 줄 수 있어?”
끄덕끄덕!
“항 수 잉서!”
“그럼, 어부바!”
“앙니야. 나 홍자 걸어강 숭 잉서!”
에그 승주야, 아니 승주 누님아, 누가 자기가 못 걸어갈까 봐 그러나 뭐? 그냥 내가 자기 업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딱! 파! 화상, 그냥 걸어가게 해! 멀쩡한 두 발 달린 애를 왜 업어주려고 그러냐? 뭐여? 짜샤 너 이 자식? 계산 해야지? 얼렐레? 계산 면제 해 주기로 해놓구 이 화상 이거 벌써부터 노망 끼가 온 겨? 치매 끼가 온 겨? 어? 아참 그 그렇지! 그 그래도 짜샤 너? 계산해야 혀! 뭔 계산? 아무리 계산 면제가 되었다고 해도 또 불쑥 삐져 나왔으니께 맞을 건 맞아야 한다니께! 뭐여? 이 화상이 미쳤나? 에라이 너나 더 맞아라. 그것도 쓰리쿠션으로. 딱딱딱! 파파파! 후다닥! 어렵쇼! 짜샤아! 너 거기 안 서어! 에고 파! 짜식이 한 타도 아니고, 연거푸 세 타를 두드리고 도망을 치네? 거기다 쓰리쿠션이라고 하는 무분별한 외래어 남용까지? 으이구! 괜히 계산 면제 해 준다고 했구먼. 아까비! 아까비!
“그래도 업혀 승주야. 이 오빠가, 아니 동생이 승주 누나 업어보고 싶어서 그래.”
“아앙? 깔깔깔! 종 앙조씨, 승주항테 눙나랬엉!”
“엉레리 꽁레리! 어릉이 어링이항테 눙나라고 행데요!”
그래요 아직 발음도 제대로 정확히 나오지 않는 어린 누님들아! 마음껏 나를 놀려 먹어요! 하지만 이 어른 아닌 어른은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오히려 더 행복할 뿐이랍니다.
“싱어 싱어! 낭 앙조씽 눙나 앙니야!”
그래요 승주 누님, 겉으로 볼 때는 이 동생이 틀린 거 맞아요. 하지만, 진짜는 내가 승주 누님 동생뻘이랍니다. 승주 누님은 양력으로 1956년 9월 23일이고, 이 동생은 양력으로 1962년 4월 1일이니까 누님보다 여섯 살 아래라고요. 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여기서는 승주 누님을 아이로써만 대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아저씨 내지는 오빠 행세로써만? 현실적으로는 그래야 하는 것 같은데, 이거 참 왜 이리 미안한 생각이 들어오는 겨! 그렇지. 내가 그만큼 승주 누님을 죽도록 아끼고 있고, 흠모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외다. 비록, 죽도록 사랑하는 당신이지만 엄연히 당신은 지금 다섯 살 배기 어린 아이에 불과하니까.
“하하하! 오빠가 장난 친 거야. 그래 승주 니 말이 맞어. 승주는 이 오빠의 누나가 아니고, 어린 여동생이란다. 그럼 말이야. 승주는 오빠의 동생이니까 이제부터는 아저씨라고 하지 말고, 그냥 오빠라고 불러줄래?”
“앙이야! 앙이야! 옹빠 앙니야!” (승주)
“히히히! 장기가 옹빠래!” (승주친구 하나)
“깔깔깔! 저 앙조씨 댕따 웅낀다.” (승주친구 둘)
그래 얘들아. 마음껏 웃어주렴! 새 나라의 어린이는 그렇게 마음껏 웃으며 자라나야 훌륭한 어른이 되는 거 에요. 딱! 파! 화상, 누님들한테 너 지금 훈계 하고 있냐? 얘네들은 엄연히 니 누님뻘들이여. 짜샤! 누가 그걸 모르냐?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과거로 회귀한 상태라 이런 거 잖어? 화상 니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아무튼 빨리 우리 혜은씨 엄니한테 가 보자! 나도 혜은씨 엄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하다야! 그 자식! 디게 성가시게 구네. 짜샤 너는 마! 제발 좀 찌그러져 있어라. 그렇지 않아도 바쁘신 몸인 디 자꾸만 니 상대 해 줄려니까 시간이 지체 되잖어. 독자들이 짜증 내겄다. 화상아, 그건 니가 잘 못 생각하는 겨. 어차피 시간 때우려고 읽는 소설 나부랭이인 디,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쩔 것이냐 이것이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쩔 것이냐 이것이여. 말하자면, 너 하고 나 하고 티격태격 하는 이 장면 역시도 엄연히 이 소설책 구성상의 중요한 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거여. 그 자식! 오늘따라 디게 유식한척 굴고 자빠졌네. 그려, 짜샤 니 말이 틀린 건 아닌 디, 그래도 어째 좀 기분이 껄쩍지근 한 게 맴이 영 요상타야. 다들 아셨지유 독자님들? 짜샤가 그러는 디, 자기하고의 티격태격 장면 역시도 엄연히 이 소설 구성상의 주요소 중 하나라고 합니다요. 그러니 모든 걸 이해하시고, 앞으로도 꾸준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겄습니다요 네네! 그래도 필요 없시다고요? 짜샤! 독자님들이 너 하고 티격거리는 장면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시는 디? 짜증까지 난다는 디? 그라고 뻑 하면, 딱! 파! 그 대목을 집어넣고 있는 디, 그 불필요한 대목도 좀 빼 버리면 안 되겄냐고 하시는 디? 이제는 머리에 쥐가 다 날 것 같다고 하시는 디? 화상, 너는 이제 없는 거짓말도 지어 내냐? 독자님들이 언제 입이라도 한번 뻥긋 했냐? 그란디두 그런 거짓말을 뻔뻔시리 늘어놓고 자빠졌냐 시방? 헤헤헤! 짜샤 너 이 자식!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꾸 입바른 소리를 해 대는 겨? 혹시 쥐약이라도 쳐 드신 거 아녀? 아녀 화상, 나도 오늘은 맴이 제법 심상해져서 이러는 겨. 사실은 말이여 나도 혜은씨를, 아니 승주씨를 그동안 엄청나게 속으로 좋아 해 왔었거든. 아니, 미치도록 짝사랑 해 왔었거든. 아니 뭐여? 짜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짜샤 너 이 새끼! 후다닥! 짜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개새끼! 죽인다아아아! 후다다다다악! 허허! 허! 햐! 그 새끼 빛이네! 빛이여! 어떻게 저리도 빠를 수가 있지? 그려! 저건 절대로 평범한 물체의 움직임이 아닌 것이여. 빛의 움직임이라고 해도 되는 겨!
“그래, 얘들아! 이 오빠는 아저씨가 아니라 그냥 오빠라고 불러야 되는 거 에요. 왜냐하면, 아저씨는 너희들 아빠처럼 결혼을 해서 너희들 같은 자식들을 낳아 키우고 있는 나이가 좀 지긋하신 분들이 아저씨인 것이고, 이 오빠처럼 결혼도 아직 안 하고, 너희들 같은 자식도 없는 사람은 그냥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거 에요. 알았지요 다들?”
“넹......”
“넹......”
“......”
꼭 우리 승주 누님만 대답을 삼간단 말이여.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이렇게 다른 아이들하고는 남다른 뭐가 있었기에 그렇게 특별한 인기가수도 될 수 있었던 거겄지. 인기가수가 뭐 아무나 되는 건가 뭐.
“승주 너는 왜 대답 안 해? 오빠 말이 틀리다고 생각 하는 거야?”
“앙니야! 망는데, 긍래두 옹빠 싱탄 말이야! 앙조씨가 종아!”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그럼, 너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앙조씨라고 불러 그냥!”
에그, 내가 양보해야지. 사랑하는 여자가 그러겠다는데 부득부득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는 일이지.
“앙니야! 앙니야! 앙조씨 싱어! 긍냥 옹빠라고 부릉래!”
헉! 승주 누님아!
“아니 왜 또? 금방 앙조씨라고 부른다메?”
“앙니야! 앙니야! 옹빠라고 부릉래엥!”
“하하하! 깅승주능 청깨구락징!” (승주친구 하나)
“깔깔깔! 깅승주능 청깨구락징!” (승주친구 둘)
“앙니야! 앙니야! 나 청깨구락징 앙니야앙!”(승주)
하이고 미치갔다. 어쩌면 저리도 귀엽고, 깜찍하고, 앙증맞고, 사랑스럽고...... 그렇다냐. 어릴 때부터 저랬으니, 커서도 그렇게 사내들 심장을 단숨에 옥죄어버릴 수 있었던 거겄지. 미치겄다 증말! 짜샤야, 나 어떡하냐? 우리 승주 누님을, 아니 우리 귀염 승주를 이 자리에서 그냥 잘근잘근 꼭꼭 씹어 먹고 싶어. 엥? 이 자식 어디 갔어? 이럴 때는 왜 대답을 안 하는 겨?
“에구 귀여워! 이이이 귀여워 미치겠다아!”
그러면서 미친 척 하고, 번쩍 귀염 승주를 안아 들었다.
“승주야, 우리 이제는 승주네 집으로 가 볼까?”
“앙이! 싱어싱어 앙이이! 내려주엉!”
“싱어! 안 내려 줄래! 오빠가 이렇게 우리 승주 안고 있을래!”
“앙이! 싱타니깡!”
버리둥! 버리둥!
그럴수록 승주 누님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한 발 두 발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내려당라니까앙! 아아앙!”
운다. 내 사랑 승주가 운다. 1977년 연말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을 하고 난 뒤,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처럼, 아니 그 형상으로 운다. 그래, 바로 이거야. 스물한 살 승주와 다섯 살 승주의 세월을 뛰어넘은 완벽한 형상의 조화! 감격이다. 다를 줄 알았는데, 많이 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아, 이리도 비슷할 수가! 아, 승주! 아니, 승주 누님!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아, 내 사랑! 내 소중한 사랑!
끼이이이익! 삐그더어억!
“승주 너, 왜 울어? 아니, 누구에요? 누군데 그렇게 학생이 남의 아이를 안고 있는 거 에요?”
그랬다. 승주의 집은, 아니 승주 누님의 집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아이들이 놀던 자리 건너편에 보이던 바로 그 집이었던 것이다. 귀염 승주와 그렇게 사랑싸움, 아니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그 집에서 귀염 승주의 어머니, 아니 장모님께서 헐레벌떡 뛰쳐나오신 것이다. 에구 이걸 어쩌? 이거 잘못하면 아이 납치범으로 몰릴 수도 있겄는 디? 뭐라고 둘러 댄댜? 그나저나 장모님 저 모습 어떡 혀? 저 모습은 영락없는 승주 누님 스물한 살 때 모습, 아니 서른한 살 때 모습 아녀? 그래, 정확 혀! 정확하다니께! 거참 신기하네. 어쩌면 저리도 승주 누님을 그대로 빼다 박으셨지? 아니지. 승주 누님이 장모님의 모습을 빼다 박은 건가? 그랬어. 그래서 그렇게 낙랑 극단에서도 최고의 미녀 단원으로 소문이 났던 겨. 그림이 촤르르하고 그려지는구먼. 아, 그나저나 저 미모 어떡하냐? 미치겄다 정말! 나 이러다 장모님까지 도매금으로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닌지 몰러? 딱! 파! 화상, 너 미쳤냐? 그렇지 않아도 인기 나부랭이 하나 없는 소설인 디, 세상에 내 보내기도 전부터 관공서에 회부 될 일 있냐? 알어 짜샤! 그냥 재미로 해 본 소리여! 장모님이 그만큼 우리 승주 누님을 꼭 빼다 박으셔서 하는 소리 아니냐? 짜샤 니 눈엔 그렇게 안 보이는 겨? 그건 그런 디, 햐! 정말 닮긴 많이 닮았네. 어쩌면 저리도 똑같이 생겼냐. 이러다 나도 혜은씨 엄니까지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닌 지 몰러! 뭐여? 짜샤 너 이 새끼! 미쳤어? 죽인다? 후다닥! 그래, 짜샤야, 얼른 빛처럼 사라지거라 흐흐! 난 바쁜 몸이여!
“아 예, 안녕하세요? 저는 승주 아버님, 아니, 영어 선생님 제자입니다. 지나던 길에 선생님의 따님이 아이들과 놀고 있기에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잠깐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
역시 녹슬지 않은 내 잔머리! 과거 현재 미래, 시공간을 그대로 관통하는구나!
“그래요? 어머, 아이들 아빠 제자였구나. 그런데 이걸 어쩌지요? 선생님은 지금 외출하고 안 계시는데?”
다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승주 누님의 아빠, 아니 장인 어르신은 낙랑극단 단장 직을 지내셨지만, 한편으로는 학교 영어교사이기도 하셨다. 한마디로 식자층에 계셨던 분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런 고상하신(?) 분이 낙랑 극단이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대중들이 딴따라라고 천하게 여기던 그런 분야의 일까지도 기꺼이 좋아서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의 그런 인식 자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들의 그런 편협한 인식관행을 강력히 규탄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나이기도 하다. 나 자신, 혜은이의 노래, 아니 승주 누님의 노래를 엄청 좋아하고 있고, 또 다른 대중 가수들의 노래들 역시도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저런 견지에서 보더라도 승주 아버님, 아니 장인 어르신은 정말 훌륭하시고, 장하신 분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능력도 못 가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장인 어르신의 경우는 학교에서 영어선생님도 하시고, 또 유랑극단이라고 하는 전문 공연예술 단체의 수장 노릇까지도 지내셨으니 말이다.
“앙이! 잉제 내려줘엉! 내려 당라니까앙!”
에고 미안해요 내 사랑! 이제 내려 줄게요 내 사랑아! 어이차!
“옹마아!”
토다다다닥!
“어이구 우리 승주 좋았겠네? 잘 생긴 오빠가 안아 줬쪄?”
“앙이야! 앙이야!”
“하하하!”
“호호호!”
희열이 북받쳐 오른다.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와, 또 죽도록 사랑하는 그 여자를 낳아주신 아름다운 장모님과 더불어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말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기적 중에 기적이 아니겄는가. 별님! 이게 정말 꿈인가요? 생시인가요? 물론, 꿈이기도 하고, 생시이기도 한 일이겄지요. 나는 지금 엄연히 꿈같은 과거로 날아온 처지이니까요. 또, 그 꿈같은 과거 속에서나마 생시처럼 사랑하는 승주 누님과 장모님을 한꺼번에 만나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니까요. 이쯤에서 짜샤 이 자식이 또 촐랑거리며 등장해야 하는 디, 어째 조용하다냐? 이 자식 이거 어디 간 겨? 촐랑아? 촐랑아?
“저기 학생!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와요. 바쁘지 않으면 우리랑 같이 저녁도 먹고요. 그러다 보면 선생님도 돌아오실 거고.”
“아닙니다 사모님. 어떻게 제가...... ”
아니긴 뭐가 아녀 이 화상아? 무조건 좋다고 해야지. 촐랑이 너냐? 어째 안 나오나 했다. 그래, 촐랑이 니 말이 맞긴 한 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처음부터 대놓고 그래도 돼요? 라고 해 버릴 수 있냐? 촐랑이 너는 대인 관계의 기본 원칙도 모르는 놈이여! 예의상, 그냥 한번 사양을 해 보는 것이 기본 도리라는 거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껴. 더군다나 사랑하는 우리 승주 누님을 어떻게 그냥 두고 갈 수 있다는 겨? 그렇게는 못 하지야! 암! 못 하지야! 화상 너, 아무래도 너무 잘난 척 하다가 똥통에 풍덩 해 버릴 것 같은 조짐이 드는 디?
“아, 학생이라 바쁘겠구나. 그래요. 공부 열심히 해야지요. 그래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지요. 그럼 학생, 다음에 또 이곳을 지나게 되면, 그 땐 꼭 들려주어야 해요?”
헉! 그게 아닌 데요 장모님? 크크크! 내 그럴 줄 알았다. 화상 너 완전히 똥통에 풍덩! 크크크!. 이젠 어떡 하냐? 촐랑이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내가 뭘? 메롱! 후다닥! 촐랑이 너 거기 안 서!
“아 예 사 사모님! 그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선생님께도 말씀 잘 드려주세요. 승주야 안녕! 오빠 간다?”
에구우 이게 아닌 디. 나는 가고 싶지가 않은 디. 왜 자꾸 이놈의 조동이에서는 엉뚱한 대답이 줄줄 흘러나오는 겨. 미치갔네 증말! 촐랑이 그 자식 때문인 겨 이게 다! 아아악!
“앙이야! 앙이야! 아아앙!”
헉! 승주 누님아! 왜 울어요? 혹시, 이 애인 동생이 그냥 가 버리는 것이 서운해서 그러는 거 에요? 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승주 누님이 나를 생각해서 울어 준다? 아, 행복해! 딱! 파!
“어머, 승주 너 왜? 이 오빠가 그냥 가는 것이 서운해서 그러는 고야?”
끄덕끄덕!
아, 승주 누님!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아, 승주 누님, 당신은 모르실 거야. 내가 그 얼마나 당신만을 사랑하는지. 승주 누님! 흐흐흑! 화상, 뚝! 짜샤 너 이 새끼, 가만 좀 있어. 나는 지금 정말로 최고로 감동 먹었단 말이여. 다섯 살 배기 승주 누님이 나를 저렇게나 끔찍이 생각 해 줄줄 어떻게 알았냐 이 말이여. 꺼으으!
“그러면 안 돼! 시간을 쪼개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할 오빠를 못 가게 잡는 것은 나쁜 일이에요. 승주 네가 잘 못 하는 거 에요. 그러니 어서 울음 뚝! 착하지 우리 승주?”
뚝!
헉! 승주 누님아!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뚝! 해 버릴 수 있어요? 그러면 이 애인 오빠, 아니 애인 동생 정말 서운하단 말이에요. 아, 예삐 장모님아! 저 공부하기 싫단 말이에요. 그러니 제발 저를 다시 붙잡아 주세요. 그냥 인사치레로 사양을 해 본건데 그걸 그렇게 곧이곧대로 알아들으시면 어떻게 해요? 장모님은 정말 미워! 아이잉! 예쁜 장모님아! 어서 날 못 가게 마구마구 잡아 달란 말이야요 앙앙!
“앙랐쪄 옹마! 옹빠 고럼 잘 강아! 당음에 똥 왕야 돼?”
아니 그게 아니고 승주 누님아! 에구구! 망했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
돌아간다 돌아간다! 하늘이 돌아간다! 아, 원망스럽고도 감내하기 힘든 시간의 압박 현상이여! 아아아! 아아아! 안녕! 귀염 승주야! 아아아! 아아아! 안녕! 예삐 장모님아! 아아아! 아아아! 안녕! 예쁜 사람들아! 안녕히! 안녕히! 꺼으으!
김승주 하나
오늘 또 당신의 귀여운 모습을 보다.
오늘 또 당신의 깜찍한 모습을 보다.
오늘 또 당신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다.
아, 당신은 어찌 그리도 귀여운 것인지.
아, 당신은 어찌 그리도 깜찍한 것인지.
아, 당신은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 것인지.
당신의 머리,
당신의 눈,
당신의 코,
당신의 입술,
그 어느 것 하나 낱낱이 죄다
찬란한 광휘 아닌 것이 없어라.
그 어느 것 하나 낱낱이 죄다
가없는 희열 아닌 것이 없어라.
사랑하는 그대여!
진실로 내가 사랑하는 그대여!
영원한 행복만이 당신께 그득하기를
영원한 기쁨만이 당신께 가득하기를
나 오늘도 이렇게 간절히 염원하노라.
나 오늘도 이렇게 간절히 기원하노라.
(김승주에 미친 어느 고삐리 소년의 비밀 일기장 넋두리 내용 중에서)
음! 여기는 또 어디? 그렇군.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장소군. 그러고 보면, 이 시간의 압박 현상이라고 하는 것 역시, 완전 무대포는 아니란 말이시. 지난번에 희를 만나러 갔을 때도 그랬고 말이여. 평소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그런 장소로 스스로 알아서 착착 잘 데려다 주곤 한단 말이여. 혹시 반지 이 녀석 최수종 기사의 그 비상한 예측 능력을 그대로 훔쳐다 쓰고 있는 거 아녀? 어째 많이 비슷한 것 같은 디?
재잘재잘!
학교 운동장 가의 놀이터 한쪽에서 어린 학생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지금은 점심시간인 듯. 저 멀리로 넓게 펼쳐져있는 드넓은 운동장의 모습이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고즈넉이 들어앉은 학교 교사의 모습까지도. 내가 알기로 이 학교의 건물은 일제 시대에 처음 지어진 건물이다. 그만큼 학교의 연륜이 제법 깊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과연 유서 깊은 이 학교의 이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우리 승주가, 아니 승주 누님이 학창 시절을 보낸 바로 그 학교, 선화국민학교다.
(훗날엔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로 개칭이 되었으나, 이 소설에서는 편의상 그냥 국민학교로 기술을 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시점이 일인칭 주인공 서술적 시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허수창이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쓰던 1970년대 초반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로서야 사사건건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사실, 허수창은 초등학교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명감 내지는 의식조차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런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그를 감히 그 누구라서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엔 두드러기까지 보일 줄 아는 대견한 녀석이 바로 허수창 소년이라는 것도 잘 알아주시기 바란다. - 글쓴이 주)
내가 다녔던 대전시 문창동의 문창국민학교 보다도 훨씬 더 연륜이 깊은 학교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선화국민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동네 이름 자체가 대전시 선화동이다. 선화동은 대전이라고 하는 도시가 일제 시대에 처음 조성이 될 때부터 최초로 생겨 난 동네 이름이기도 하다. 대전시 정동, 대흥동, 문창동이라는 이름들 역시 마찬가지고. 사실상 그런 동네이름들이 최초로 대전시를 구성하게 될 때의 원조 동네 이름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선화동과 문창동의 나이가 엇비슷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문창국민학교와 선화국민학교의 나이는 서로 비슷하지 아니한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선화국민학교는 선화동이 생길 때 주택가와 더불어 동시에 같이 조성이 되어진 것이고, 문창국민학교는 문창동에 주택가가 조성이 될 때 같이 조성이 되어지지 않고,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에 별도로 그렇게 생겨나서 그런 것이라는......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추측일 뿐이다. 다음에 대전 시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하나 구해서 보다 정확한 내용을 알아 봐야겠다. 아니면, 과거로 직접 회귀해서 명확한 진실이 어떤 것인가 직접 알아보고 와도 될 것이고. 그런데 그 따위 정보가 대체 여기서 뭐가 그리도 중요하다고 장황하게 낭설을 까고 있냐고? 음,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군. 나는 지금 왜 과거를 거슬러 이곳으로 시간여행을 오게 된 것인가?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그녀 김승주의 국민학교 시절 모습을 대면하러 이렇게 과거로 회귀 해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주미와 더불어 질탕한 주지육림의 축제를 벌인 뒤, 그녀가 곤한 잠에 떨어진 그 틈을 이용해서 말이지.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승주에게만 집중을 하자. 주미하고 있을 때는 주미에게만 집중을 했듯이. 희정이하고 있을 때 역시 오로지 그녀에게만 집중을 했듯이. 희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늘 그러했듯이. 진숙, 소희, 옥자, 혜린 등과 함께 할 때도 예외를 두지 않고 그러했듯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얘들아?”
“철 따라아!”
뚝!
“네?”
“예?”
“예?”
“네?”
“......?” (승주)
노래에 맞추어 열심히 고무줄놀이에 심취 해 있던 다섯 명의 여자 아이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서 나를 돌아다본다. 그 중에서 넷은 대답을 하고, 단 한 사람, 단 한 여자, 아니 단 한 소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일까? 그렇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그녀, 대전중학교 2학년 다닐 때인 1976년부터 지독히도 끔찍스럽게 사랑해 온 그녀, 실질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사랑하고 있는 존재, 그 존재가 원하면 내 목숨조차도 기꺼이 내어 줄 수도 있는 존재, 그토록 사랑한다고 하는 공주미 조차도, 공주희 조차도, 장희정 조차도, 유진숙, 장옥자, 윤소희, 김혜린 조차도 결국은 어쩔 수 없이 2순위 내지는 3순위로 밀쳐 버리게 하는 아주 특별한 존재. 순위 그 자체를 아예 초월해 있는 존재. 바로 그 존재만이 내게 대답을 해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이 떨떠름해졌냐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지금 몹시도 황홀한 기분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다섯 살 배기 어린 승주 누님이 그러했듯이, 열 살 배기 어린 승주 누님 역시도 내게 대답을 해 주지 않는 대신, 내게로 던져오는 저 투명하고 맑고 깊고 고운 눈빛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사람의 눈이 어쩌면 저리도 투명하고 맑고 깊고 고울 수가 있단 말인가. 깊은 산 속 맑은 옹달샘 물이 저 보다 더 투명하고 맑고 깊고 고울 것이랴? 몽골 대초원에서 올려다 보이는 청명하고 푸른 하늘빛이 저 보다 더 투명하고 맑고 깊고 고와 보일 것이랴? 아, 한도 없이 마냥 고운 저 승주 누님의 깊은 눈 속으로 풍덩 빠져들고만 싶다. 아, 한도 없이 마냥 깊은 저 승주 누님의 고운 눈 속으로 쑤욱 함몰 되어 버리고만 싶다. 딱! 파! 화상! 정신 차리고! 짜샤야! 너 잘 왔다. 나 좀 한번 꼬집어 봐 줄래? 그건 왜?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다시 한 번 더 확인 좀 해 보게! 알았다.
‘꼬오지이입이잉!’
‘아아아얏!’
이 새끼가 꼬집어달라니까 비틀고 자빠졌어? 아 미안! 비틀어 달란 게 아니었냐? 큭큭큭! 아무튼 미안하다야 화상! 됐다. 내 오늘은 승주 누님을 봐서라도 특별히 참는다. 다른 때 같았으면, 너를 걍 패 죽였어야 하는 상황인 디, 오늘 너 운 좋은 줄 알어? 그건 그렇고 말이여. 짜샤 니가 보기에도 나 지금 많이 떨고 있는 것 같냐? 휴! 화상, 정신 좀 차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 앞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대책 없이 미쳐버릴 수가 있는 겨? 짜샤! 너는 모른다. 내가 우리 승주 누님 때문에 그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사랑의 열병을 앓아왔는지를. 내가 왜 몰러? 나 역시도 화상 너 만큼이나 오랜 세월 혜은이를 미치도록 짝사랑해 왔는 디. 아니 뭐여? 짜샤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냐? 응? 아니 내 말은...... 에라 모르겠다. 이럴 땐 무조건 토끼띠지 뭐! 후다닥! 짜샤아!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어! 안 서면 계산 취소한 거 다시 물른다? 물러도 좋아! 일단은 안 맞는 게 상책이니께! 다다다다다! 고오오! 하! 그 자식! 토끼가 아니라 완전히 빛이네! 빛이여!
“얘, 너 이름 김승주지?” (가늘게 떨려 나오는 화상 목소리)
“......?” (역시 대답은 없이 화상 얼굴에다 계속 투명한 눈길만을 고정시켜 놓고 있는 곱디 고운 승주 누님의 모습)
“네 맞아요. 얘가 승주에요.”
“승주야, 너 왜 대답 안 해?”
“승주야?”
“승주 너 왜 그래? 갑자기 벙어리가 된 거니?”
도리도리! (승주)
그랬다. 다른 아이들 넷이 의아한 듯 승주 어린이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지만, 승주 어린이는, 아니 승주 누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리도리만 해 보이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의 다섯 살 승주 누님하고 똑같다. 그렇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다섯 살 때 그 모습이 또다시 똑같이 재현이 되고 있는 것이겄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뭐 있는가. 승주 누님은 지금 내게 부끄럼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꽤나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본래, 상대방 이성이 첫눈에 마음에 들면, 남녀를 무론하고,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 천리인 법. 다들 아시지 않는 가 왜.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고 해서 이 소중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아니, 그런 기회중의 하나를 헌신짝 팽개치듯 내 버릴 수는 없는 법. 물론, 이런 기회를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승주 누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접하고 싶을 때마다 반지의 힘을 빌어 무조건 이렇게 과거로 회귀 해 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해도 무턱대고, 뻑 하면 이렇게 승주 누님을 만나러 올 수는 없는 법. 왜? 그야 독자들이 많이 식상해 할 테니까. 딱! 파! 진짜라니까 짜샤! 그래서 내가 희한테도 달랑 한 번 가 보고, 더 이상 못 가 보고 있는 거 아니냐? 독자들 식상해 할 까봐! 그러냐 화상? 그건 그렇고, 지금은 언능 혜은이한테만 집중 할 시간! 자꾸만 딴 이야기 하덜덜 말고. 독자들이 진짜 식상 해 하겄다. 알았어 짜샤!
“근데 오빠는 누구에요?”
“승주하고 아는 사이에요?”
“승주 친 오빤가 봐?”
“어머 정말?”
“아니야 니들? 함부로 추측하지 마! 이 오빠 우리 친오빠 아니야!” (승주)
아, 승주 누님! 목소리는 많이 변했군요. 깨물어 먹고 싶도록 귀엽게 옹알거리던 그 목소리가 아니네요. 하지만, 지금의 이 목소리도 정말 귀엽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습니다. 당신의 그 고운 얼굴 모습만큼이나 정말로 귀엽고 아름답습니다. 미치겄습니다.
“그래, 나 승주 친오빠 아니란다 얘들아! 나는 말이야 승주 아빠 친구 분의 아들이야. 그래서 늘 우리 아버지한테 승주 동생이 인형처럼 예쁘게 생겼다는 이야기만 많이 들어왔었지. 그래서 이렇게 지나가던 길에 잠깐 승주란 아이가 도대체 얼마나 예쁘게 생겼길래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실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이렇게 없는 시간을 쪼개서 들려 본 거야.”
순 거짓말! 남는 게 시간이면서. 그리고 무슨 우리 아버지가 승주 누님 아빠 친구? 그거 다 말짱 꽁갈이여 흐! 그나저나 역시 난 잔머리의 대가. 어떻게 이렇게 두루마리 휴지 풀리 듯 순간적으로 거짓말이 술술 잘 풀려 나올 수 있는 겨? 흐! 딱! 파!
“냐아하 그랬었구나!”
“냐하하하! 승주 너는 좋겠다. 이렇게 잘생긴 오빠가 너 아버지 친구 분 아들이래잖어!”
“어머! 승주 좀 봐! 얼굴이 빨개졌어!”
“깔깔깔! 진짜네!”
“야! 너희들 정말 왜 이래? 나 얼굴 안 빨개졌단 말이야! 그리고 난 이 오빠 모른다니까! 먼저 교실로 들어갈래!” (승주)
아! 안돼요 누님! 누님이 교실로 그냥 들어가 버리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요? 그러면 정말로 슬퍼질겁니다요 누님!
“야, 김승주! 너 왜 그러냐? 우리 아버지가 네 아빠 친구라는데 왜 날 무시하는 거야? 왜 내 말이 거짓말 같으니?” (다급해진 화상 목소리)
정말 그런 겁니까 누님? 이 거짓말이 진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건가요?
“어머!”
“헷!”
“승주야......”
“야아, 승주야!”
네 여자 아이들의 놀란 반응들! 그리고 더 짙어진 선망의 눈초리들! 그래 얘들아. 나 너희들이 그렇게 한 눈에 반해 버릴 정도로 정말 잘생긴 오빠 아니, 동생 맞아요. 하지만,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는 누님들이 아니고, 바로 저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우리 승주 어린이, 아니 누님이랍니다. 그러니 다른 누님들은 제발 내게서 신경 좀 꺼 주세요. 잔인하다고 해도 할 수 없네요. 내가 먼 미래에서 그렇게 공주미라고 하는 이혼녀와 몸 씨름(?)을 하다 말고, 굳이 이렇게 과거로 회귀 해 온 진정한 이유는 바로 순결하고도 아름다운 미의 여신, 바로 우리 승주 누님을 만나보기 위해서랍니다.
“너희들 정말 왜 이러는 거니? 난 정말 이 오빠 하고 말 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승주)
거짓말! 승주 누님은 거짓말쟁이! 나는 다 알고 있습니다. 승주 누님은 지금 이 동생한테 첫눈에 뿅 간 거 맞다고요. 그리고 다섯 살 배기 승주 누님 역시도 나한테 첫눈에 뿅 같던 거 맞고요.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고요? 그런 거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눈치로 다 아는 거랍니다. 특히, 남녀 간의 애정 문제는 더 더욱 그렇지요.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시나요? 그렇다. 다섯 살 배기 승주 누님도, 열 살 배기 승주 누님도 모두가 하나 같이 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그냥 뿅 가 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바로 그랬던 것처럼. 1976년 중학교 2학년 때 흑백 바보상자 속의 승주 누님 모습을 처음 보고, 단숨에 뿅 가 버리고 말았던 것처럼. 그래서 신나냐고? 당연히 신난다. 아니, 신나는 정도가 아니라 벅찬 희열감마저 느껴지고, 감격의 눈물마저 마구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눈물이 줄줄 흘러넘치고 있는 중이다. 다섯 살 배기 승주 누님 앞에서 대책 없이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어머 오빠! 갑자기 왜 울어?”
“승주야! 이 오빠 울어!”
“왜 그러지?”
“왜 그래요?”
“......?” (승주)
그래요 어린 누님들! 이 동생은 지금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해서 울고 있는 거랍니다. 우리 승주 누님이 저렇게 이 동생을 많이 좋아 해 주고, 부끄럼까지 타 주는 모습이 정말 행복하고, 또 뿌듯하고 그래서 이렇게 사나이 눈물을 마구 흘려내는 거랍니다.
“아니야 얘들아! 나 우는 거 아니야! 갑자기 눈에 티끌이 들어가서 그러는 거야.”
“아니야! 거짓말! 눈에 티끌이 들어간 거 가지고,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은 없단 말이야. 승주야 그렇지?”
끄덕끄덕! (승주)
고마워요 승주 누님! 그렇게 누님이 인정을 해 주시니, 이 동생은, 아니 누님의 어린 애인은 정말 가슴이 저미도록 행복하기만 하답니다. 딱! 파!
“아니라니까 그러네. 정말로 눈에 티끌이 들어가서 그러는 거야. 나는 원래 눈에 뭐가 들어가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더 눈물이 많이 흘러나오거든!”
“정말 신기하다. 저기 그럼 오빠, 내가 오빠 눈에다가 호! 해 줄까요?”
아니요 조금은 안 생기신 누님 어린이 그대 말고요. 기왕이면, 저기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우리 승주 누님 어린이가 호! 해 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미안해요 조금은 안 생기신 누님 어린이님! 딱! 파!
“그러지 말고, 승주가 한번 호! 해 줘 볼래? 승주가 입이 커서 바람이 더 셀 거 같은데?” (기대감 가득 찬 화상의 들뜬 목소리)
“깔깔깔! 이 오빠가 승주 입 크데!”
“킥킥킥! 승주 입 안 큰데......”
“큭큭큭! 그럼 입 큰 승주 너가 한번 호! 해 줘 봐! 이 오빠 지금 너한테 호! 해 달라잖아?”
“까르르!”
“너희들 정말 사람 자꾸 놀릴 거니?”(승주)
알아요 승주 누님! 누님 입 안 크다는 거!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누님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접고, 이 동생을, 아니 애인을 마음 편하게 대해 줄 것 같아서.
“그럼 어디 좀 봐요!” (승주)
아, 고마워라. 우리 승주 누님, 드디어 부끄러운 마음을 극복 했군요.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누님의 고사리 같이 작고 부드러운 그 손이 이 애인 동생의 얼굴에 가만히 닿아오고, 또 달콤하고 향긋한 그 고운 숨결마저 이 애인 동생의 눈 속을 부드럽게 스칠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이 어린(?) 애인 동생의 가슴은 지금 하염없는, 끝도 없는 희열감에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랍니다. 딱! 파! 화상, 어째 또 속이 좀 느글거려올라고 그러는 것 같다. 니가 어째 혜은이 애인이냐? 애인은커녕, 너 혼자 일방적으로 혜은이를 짝사랑하고 있는 거지. 짜샤! 나도 알어!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애인 하면 되잖어! 그러니 제발 조용! 쉿! 얼렐레? 이 화상, 이거 완전히 맛이 갔구먼? 짜샤야! 지금은 제발 응? 그래 이 자식아! 불쌍한 녀석! 얼마나 혜은이한테 미쳤으면, 나 갈구는 일까지 잊고서 이러고 있는 겨? 중증이여 중증! 알았다. 내가 꺼져주지! 후다아아다아다악! 그래도 빼앗기기가 싫네. 화상 저 자식한테 우리 혜은이 애인 빼앗기기가 싫어 흐어엉! 흐어엉!
후우우! 후우우! 후우우! (승주 누님 화상 눈에다 대고 입술 바람 연신 불어 넣어주고 있는 소리)
아, 승주 누님의 보드라운 입술 바람이 이 애인 동생의 눈알을 마구 간질이고 있어요. 영원히! 영원히! 언제까지나 이렇게 이러고 있을 수만 있다면. 딱! 파!
“근데 말이에요 오빠! 눈깔 속에 아무 것도 안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래요 누님! 당연하지요. 처음부터 이 애인 동생의 눈깔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그냥 더 조금만 불어주세요. 이 애인 동생, 정말 이대로 누님의 그 고운 숨결을 영원히 눈깔 가득이 느껴보고, 또 간직 해 두고 싶어요. 딱딱! 파파!
“아니야! 조금만 더 불어줘 봐! 눈 속에 돌이 낀 것처럼 계속 불편한데 뭐!” (조바심 가득한 화상 목소리)
“승주야! 이번엔 내가 한 번 호! 해 줘 볼까?”(애가 단 승주 누님 친구중의 한 사람)
으이고 승주 누님 친구중의 한 사람아! 자꾸 그렇게 눈치 없이 나서지 말라니까요? 누가 승주 누님 친구중의 한 사람한테 호! 해 달라고 했어요? 좀 안 생겼으면, 자중 좀 하시라구요! 딱! 파!
“아니야 됐어! 내가 좀 더 해 볼 게!”(승주 누님)
아, 고맙습니다. 승주 누님! 이 애인 동생, 정말 감격입니다. 누님이 그토록이나 이 애인 동생을 생각 해 주고, 아껴주시다니요. 꺼이꺼이!
후우우! 후우우! 후우우! (승주 누님 다시 또 입술 예쁘게 오므리고 화상 눈깔 속에다 보드라운 숨결 마구 불어 넣어주고 있는 소리)
아! 황홀해! 그리고 나 말이야 지금 드디어 승주 누님의 코끝에서 희미한 점 봤다. 그랬구나. 그토록 매력적인 코 끝 희미한 점이 이렇게 어릴 때부터 존재하고 있던 거구나. 그나저나 앙증맞은 이 입술 이거 어쩔 거냐. 아! 미치겠다 정말! 승주 누님아! 이 애인 동생, 누님 때문에 그냥 돌아가실 것 같아요. 이렇게 황홀하고 행복해도 되는 건가요? 딱딱! 파파!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르!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르!
아아악! 안 돼! 제발 반지야! 제발! 아아아! 안된다. 안된다니까! 아아아! 아아아아아! 딸꾹!
크흐흐흐흐! 꺼으으으으! 승주 누님아! 승주 누님아! 흐흐흐흐흑! 승주 누님아!
결국 또 이렇게 되고 말 일이었는가? 좋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면, 내 깨끗이 포기 해 주지. 그렇다면 반지 너 이 자식! 이번엔 또 나를 어디로 데려 가고 있는 것이냐? 내 사랑 열 살 배기 승주 누님을 저렇게 내 팽겨 쳐 두고, 또다시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것이냐? 혹시 너 지금 열다섯 살 배기 승주 누님에게로 나를 데려가고 있는 것이냐? 그런 것이냐? 그래 좋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어서 그리로나마 데려다 다오! 아아아! 승주 누님아, 기다려 줘요. 여기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당신에게로 총알처럼 달려가고 있답니다. 오! 나의 사랑 그대여! 오, 나의 사랑 나의 여신 그대여!
김승주 둘
어떤 먼 인연이 그대를 불러왔는가.
어떤 큰 인연이 오로지 그대로만 향하게 하는가.
고래 심줄만큼이나 질긴 우리의 인연
피아노 강선 줄만큼이나 억신 우리의 인연
날이 가고, 해가 가도
오로지 그대만이 나의 전부인 것을
오로지 그대만이 나의 온 의미인 것을
눈을 뜨고, 눈을 감아도
오로지 그대만이 나의 온 세상인 것을.
오로지 그대만이 나의 온 우주인 것을.
사랑하는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나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하염없이
김승주 그대만을 부여잡고 절규하노라.
나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사무치도록
김승주 그대만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노라.
(김승주에 미친 어느 고삐리 소년의 일기장 넋두리 내용 중에서)
반지야, 여기는 또 어디니? 그렇구나. 우리 승주 누님이 졸업한 그 여학교구나. 아니, 지금은 내가 과거로 회귀 해 있는 것이니, 지금도 이 학교에 승주 누님이 다니고 있겠구나. 그런데 왜 승주 누님이 안 보이는 거지? 제주도에서도 그렇고, 선화국민학교에서도 그렇고, 매번 친구들하고 함께 있던 승주 누님을 직접 보았었는데, 지금은 왜 아무도 보이지가 않는 것이지?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승주 누님만 안 보이고, 다른 여학생들만 미어터질 듯 눈 가득이로 들어오는 거지? 그랬다. 까마귀 깃털같이 너무도 특색이 없는 시커먼 색상의 여학교 교복-남학생 교복과 여학생 교복을 무론하고, 일제시대의 잔재가 짙게 배어 있는 교복이기에-성장 차림의 수많은 여중학생들이 저 작은 언덕길을 시끌벅적 몰려 내려와 교문 밖으로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반지 이 녀석이 나를 여기다 데려다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럴 것이다. 방과 후 집으로 향하는 승주 누님을 따라가서 말을 걸어 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고맙다 반지야! 너의 그런 깊은 배려를 모르고, 괜히 원망을 했구나. 물론, 열 살 배기 승주와 그렇게 생이별(?)을 하게 한 것은 아주 많이 서운하지만 말이여!
아,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왜? 쉿! 저기 누님이 보이고 있잖어. 그것도 여럿이 어울린 채로가 아니라 누님 혼자서 단출하게 말이여. 아, 책가방의 무게를 못 이기고서 몹시 힘들어하는 저 모습이라니.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네. 게다가 책가방 든 손 쪽으로 몸이 약간 기우뚱 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에고 불쌍한 우리 누님! 내가 대신 들어 줄게요. 딱! 파! 화상, 자중하고! 알았어 짜샤!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여!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내가 왜 모르겄냐. 그나저나 어쩌면 저리도 어여쁠까. 이제야말로 열아홉 처녀 시절 때의 그 모습이 조금씩 얼비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열아홉 처녀 시절 그 때의 모습이. 바로 저 얼굴 저 모습으로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열창하며 가요계에 혜성 같이 등장한, 아니 등장하게 될 우리 승주 누님. 비록, 까마귀 깃털 색의 뻔 때 없는 여학생 교복이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과 미색을 퇴색 시켜 버리려 극구 기를 써 대고 있지만, 그런 하찮은 방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오히려 더 저렇게 눈이 부시게 더한 광휘를 발산 해 내고 있는 우리 누님의 저 눈부신 미모라니. 아, 아름답다. 귀엽다. 깜찍하다. 사랑스럽다. 깨물어 먹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미치겠다. 나 정말 이대로 돌아버릴 것 같다. 아, 자연이 성취 해 낸 저 미의 결정체를 보라. 이 세상에서, 아니 온 우주에서 저 보다도 더 아름답고,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재차 언급하지만,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공주미, 공주희, 장희정 같은 존재들조차도 김승주 앞에서만큼은 그저 작은 촛불 빛의 의미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까지 이 소설을 읽어 오신 분들이라면, 내가 그녀들을 그 얼마나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김승주와 비교가 들어갔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의 그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여신 급 미모조차도 조금은 퇴색된 의미로 격하 시켜 버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내가 그 얼마나 오랫동안 김승주를 사무치도록 그리워 해 왔는지를 아신다면 이런 내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로부터 시작해서 자그마치 5년여의 성상이었다. 5년여의 세월이 지나도록 그녀를 향한 절대 흠모의 감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녀를 향한 이 애끓는 심정을 되잖은 시(詩) 나부랭이에 담아서 그 얼마나 피 토하게 외치고, 또 외쳐 왔던지를 기억들 해 보시라. 어찌 보면, 처음 공주미와 공주희와 장희정과 유진숙과 김혜린등이 내 여자가 된 까닭 역시도 오롯이 김승주 그녀 하나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승주를 향한 간절하고도 애끓는 오랜 염원이 그대로 하나의 피맺힌 기운 덩어리로 화하여 단숨에 그녀들의 마음속에서 활활 불 타 올라버린 까닭도 있다는 말이다.
아, 기어코 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대책 없이 마구, 마구 흘러내리고 있다. 내 곁을 스쳐 지나는 수많은 여학생들이 몹시 놀란 눈길로 내 모습을 흘끔거리고, 또 기웃거리고 있다. 도대체 너 같이 잘생긴 남학생이 왜 그렇게 계집애처럼 길 한가운데서 징징거리고 있냐는 듯이.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 뭐가 서러워서 그렇게 자꾸 징징거리고 있냐는 듯이. 아! 그런데 독자 여러분! 지금 저 모습이 보이시나요. 승주 누님이...... 승주 누님이...... 아, 나의 사랑 승주 누님이...... 에그 답답 혀! 화상, 너 그렇게 자꾸 뜸 들일 껴? 이러다 독자들 애간장 다 터져 나가겄다. 알어 짜샤! 나도 그걸 노리고 있는 겨! 그래야 소설적 재미가 더 배가되어지는 법이거든! 딱! 파!
그랬다. 마치 다섯 살 배기 승주 아가처럼, 마치, 열 살 배기 승주 어린이처럼, 열다섯 살 배기 승주 소녀 역시도,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열심히 열창하던 혜은이 처녀의 바로 그 모습으로, 또 그렇게 나를, 내 얼굴을, 내 모습을 열심히, 정성스럽게, 골똘히 잘 지켜 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가던 걸음까지 우뚝 멈춰 세운 채로, 젓가락 같은 뽀얀 두 종아리를 귀엽게 가위자로 엇갈려 세운 채로. 아, 오로지 나 하나 때문에. 아, 오로지 나 하나 때문에 누님이 저렇게...... 누님이 저렇게...... 정신을 잃고. 나한테 홀딱 빠진 채로 저렇게! 딱! 파!
황홀하다! 너무도 기쁘고 행복해서 이대로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다! 자, 그러니 힘을 내보자 허수창! 너는 더 이상 하찮고 평범한 고삐리가 아니다. 천하의 김승주마저 저렇게 번번이 너를 볼 때 마다 첫눈에 뿅 가 버리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너는 말 그대로 한 도시의 암흑가를 쥐락펴락 하는 엄청난 존재가 되어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도 너는 왜 이렇게 바보처럼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냐? 도대체 바들바들 떨기는 왜 떠는 것이냐? 도대체 너 왜 이러는 것인가? 정신 좀 차려 보라니까 허수창! 심호흡이라도 좀 한번 해 봐라! 에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겄어. 당최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 한 강렬한 이 심장의 고동소리부터가 멈춰지질 않는다 이 말이여. 그나저나 나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겨? 그토록 내가 갈구하던 승주 누님이 바로 저 앞에서 너무도 해맑은 눈길로 나 하나만을 오직 나 하나만을 뚫어지게 응시고 있는 디? 이럴 때는 내가 먼저 누님을 향하여 반가운 웃음이라도 지어 주어야 하는 게 정상 아녀? 하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어 준다는 것 자체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란 말이시. 아무 때나 마음먹은 대로 자유자재로 웃음이 지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시. 특히, 내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더 더욱 그런 희한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거여.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겪어왔던 일이여. 도대체 이런 못난 심리 현상은 왜 자꾸 생겨나는 것이여? 그려, 지그문트 프로이트여. 칼 구스타프 융이여. 그 사람들을 열심히 파보는 수밖에 없는 겨.
아, 승주 누님이 드디어 젓가락처럼 가는 두 다리를 사뿐사뿐 내 저으며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발그레해진 두 볼엔 보일 듯 말 듯 여린 웃음기마저 아련히 감돌고 있다. 그런데도 이 등신 같은 자식! 승주 누님은 저렇게 자신감 있게 행동을 개시했는데, 너란 녀석은 사내자식이 되어 가지고 왜 이리 발발 떨고만 있는 겨?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장장 5년 동안을 저 여자 때문에 까맣게 타 버린 네 속을 생각 해 보라 이 말이여. 수창아, 제발 용기를 내 보라니까! 너, 여기서 용기를 못 내고 승주 누님을 이대로 스쳐 보내 버리고 말면, 너는 더 이상 불알달린 사내자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겨. 불알이고, 잠지고, 다 떼어 버려야 하는 겨.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닦달 좀 하지 말어. 나도 지금 최선을 다 하고 있단 말이여. 그래, 용기를 내 볼껴! 승주 누님이 나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내게 뿅 가 버린 모습을 보이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 말이여. 그래, 말을 걸어 봐야지. 남자인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봐야지. 그런데 말이여. 아무리 오랜 세월 가슴 시리게 짝사랑을 해온 여자라고 해도, 누님 입장에서는 내가 초면 아닌가 이 말이여. 그런 여자에게 다짜고짜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하냐 이 말이여. 평소 알고 지내던 여자 같으면, 할 말이야 많겠지만 말이여. 에휴! 등신아! 당연하지. 너는 허구 헌 날 바보상자를 통해서 누님을 봐왔지만, 누님은 너를 처음 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이 말이여. 또 반지의 힘을 빌어 만나 본 다섯 살 배기 승주, 열 살 배기 승주는 지금의 이 열 다섯 살 배기 승주하고는 또 다른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한 겨. 말하자면, 그 승주가 이 승주가 아니라 이 말이여.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간 모르간? 안다니까 그러네.
아, 승주 누님이 결국 멈칫 멈칫 내 곁을 스쳐 지나고 있는 중이다. 정말로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 바보야! 제발 나한테 말 좀 걸어 줘! 하는 그런 표정으로. 알았어요 누님! 나, 정말 이대로 누님을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다니까요. 아아아!
“저! 저......기, 잠깐만요 하 학생!”
우뚝!
에그, 학생이 뭐여! 미안합니다. 누님! 사랑하는 당신한테 어쩔 수 없이 학생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네요. 그렇다고 아가씨라고 부를 수도 없고 말입니다. 또, 김승주씨라고도 할 수 없잖아요.
“네?”
아, 목소리 아름답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저기 자 잠시 마 말 좀 있으면, 나 나 하고 시 시간 좀 나 나눌 수 있을까......요?” (화상 긴장으로 사정없이 말 뒤집어 까고 있는 소리)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아흑 누님아! 누님 목소리 때문에 나 정말 기절할 것 같습니다. 미치겠다니까요.
“저기, 특별한 일이 따로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멀리서 학생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잠깐이나마 대화라도 나눠 보고 싶어서......”
오호! 이게 웬 일이여? 갑자기 내 입술에 참기름이라도 돌려진 건가? 휴! 다행이다.
“.......”
그나저나 너무 솔직한 발언이었을까? 누님이 살짝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도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처음 접근하는 수없이 많은 수단 중의 하나이긴 하다. 이른 바 정공법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서 급격히 여자의 마음을 휘어잡는 수단 말이다. 반지 이 녀석이 언제 어느 때 또 훼방을 놓을지 모르니, 최대한 서둘러서 누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야 하니 말이다. 다음에 또 돌아와서 그런 기회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 땐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지금 이 순간, 이토록 마음이 설레는 순간을 최대한 만끽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에 또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지금 이 소중한 순간을 헛되이 보내 버릴 이유 역시 없지 않은가 이 말이다.
“안 되나요? 혹시, 집에 바쁜 일이라도 있어서 그래요?”
“아 아니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요 누님! 나도 잘 압니다. 누님의 마음 상태는 지금 결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나 같아도 그런 마음일 겁니다. 내가 여자라고 해도 나처럼 멋있게 생긴 남학생이 구애를 해 오는데, 어떻게 감히 뿌리치고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딱! 파! 화상, 잘난 척 그만! 더 이상 못 봐 주겄다. 짜샤! 너도 보고 있다시피 거짓말 아니잖냐? 승주 누님도 지금 나한테 홀딱 반해 있는 거 너는 안 보이냐? 휴! 보인다 화상, 나는 정말 니 녀석이 부러워 미치겠다. 결국 이렇게 너한테 혜은이를 빼앗기고 마는 것인가? 짜샤 너 이 새끼! 죽을래? 그래, 화상아! 나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결코 혜은이를 잃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꺼으으! 짜샤! 너 이따가 죽여 버린다? 알았어 임마! 니 원대로 가만히 찌그러져 있을 게. 계속 잘 해 봐라. 꺼으으! 혜은씨! 저 새끼가 정말!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주제에 어디서 승주 누님을 탐내고 있어? 혜씨라는 성씨에 은이라는 이름을 가명으로 쓰고 있는 것인디 혜은씨가 뭐여? 은이씨라면 몰라도. 어쨌거나 혜은이는 가명이고 김승주가 진짜 이름이란 말이여 이 새끼야!
“그러면 잠깐만 시간 좀 내 주세요. 그래 주는 거죠? 네?”
끄덕끄덕!
얏호! 꿈이냐 생시냐? 그래, 꿈이라고 해도 좋고, 생시라도 해도 좋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황홀하고, 짜릿하고, 영광스럽고, 보람 있고, 뿌듯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째지고, 따봉이고, 뷰리풀이고,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던 때가 또 언제 있었던가. 그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외래어를 함부로 남용하는 행위도 너그러이 용서를 해 줄 수 있다. 이 보다 더 신나는 순간이 또 어디 있다고, 외래어 남용 따위를 가지고, 내 자신을 구박할 수 있단 말인가. 별님, 정말 고맙습니다. 반지야, 정말 고맙다. 다만, 승주 누님과 충분히 가까워 질 때까지 제발 시간의 압박이라고 하는 심술만은 제발 멈추어 주렴! 제발 부탁이다 반지야. 너의 주인으로써, 이렇게 간절히 부탁한다. 아니, 명령 한다. 꼭 그래 줄 거지 반지야? 사랑해!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르!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르!
아아악! 안 돼! 제발 이러지마! 안 돼! 안된다니까! 안된단 말이다 이 개새끼야! 아! 안된다니까! 흐흐흐! 승주 누님아! 승주 누님아! 제발! 제발! 크흐흐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렇게 잔인할 수가! 반지 너 이 새끼!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겨? 너 이럴 바에는 도대체 왜 내 반지가 된 겨? 무엇 때문에 내게로 와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구 이 개새끼야! 별님! 아니, 별이 너? 너 뭐여? 너 따위가 뭔데 나를 이렇게 계속 농락해 대는 겨? 선물을 주려면 제대로 된 걸 줬어야 할 거 아녀? 이건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사람을 계속 가지고 노는 거여 뭐여? 별이 너? 대답 좀 해 보라니 께! 대답 좀 해 보라니 께 이 김승주 얼굴을 사칭하고 있는 사이비 김승주 외계인아!
크흐흐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승주를 닮은 별님아! 미안하다 반지야! 너무도 허탈해서,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지랄발광을 하고 말았군요.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슬프고, 답답하고, 애달프고, 아쉽고, 섭섭한 것은 사실이라고요. 나 정말, 중학교 3학년짜리 우리 승주 누님하고, 잠시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었다고요. 아니, 욕심 같아서는 서로 뜨겁게 사랑의 입맞춤을 나누어 보고도 싶었다고요. 그런데 왜 그걸 못하게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거냐고요? 왜 그걸 못하게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냐고요? 내가 전생에 무슨 크나큰 죄업을 지었다고 이러냐고요? 크으으으으! 승주 누님도 나한테 강한 호감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는데...... 승주 누님도 역시 나한테 온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는 중이었는데...... 꺼으으으!
혜은이
어린 소년의 눈으로
자연이 선사한 미의 응결체를 보다.
어린 소년의 가슴으로
우주의 기운이 모여 완성 된
최상미의 결정체를 껴안게 되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
점점이 이어지는 아픔.
그리고 한 해, 두 해, 석 삼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슬픔.
어디 먼 데서 컹컹 개 짖는 소리
끝도 없이 고적한 가을밤인데.
어디 먼 데서 싸아 치달아오는 바람소리
끝도 없이 쓸쓸한 가을밤인데.
(김승주에 미친 어느 중2소년의 과거 일기장 넋두리 내용 중에서)
그나저나 여기는 또 어디? 반지 너 이 녀석! 나를 또 어디로 데려 온 거여? 음! 열다섯 살 승주 누님을 만나게 해 주었으니, 이젠 또 스무 살 승주 누님한테로 데려 온 겨? 그런 겨? 그래 좋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스무 살 승주 누님이라도 어서 만나게 해 주라. 아니, 스무 살 승주 누님을 어여 만나고 싶다. 간절히 만나고 싶다. 하지만 너 두고 봐라! 내가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겨! 다섯 살, 열 살, 열다섯 살 승주 누님을 몽조리 다시 만나서 반드시 손이라도 꼭 잡아주고 말 겨! 아니, 그녀들을 다시 만나서 이 뜨거운 가슴 안에다 그 사랑스러운 작은 몸뚱이들을 폭 감싸 안아주고 말 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되게 해 볼 거란 말이여! 딱! 파! 화상, 그만 주절거리고, 저기 혜은이 나오는 거 안 보여? 응? 어디 어디? 이 화상 이거 혜은이 한테 완전히 미쳐서 이젠 눈깔까지 맛이 간 거 아녀? 아녀 짜샤! 내 눈깔 아직 성혀. 옳지! 저기다. 와아! 승주 누님이다. 저기 승주 누님이 보인다. 하아! 예쁘다! 예쁘다! 오호호호 예쁘다! 저건 정말로 살아있는 인형이여! 아아아! 눈 부셔! 짜샤야! 너도 그러냐? 나 같이 눈이 부시냐? 그래 화상아! 나도 지금 혜은이 때문에 눈이 부셔서 미치갔다. 사람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광채가 뿜어져 나올 수 있는 거냐? 아, 혜은씨! 나 좀 살려 주세요! 이 새끼! 혜은씨 아니라니까 죽어도 혜은씨네? 승주씨, 아니 승주 누님이라고 못 부르겄냐? 안 그러면 너 패 죽인다? 알았어. 그렇게 부르면 될 거 아녀. 아, 혜은씨! 이 새끼가 또? 아 알았어. 아, 승주씨! 진작에 그럴 것인지.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짜샤 너 그러다 정말로 내 손에 맞아 죽는다? 승주씨, 아니 승주 누님은 무조건 내 꺼라고 했냐 안 했냐? 했지! 그런데도 왜 자꾸 발정 난 수캐마냥 걸떡 거리고 쥐랄이여 쥐랄이? 하! 그 화상, 내가 정말로 승주씨를 빼앗는다고 했냐? 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니까 나도 모르게 탐이 나서 그냥 한 번 해 보는 소리지? 큼큼! 큼! 그 그러냐? 그래 알았다. 너 그 거짓말 진짜지? 평생 속고만 살았냐?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여? 알았다. 내 한번 또 속아 보지. 그 그건 그렇고 말이여 짜샤야! 저기 승주씨, 아니 승주 누님 곁에서 나이 지긋하니 마른멸치 같은 몰골을 해 가지고 승주 누님 팔짱을 꽉 끼고 있는 사내는 또 누구냐? 어째 낯이 많이 익는 디? 어디서 봤더라? 딱! 파! 멍청한 화상! 제발 정신 좀 차려! 저 분이 바로 길옥윤 작곡가잖어! 승주씨를 그리도 좋아한다는 놈이 길옥윤 작곡가도 못 알아보는 겨? 오호 그렇구나! 잠시 깜빡 했다야. 승주 누님 때문에 하도 정신이 없어서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벼! 그나저나 짜샤야! 여기가 대체 어디여? 왜 승주 누님이 저런 집에서 길옥윤 작곡가하고 같이 팔짱을 끼고 나오고 있는 겨? 화상, 너 정말로 승주씨 좋아하는 거 맞긴 한 겨? 여기가 바로 길옥윤 작곡가 집이잖어. 문패 안 보여? 한자 글씨로 정확히 길옥윤이라고 문패에 따박따박 새겨져 있잖어. 어디? 오! 정말 그러네? 정말로 길옥윤이라고 따박따박 새겨져 있네. 미안하다. 미처 못 봤다. 그런데 말이여 짜샤야! 내 말인즉슨 문패는 문패고, 정작 우리 승주 누님이 왜 길옥윤씨 집에서 길옥윤씨 하고 팔짱을 같이 끼고 나오냐 이 말이여? 길옥윤씨가 아무리 승주 누님한테 좋은 곡을 많이 주고, 인기 가수로 키워준 스승님인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그거고, 사적으로는 엄연히 승주 누님하고 어느 정도 내외를 두고 지내야 하는 외간 남녀 사이가 아니냐 이 말이여. 어떠냐? 내 말이 틀렸냐? 듣고 보니 그러네. 시집도 안 간 새파랗게 젊은 처자가 외간 사내의 집에서 같이 나온다? 그것도 둘이서 마치 연인사이라도 되는 양 팔짱까지 꽉 끼고서 말이시? 거참 이상하네. 그렇다면 혹시 그 소문이 정말 아닐까? 그 소문이라니? 뭔 소문 말이여 짜샤? 화상아, 너 왜 이러냐? 분명히 너도 알고 있을 거여. 그런데 왜 모르는 척 하는 겨? 내가 뭘 짜샤? 어허!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길옥윤 하고 혜은이 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세간의 입소문 말이여. 이 새끼가 정말로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그거 말짱 다 헛소문이여 짜샤! 한마디로 조작된 거라 이 말이여 짜샤! 우리 승주 누님처럼 고결하고 순결한 여자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이 말이여. 에게게! 화상 니가 그걸 어떻게 알어? 직접 보지도, 겪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 할 수 있어? 저렇게 둘이서 몸까지 착 밀착시키기까지 하고 있는 디 말이여. 그건 말이여 짜샤! 길옥윤씨가 제자를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스승의 마음으로써 그러는 거여. 옛날엔 다 그랬어. 나도 중학교 때 국어 담당 꼰대가 수시로 나를 교탁 앞으로 불러내서는 고놈 참 잘 생겼다 하고 불알을 주물떡 주물떡 떡고물 주무르듯이 해 주었던 적이 있었단 말여. 그게 다 스승으로서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거란 말이여. 흠! 그거 제자 성추행 아녀? 화상, 너 아무래도 그 국어 담당 꼰대한테 성추행 당한 것 같은 디? 미친 소리 작작 혀 짜샤! 아무튼, 확신이고 나발이고 간에 그건 말이여. 바로 이 반지 때문이여. 이 반지가 있기 때문에 다 아는 수가 있는 거여. 에게게! 거짓말치지 말어. 화상 니가 언제 길옥윤 하고 혜은이 불륜 현장을 감시하러 갔었다는 겨? 너 이번이 처음이잖어. 내가 다 아는 디? 이 새끼가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그런 일 없었다니께 자꾸 불륜 불륜 할텨? 숨통을 못 쓰게 해 줘? 아 알았어. 안 하면 될 거 아녀! 짜샤야! 내가 말이다. 너 몰래 혼자서 과거로 갔었다 이 말이여. 나도 그게 정말로 궁금해서 말이다. 정말로 우리 승주 누님이 세상 소문대로 길옥윤씨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직접 확인을 해 보러 말이여. 물론, 이 소설에서는 소개가 안 된 내용이지만서두. 아무튼 그래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거다 이거여.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 이거여. 단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거여. 그 그러냐? 그거 참 신기하네. 화상 니가 나를 떼어 놓고, 혼자서 과거로 회귀를 한 일이 있었다고? 너 하고 나는 딴 마음 한 가지 몸통인디? 그렇다면, 정신하고 몸뚱이가 몽땅 따로따로 놀았다는 뜻인 디, 정말 희한하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겨? 그러니까 요술 반지 아니냐? 천일야화 속에 등장한 요술등잔 보다도 더 진기한 물건이라 이거여! 흠! 정말 신기 하네 그 반지......
(흐흐흐! 짜샤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 다 거짓뿌렁이다. 사실은 그런 일 없었다. 또 굳이 그런 걸 직접 확인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지. 결코, 절대로 우리 승주 누님은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할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또, 길옥윤씨 역시도 그런 짓을 대놓고 할 사람이 못 된다는 사실을. 척 보기에도 도저히 그럴 사람들이 아니거든. 물론, 중학교 때 내 국어담당 꼰대는 정말로 딴 마음을 먹고, 나를 성추행한 거는 분명하지만 말이여. 한마디로 변태였다 이 말이시. 그러나 말이여. 길옥윤씨 하고 승주 누님 사이는 절대로 그런 사이가 아니란 걸 확신할 수 있다 이거여. 내가 말이여! 호정무를 연마하다 보니까 사람의 관상 보는 법도 자연스럽게 터득이 되더라 이거여! 소위 말하는 도사(道士)의 도력(道力) 비스무리 같은 거 말이지. 그러고 보면, 옛날 사람들 뻥 하나는 알아 모셔야 혀. 몇 십 갑자의 내공을 가진 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깊디깊은 심산유곡에 혼자 쳐 박힌 채, 수십 년 면벽수도를 해야만 한다느니, 설한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도 옷을 죄다 훌훌 벗어부치고는 쏟아지는 차가운 폭포 물을 몇 시간씩 온 몸으로 뒤집어 써야 한다느니, 허풍들을 술술 떨어대는데, 그게 다 말짱 헛소리였더라 이거여! 나만해도 그려! 동명중학교 운동장에서 달랑 하루 한 시간씩, 그것도 빼 먹는 날이 더 많게 호정무 수련이란 것을 설렁설렁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가니까 그런 능력이 자연스럽게 터득이 되더라 이 거여. 또, 판소리 하는 사람들도 그려. 그 사람들 수리성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똥물까지 꾸역꾸역 퍼 먹어야 한다는 둥 허풍들을 떨어대지만, 그게 다 말짱 헛소리였더라 이거여. 실제로 고금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도 진짜로 똥물을 퍼 먹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믿을만한 모 판소리 명창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여!)
화상, 너 지금 뭐하냐? 무슨 생각을 그리 혼자서 골똘히 하고 있는 겨? 나 하고 노는 게 재미없어서 그러냐? 그려 짜샤! 너 하고 노는 거 재미없어서 그런다 왜? 하여튼 심술 하나는 알아주어야 한다니 께! 그러지 말고 화상아, 정신 좀 차리고 저기 좀 한번 봐 봐! 뭘 짜샤? 거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내 애인이 딱 현신 해 있다는 거 이미 나도 다 알고 있는 디 짜샤!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화상아! 헉! 누 누님이? 그랬다. 혜은이가, 아니 우리 승주 누님이 또 또다시 내게로,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게로만 예의 그 투명하고 맑은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마구마구 쏘아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곁의 길옥윤씨가 연신 무슨 말인가를 승주 누님 귓속에다 속삭여 주고 있었지만, 승주 누님은 분명히 스승의 그 말을 잘 새겨듣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로지 그녀의 관심사는 새로 눈에 번쩍 뜨인 대상, 바로 그 대상 쪽으로만 완전히 몰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완전한 몰입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굳이 여기서 입 아프게 반복 하지 않겠다. 여러분들도 진작 다 눈치를 채시고 있을 테니 말이다. 딱! 파! 화상, 제발 그 잘난 척 좀 그만! 그렇지 않아도 화상 너한테 혜은이를 빼앗겨서 마음이 심란한데, 이건 뭐 노골적으로 약까지 올려대는 거여 뭐여? 그래, 짜샤 니 심정 나도 이해 혀! 하지만 어쩌겄냐? 승주 누님은 저렇게 번번이 나한테다만 관심을 가지곤 하니 말이여. 벌써 몇 번씩이나 그랬잖냐. 다섯 살, 열 살, 열다섯 살, 스무 살 승주 모두가 다 그렇게 말이여. 아무래도 승주 누님은 나같이 생긴 사내를 천성적으로 좋아하는 성벽이 있는 가 벼!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말이여! 말하자면, 승주 누님과 나는 말이여. 천생연분 거 뭐시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는 거여 짜샤! 그러고 보면, 짜샤 너는 굳이 마음 상해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여! 아니 뭐여? 화상, 너 지금 말 다했어? 짜샤야! 마냥 그렇게 골만 부리지 말고, 내 말 좀 한번 들어봐라. 짜샤 니가 누구냐? 니가 아무리 죄 없는 내 호박 통을 밥 먹듯이 딱딱 거려대도, 너 또한 결국은 이 허수창이의 정신과 몸뚱이에 속한 한 통가지가 아닌가 이 말이여. 말하자면,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거 말이지. 내 말 틀렸냐 맞았냐 짜샤? 틀렸으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딱 부러지게 말 좀 혀 봐라! 그 그게...... 트 틀린 말은 아닌 디..... 흐흐흐! 짜샤 너 이 자식,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이젠 더 이상 부정할 수도 없지? 그러니 말이여 짜샤! 너는 이제부터 말이여. 무조건 나를 축하 해 주어야 한다 이 말씀이여. 같은 한 통가지인 내가 잘되는 일이라면, 짜샤 너 역시도 매사에 군소리 없이 축하를 해 주고, 또 응원도 해 줘야 한다 이 말이여. 승주 누님 문제만 해도 그려! 승주 누님이 저렇게 허수창의 지킬박사를 아주 많이 사랑 해 준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허수창의 하이드인 짜샤 너 역시도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고, 기뻐 해 주는 게 바른 도리라 이 말씀이여. 너 하고 나 하고 결국은 한 정신 한 몸뚱이를 같이 공유하고 있는 한통가지니께 말이여. 알간? 모르간? 흥! 이건 뭐 바른 말만 딱딱 해 대니, 뭐라고 대꾸할 말도 없고. 정말 미치갔네. 알았어 화상! 내 그렇게 되도록 노력 해 보지! 고 자식! 말 하나는 고분고분 잘 듣는단 말이여! 아무튼, 짜샤 니가 그래만 주면 정말 고마운 일이지. 그나저나 나 지금 뭐 하고 있냐? 승주 누님이 또 저렇게 나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디, 나한테 뿅 가서 저렇게 뜨거운 눈길까지 팍팍 날려 주고 있는 디, 언제까지 이렇게 짜샤 너 하고의 농담 따먹기에만 열중 해 있어야 하는 겨? 그건 안 되지. 반지 이 녀석이 또 훼방을 놓기 전에 얼른 승주 누님과의 일부터...... 빨리 진척시켜서...... 근데 말이여. 아무래도 이상 혀! 이쯤이면, 분명히 반지 이 녀석이 심술을 부려댈 때가 된 것 같은 디 어째 조용 하다냐? 아하! 그렇구나! 반지 이 녀석이 이제 보니, 내가 승주 누님하고 딱 대화를 시도하려고 할 때, 그 틈을 노려서 잽싸게 훼방을 놓아보자는 꿍꿍이구나? 음! 틀림없구먼! 하지만 말이여. 나도 더 이상은 반지 니 녀석의 그런 심술에 마냥 속상해 하지 만은 않는다 이거여. 반지 니 녀석이 그렇게 마구 심술을 부려대도 나의 이 김승주를 향한 피 끓는 사랑의 열정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을 거니께.
“저기 혹시 혜은이 누님 아니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누님의 노래를 정말 사랑하는 학생입니다. 이런데서 이렇게 누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화상의 문풍지처럼 떨려나오는 급해진 목소리)
아니, 누님의 노래 이전에 누님 자체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 그러니 어서 대답을 들려주세요. 반지 이 녀석이 훼방을 놓기 전에 말입니다. 누님, 나는 지금 다 알고 있어요. 누님이 나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뿅 가버리고 말았다는 그 사실을. 다섯 살 배기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열 살 배기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열다섯 살 배기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 사실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답니다. 그 얘기를 당신에게 들려줄까요? 간절히...... 절실히...... 그런 사실을 당신에게만 들려 줄 까요 누님? 아, 이렇게 실제로 누님의 스무 살 시절 모습을 보니, 눈이 부셔서 현기증이 다 날 것 같군요. 흑백 바보상자 안의 당신모습 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당신의 이 모습을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죽도록 사랑합니다! 정신없이 사랑 합니다 그대여! 아, 나의 아름다운 미의 여신이여! 아, 나의 아름다운 수호 여신이여! 저에게 명령을 내려 주세요. 나를 위하여 어서 죽어 달라고! 그러면 기꺼이 당신을 위해서 이 자리에서 푹 거꾸러져 죽어 드리겠습니다! 아,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 영원한 나의 미의 여신아! 혜은이! 김승주! 승주씨! 승주 누님! 아아아! 빨리! 빨리! 반지 이 녀석이...... 반지 녀석이...... 훼방을 놓기 전에...... 어서! 아아아!
“반가워요. 혹시 이 동네 사는 학생인가요?”
헉! 반지 이 녀석이 왜 훼방을 놓지 않는 거지? 그나저나 누님의 아름다운 저 목소리 어떡하냐? 아아 누님! 어쩌면 그리도 목소리가 고울 수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누님! 저는 대전에 살고 있습니다. 누님이 선화국민학교, 호수돈 여자중학교, 호수돈 여자고등학교를 나온 그 제 2의 고향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오히려 더 반갑습니다. 누님, 나는 압니다. 당신이 비록, 그런 식으로 대답을 절제하고 있다고 해도, 속마음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또 압니다. 당신은 결코 지금 당신 곁에서 이 어린 동생의 모습을 매우 놀란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저 길옥윤 선생을 당신의 노래 스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써 치부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왜 그 명백한 진실을 내가 모르겠습니까? 자, 그러니 어서 또 대답을? 대답을? 아! 다시 또 늦어 버린 것인가. 그런 것인가? 크흐흐! 아! 어서 빨리 누님의 보드라운 손을 잡아 볼 수 있었으면! 아! 어서 빨리 누님의 새같이 귀여운 작은 몸뚱이를 이 넓은 가슴 안에다 폭 감싸 안아 볼 수 있었으면. 그래, 돌려라! 반지 이 녀석아! 어서 돌려 보라니까! 나는 이미 다 짐작하고 있었단 말이다. 크흐으!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
빙글빙글! 빙글빙글! 핑그르르!
너 정말 말 잘 듣는구나.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 스무 살 승주 누님아 안녕! 내 사랑 그대! 언제까지나 영원히, 당신만을,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안녕! 내 사랑! 안녕! 나의 영원한 미의 여신이여! 안녕! 안녕! 아아아! 안녕!
이로써 나는 정확히 확신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 살 배기 어린 승주 아가가 그랬던 것처럼, 열 살 배기 어린 승주 어린이가 그랬던 것처럼, 열다섯 살 배기 어린 승주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스무 살 배기 어린 승주 처녀가 그랬던 것처럼, 스물다섯 살 배기 성숙한 승주 아가씨 역시도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게 되면, 이 허수창이에게 단숨에 함몰되어 버리게 될 것이라는 그 명백한 사실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단숨에 그녀에게 그렇게 되었듯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단숨에 그녀에게 그렇게 미쳐 버리게 되었듯이.
[후원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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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남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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