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7. 09:36ㆍ허세창단편소설
[短篇小說]假設舞臺
許世昌 作
오늘도 과연 그녀가 등장 할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주인공이 등장 하지 않는 경우란 거의 없을 테니까. 마른 침을 삼킨다. 여태껏 보아 온 그 어떠한 여자보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 아, 이제는 그녀로 인하여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룰 지경이다. 하지만 그녀는 뜨내기 약장수들의 일원. 그들이 연출 해 내고 있는 가설무대의 여주인공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어린 딸까지 두고 있는 여자. 다행히(?) 남편은 없는 눈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림돌이 완전히 제거 된 것은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 바로 그녀와의 나이 차 문제다. 나는 이제 겨우 열세 살, 그녀의 나이는 최소한 스물 하고도 중반은 넘긴 나이.
딱!
“아야!”
느닷없이 머리 위쪽에서 별들이 맴돌이질을 친다.
“에이씨! 누구여?”
어른이고 나발이고 없다. 내 소중한 머리에 함부로 손을 대는 자에겐.
딱!
“아야! 누구냐니께?”
“누구긴 누구여 이눔아! 니는 귓구멍이 막힌 겨 뭐여? 대가리 낮추라는 말 안 듣기냐? 안 듣겨?”
애가 아니고 어른이었다. 그렇다면, 함부로 맞잡이 할 상대는 아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아, 낮추면 되잖어여! 왜 때려여!”
미약하나마 그렇게 작은 반항을 시도 해 본다. 나무 가지 같은 팔뚝으로 머리를 방어하는 자세까지 취해 주면서 말이다.
“아니, 이 눔의 새끼가 어따가 대고? 너 이눔 시키야. 어른 말씀이 안 듣겨? 이참에 한 번 죽도록 맞아 볼티여?”
“이씨, 말로 해도 되는 디!”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가 어른이면 어른이지 때리긴 왜 때리는가. 안 보이면 자기가 일어나서 보면 될 일 아닌가. 그리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뭐 볼 거 있다고.
“뭐여? 이씨? 아니, 이눔 새끼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야 이눔아?”
바로 이때 생각지도 못했던 구세주가 나타난다. 그것도 이 무뢰배 아저씨보다는 최소한 열 살 정도는 더 먹어 보이는 아저씨다. 게다가 덩치까지도 식장산 덩어리만큼이나 크다. 큭큭큭!
“거, 그만 좀 하지 그랴. 아직 시작도 안 했구먼 뭘 볼 게 있다고 엄한 애를 자꾸 그렇게 괴롭히는 겨. 쩝쩝!”
그러자, 무뢰배 아저씨가 홱 하고 고개를 제껴 본다. 하지만 레슬링 선수처럼 큰 몸집에다가 얼굴까지도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꼬리를 사리고 만다.
“애가 원체 버릇없게 굴어서유......”
그 모습이 흡사 서리 맞은 지푸라기 꼴이다. 흐흐흐! 쌤통.
“여기서 찾았구만. 용수 엄마! 시방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겨? 아, 밥 안 줄껴?”
옆집에 사는 용수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렇게 밥 타령을 하고 있다.
“나오셨슈? 그라지 말구유. 함께 귀경이나 하구 이따가 점심 겸 저녁으로 찬찬히 해 먹자구유. 아, 밥이야 맨 날 먹는 것이고, 이런 공짜 귀경은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것인 디.”
“아, 귀경이고 나발이고 나 배 고프단 말이여!””
급기야 용수 아버지가 투가리 깨지는 소리를 낸다.
“귀경 거리가 제법 볼만 하니께 이리 와서 좀 앉아 보시래두유.”
“아, 약장수들 쇼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가 유별나다고 이러는 겨 당최?”
그러면서도 용수 아버지는 막상 몸을 돌려세우지는 않고 주춤주춤 용수 엄마의 곁자리로 와서는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앉는다. 그때 또 다른 쪽에서 모르는 어떤 아저씨들의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늘도 또 충그릴테세구먼!”
“어째 조짐을 본 께 그럴 것도 같은디.”
“아, 언능 시작 혀! 이러다 모가지 다 빠지겄어!”
그 외침 소리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와 하고 웃음소리들을 토해 놓는다. 그 중에서도 용수 엄마의 웃음소리가 가장 큰 것 같다.
“아, 조용, 조용! 시작했어, 시작했다니께!”
하고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치자, 시장바닥 같던 웅성거림이 삽시간에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웬일로 공연이 일찍 시작되고 있었다.
사회자의 인사말에 뒤이어 첫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공굴리기 묘기를 보여주는 난쟁이 여자 단원이었다. 노란 종이우산 위에다가 빨간 공을 올려놓고는 신나게 굴려대는 묘기. 신기하게도 공은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이지만, 막상 우산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절대 없다. 저 정도까지 숙달된 모습을 보여주자면, 그간에도 연습을 괘나 많이 했을 것이다. 구경꾼들은 지금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입들을 헤 벌린 채, 정신없이 그 묘기를 감상하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공굴리기 묘기 순서가 끝나고 이번엔 마술사가 등장할 시간이다. 그런데 어째 좀 조짐이 이상하다. 갑자기 사회자가 또 등장을 해서는 슬슬 장광설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바로 만병통치약 선전 시간이다. 사회자는 다음 순서로 신기한 마술 공연이 준비되어 있으니, 자리들 뜨시지 마시고 자신의 말을 잘 경청 해 달라며, 목소리에 더 열기를 높이고 있다.
그렇게 사회자의 만병통치약 소개가 먼저 끝나고 나자, 이번엔 얼굴에 화장을 짙게 한 어린 소녀들이 나타나서는 제각기 만병통치약 상자를 한 아름씩 안아들고서 이리저리 구경꾼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저들이 바로 외발 자전거 묘기를 보여주는 소녀들이다. 희한한 것은 아무도 팔아줄 것 같지 않던 그 약 상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 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분명 가짜약이 틀림없는데, 어른들은 왜 저런 약에 속고 마는 것일까. 어찌됐든, 소녀들의 약 팔이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사회자가 약 선전에 제법 긴 시간을 할애한 것에 비하면, 순식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약 팔이 시간은 그렇게 일찍 끝이 난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무대 위에는 벌써 마술사가 등장 해 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마술 공연. 저 마술사 역시도 벌써 일주일째나 보아온 사람이라 이제는 낯이 많이 익는다. 둘둘 만 긴 종이를 순식간에 딱딱한 막대기로 변화시키는 마술, 색종이를 물이 들어있는 컵에다 꾹꾹 말아 넣었다가 다시 꺼내어 손에 쥐고는 꽃가루처럼 날려 보이는 마술, 살아있는 비둘기를 어디론가 숨겼다가 다시 손바닥위로 나타내 보이게 하는 마술, 그리고 여자의 몸뚱이가 상자 안에서 잘려 보이게 하는 착시마술, 하얀 종이를 가짜 돈으로 변신시켜 보이는 마술까지. 언제 보아도 참 재미있고 신기한 마술이다.
“허, 고것 참 재주는 재주일세. 저 사람은 말이여.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는 디. 아, 돈 떨어질 때 마다 저렇게 그냥 만들어서 쓰면 될 거 아니여.”
“호호! 그렇네유 용수 아버지.”
부부의 흰 소리에 그 곁에 바로 붙어 앉아서 연신 헤헤거리고 있던 떠꺼머리총각이 갑자기 침을 튀기며 어눌한 목소리로 소리를 치고 나선다.
“저것 다 속임수여. 암 것도 모르믄서.”
그 소리를 들은 용수 아버지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다본다.
“아, 이 사람아, 그걸 지금 내가 몰라서 한 소리여? 농담 한마디 한 걸 가지고 원 쯧쯧!”
용수 아버지의 그 말에 용수 엄마 역시 양 미간 사이로 주름살을 지어 보이며 총각 쪽을 홱 하고 돌아보는데, 정작 떠꺼머리총각 자신은 연신 고개를 좌우로 불규칙하게 흔들면서 입술만 계속 삐쭉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용수 아버지가 한마디 더 첨가 할 기세를 보이자, 용수 엄마는 재빨리 용수 아버지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연신 눈짓까지 해 보인다. 그제야 용수 아버지도 새삼 정색한 표정으로 떠꺼머리총각 쪽을 가만히 돌아보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계속 끄덕거리고 있다.
마술공연이 끝나자, 이번엔 아까 그 소녀들의 외발자전거 묘기 시간이다. 그런데 저런 것도 묘기로 쳐 주어야 할지 좀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저런 정도는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나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하기야, 자전거는 누구나 금방 배워서 탈 수 있지만, 외발 자전거만큼은 좀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하겠지. 내 생각으로는 외발자전거 묘기 그 자체보다도 소녀들의 깜찍한 외모와 몸놀림이 더 큰 구경거리가 되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주변의 모든 어른들 얼굴표정에서 곧바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까 내게 꿀밤을 먹였던 뒷자리의 어른 역시도 마찬가지다. 힐끗 돌아보는 내 시야 안 가득이로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쪽박 웃음을 짓고 있던 그 사람의 시선과 딱 마주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구경꾼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를 뒤로 한 채, 소녀들이 작은 참새들처럼 팔딱팔딱 무대 뒤로 사라지지고 난 뒤, 검은 휘장막이 천천히 무대 아래쪽으로 내려와 덮이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재차 걷혀지고 하는 사이에, 벌써 무대장치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다. 드디어 그녀가 등장하는 연극 순서가 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저기 바로 그녀가 등장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남장 여 검객의 모습으로. 역시나 그 등 뒤로는 멋진 장검 하나가 길게 가로 매달려 있다. 저 고혹적인 모습을 벌써 며칠 째나 꿈속에서까지 만나고 있는 것이다.
“내 부모를 죽인 원수를 대체 어디 가서 찾을 수 있단 말이냐!”
그 특이한 중성의 목소리에 구경꾼들이 침을 꼴깍하고 삼키는 순간, 무대의 한쪽 면으로부터 또 다른 칼잡이 하나가 불쑥 튀어 나온다. 그의 허리에도 역시 긴 장검이 매달려 있다.
“이보오, 젊은 검객?”
다짜고짜 칼잡이가 남장 여 검객에게 말을 건넨다.
“왜 그러오?”
남장 여 검객이 고혹적인 눈빛으로 칼잡이를 돌아다본다.
“대체 어디서 온 누구이기에 예서 이렇게 얼쩡거리고 있는 게요?”
그러는 칼잡이의 표정이 마치, 이 곳이 자신의 땅이라도 된다는 듯한 모습이다.
“이 사람은 지금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아 이리저리 산천경개를 떠돌고 있는 몸이올시다.”
남장 여 검객이 다시 한번 음산한 중성의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을 한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아서 산천경개를 떠돌아? 그게 대체 누군데?”
칼잡이는 이제 반말지거리로 나서며 남장 여 검객을 아래위로 훑어보기까지 한다.
“곰보 얼굴에다 구레나룻을 기른 자요.”
바로 그 순간, 칼잡이가 뒤로 한 발짝 펄쩍 물러서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본 남장 여 검객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거린다.
“왜 그러오? 혹시, 그런 자를 알거나 본 적이 있소?”
남장 여 검객의 목소리는 여전히 음산하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 음산함은 내 가슴속을 마구 휘젓고 있는 매혹적인 음산함이다.
“아 아니, 무슨 말을. 나 나는 그런 사람을 절대로 본적이 없지.”
칼잡이가 그렇게 당황한 몸짓을 해 보인다. 연극적인 과장된 몸짓으로 말이다.
“꽁갈인 디! 히히! 자기가 부한 디......”
떠꺼머리총각이 갑자기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자, 용수 아버지가 다시 한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다본다.
“그 사람 참, 비 맞은 중 마냥 뭘 저리 중얼대는지......”
그랬으나, 떠꺼머리총각은 턱을 삐죽이 한 채, 무대 쪽으로만 계속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 벌어진 입가에는 침이 허옇게 메말라 있다.
“그냥 냅두래두유!”
용수 엄마가 그렇게 재차 손을 내젓고 나서자,
“어허, 나원 참!”
하고 용수 아버지 역시 마지못해 무대 쪽으로 시선을 옮겨 버리고 만다. 그 순간에도 남장 여 검객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 그러시오. 그럼 나는 이만 실례 하겠소이다. 갈 길이 좀 바빠서.”
그러며 남장 여 검객이 살포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세운 바로 그 순간,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칼잡이가 갑자기 자신의 칼을 쑥 하고 뽑아들더니, 그녀의 뒤쪽으로 살금살금 다가들기 시작한다.
“저 저!”
호호백발 할머니의 입에서 그런 다급한 탄성이 흘러나오자, 그 무릎위에 올라앉아서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있던 어린 손녀 아이가 갈래 머리를 좌우로 나풀나풀 흔들며 재잘거린다.
“아니여 할무니, 쥔공도 벌써 다 알고 있단 말이여!”
“잉 그게 그런 겨?”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떡이고 있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어린 손녀의 머리위에 채 닿기도 전, 하늘 높이로 장검을 치켜들고 있던 칼잡이가 느닷없이 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서서히 아래쪽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연출 해 보이고 있다.
“크윽!”
벌써 일주일 째 지켜 본 모습이지만, 저 장면이야말로 가장 멋진 대목이란 생각이 든다. 번개보다도 더 빠른 남장 여 검객의 칼 솜씨와 더불어 서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칼잡이의 모습.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칼을 칼집에서 뽑은 적이 없다. 그저, 철커덕 하고 한번 칼의 손잡이를 칼집에서 들었다가 놓기만 했을 뿐이다.
“엄살 부리지 마라 이놈.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네 놈의 수작을 다 알고 있었느니라. 그런데도 감히 나를 베려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네 놈의 괘씸한 소행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거둘 것이로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잠시 그 목을 그대로 붙여 둔 것이다. 그래, 네 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음!......”
칼잡이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남장 여 검객의 모습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이놈, 죽고 싶으냐?”
“아 아니오, 말씀 올리겠소.”
“그래, 어서 말을 해 보거라.”
“글쎄, 그게 저......”
칼잡이가 그렇게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자, 다시 한번 더 남장 여 검객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무대위로 깔려 버린다.
“좋다. 죽기가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 너를 조용히 저 세상으로 보내주마.”
“아 아니오. 말씀드리겠소. 그 그게 사실은 그 그 사람이 바로 우 우리 두목이오. 그게 저......”
“그럴 줄 알았다. 진작에 그렇게 사실대로 말을 하면 될 것을. 그렇다면, 네 두목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저기 그게......”
“이놈, 정녕 목숨이 두렵지 않은 게로구나.”
“아 아니오. 저 저를 따라오시오.”
“그래, 어서 앞장서거라.”
“끄응......”
칼잡이의 그 대사를 끝으로 검은 휘장막이 천천히 내려와 무대를 모두 가려 버린다. 그리고는 고요하게 흐르는 정적. 무대도, 구경꾼들도 모두가 그렇게 고요한 정적 속에 휘감겨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그 찰나의 정적을 깨뜨릴 생각을 못하고 있다. 간혹 가다가 두터운 솜이불 속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아이들과 노인네들의 잔 기침소리만이 공기의 파동을 미세하게 떨게 하고 있을 뿐.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기대감,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저 휘장막 뒤의 가설무대는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까 하는 그 기대감 말이다. 드디어 사람들의 그런 기대감을 안고 가설무대의 검은 휘장막이 다시 슬슬 기어오르고 있다. 이 곳은 바로 남장 여 검객의 원수인 도적 두목이 머물고 있다는 바로 그 장소. 쉽게 말하여 도적 소굴이다. 그리고 도적 소굴의 앞에서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도적 두목이 손에 술잔을 거머쥔 채로 졸개 셋을 향하여 기고만장한 소리를 내지르고 있다. 졸개 셋의 손아귀에도 역시 저마다 술잔이 하나씩 쥐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들 잘 들어라. 오늘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위하여 인심을 베푸는 이유는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러자 졸개중의 하나가 바로 대꾸를 하고 나선다.
“두목, 그럼 오늘 하루는 마음껏 먹고 마셔도 되는 겁니까요?”
“이놈아, 꼭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야겠느냐? 너희들이 추진 해 온 물건이 모처럼 푸짐하니 내가 선심을 베푼다는 것이다. 왜 놀고먹기가 싫으냐?”
“아 아닙니다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헤헤헤! 우리 두목님 만세!”
“만세에!”
“만세에!”
하지만, 졸개들의 과장된 만세 삼창의 여운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갑자기 북소리가 둥둥 거리고 징소리가 지잉 울리는 속에 느닷없이 두 사람이 무대 안으로 등장을 한다. 바로 나의 그녀인 남장 여 검객과 칼잡이 녀석이다. 그 모습을 보고 한창 신나 있던 도적의 무리가 흠칫 하며 두 사람을 돌아다본다.
“아니 이놈아, 너는 경계를 서고 있으랬더니, 왜 들어온 거야? 그리고 저 놈은 또 누구고?”
곧바로 도적 두목의 호통소리가 걸죽하게 흘러 나왔으나, 곧바로 남장 여 검객의 중성음이 그 뒤를 잇는다.
“이놈, 드디어 여기서 너를 보게 되는구나.”
그러자, 도적 두목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뭐라? 이 놈?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여러 소리 듣기 싫다. 잔말 말고 그 목부터 어서 내 놓거라.”
그쯤 되자 도적 두목 역시도 갑자기 분이 꼭두까지 치밀어 오르는지 발까지 굴러가며 투가리 깨지는 소리를 내지른다.
“저 저런 쳐 죽일 놈이 있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대체 저 미친놈이 누구란 말이냐, 여봐라, 저 저 미친놈을 불문곡직 어육을 내 버려라!”
“예!”
도적 두목의 그런 지시가 아니더라도 졸개들은 이미 저마다 칼을 하나씩 쑥쑥 뽑아들고는 남장 여 검객 쪽으로 천천히 다가들고 있는 중이었다. 하기야 졸개들이라고 해 봐야 고작 너 댓 사람에 불과하니 좀 낯간지럽기는 하다. 약장수들이 꾸려가는 가설무대의 특성상, 그 보다 많은 숫자의 단원들을 등장시킬 여력도 없거니와, 설사 단원들이 남아돈다고 해도 그 좁은 무대위에 많은 사람을 등장시키기도 지난한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졸개들의 무리 안에는 여태껏 이곳까지 여 검객에게 쫓겨 온 그 칼잡이도 함께 섞여 있다. 도적들의 소굴에 닿았으니, 남장 여 검객은 더 이상 졸개 칼잡이 따위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식이리라. 도적 두목은 비웃음을 띤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뒤 쪽에서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고, 졸개 넷은 남장 여 검객의 앞으로 바짝바짝 더 다가들고 있는 중이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남장 여 검객의 입에서 우뢰와 같은 기합소리가 터져 나온다. 역시, 그 중성의 목소리로.
“이여헙!”
“헉!”
“허억!”
“윽!”
“철컥!”
쿵! 쿠쿵! 쿵! 쿵!
그것으로 상황 끝이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남장 여 검객의 놀라운 칼 솜씨. 아니, 그런 칼 솜씨라고 여겨지게 만드는 마지막 철컥하는 그 경이로운 효과음. 일주일 째 반복해서 보아온 장면이지만, 볼수록 감탄스러운 연출 수법이 아닐 수 없다. 단원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면서도 그 극적인 효과를 최 상승으로 끌어올리는 수법. 그런 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촌철살인의 연출 수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실, 그런 생각은 먼 훗날에 해 본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어찌 그런 생각들을 감히 해 볼 수 있었으리오.
“히야, 대단하네 그랴!”
“그려! 기 맥힌 칼솜씨구먼!”
구경꾼들의 그런 감탄성이 쏟아지거나 말거나, 순식간에 졸개 넷을 해 치워 버린 남장 여 검객은 다시 발길을 옮겨 천천히 도적 두목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었다.
“이놈, 이젠 네 목 차례다!”
하지만, 도적 두목은 구레나룻을 흔들어가며 걸걸한 웃음소리까지 내어 보인다.
“컬컬컬! 그놈 칼 솜씨가 제법이구나. 하지만 나는 안 될 것이다. 너는 되려 내 칼에 죽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보아하니, 젊은 처자 같은데 도대체 네 년은 누구고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냐? 그리고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러는 것이냐?”
“이놈, 우리가 아니다. 바로 너 때문이다. 좋다. 궁금하다니 설명을 해 주도록 하지. 죽어도 이유나 알고 죽어야 억울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야. 10년 전, 범골의 그 때 일을 기억하겠느냐?”
“범골?”
“그렇다.”
“음, 범골이라. 옳아 바로 그것이었군. 그럼 네 년이 그 때 죽은 바로 그 영감탱이의 여식이란 말이지? 말하자면, 그 당시 도륙을 내 버릴 당시, 너 혼자서 어디에 숨어 있었다는 말이고. 그래서 이렇게 복수를 하러 온 것이란 말이지? 모든 정황이 단숨에 그려지는구나.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라서 바로 짐작이 된다. 좋다. 덤벼라! 기왕에 내가 네 부모를 죽였으니, 너와 나는 더 이상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가 없는 처지. 얼마든지 상대 해 주마! 약한 여자의 몸으로써 부모의 원수를 갚자고 나선 것 자체는 가상한 일이다만, 참으로 안 되었구나. 오늘 내가 너를 부모의 곁으로 마저 보내 줄 테니. 고맙게 여기도록 하거라.”
도적 두목의 그 능청스러운 대사에 여기저기서 구경꾼들의 탄식소리가 낮게 이어지는 속, 남장 여 검객의 대사가 재빨리 그 뒤를 잇는다.
“가소로운 놈! 착각도 자유로구나. 하지만,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인줄 알거라. 그러니 부디 저 세상에 가서도 나를 원망하지나 말거라. 이 모든 것이 다 네가 쌓은 업보인 것을.”
“허허 그년, 변설이 귀엽구나.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일단 대어 봐야 알 일. 자, 그럼 시작을 해 볼까?”
스르릉!
사르릉!
마침내 두 사람의 칼날이 어지러이 어울리기 시작한다. 도적 두목 역시도 졸개들처럼 단칼에 죽고 말 것이라는 구경꾼들의 예상을 뒤엎는 일대 접전이다.
하지만 결국,
“컥!”
도적 두목 역시도 남장 여 검객의 칼날 아래 싸늘한 고혼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남장 여 검객의 입에서 마지막 대사가 처연하게 흘러나온다. 역시, 그 독특한 중성의 목소리로.
“이젠 돌아가리라! 부모님이 계신 그곳으로. 그리운 내 고향으로!”
두웅 둥 둥둥둥!
과아앙!
심장을 엄습해 드는 커다란 북소리와 장엄한 징소리가 무대 가득이로 울려 퍼지는 속에 휘장막이 다시 슬슬 하강을 하기 시작한다. 휘장막이 그렇게 무대를 완전히 가렸다가 다시 또 위로 치켜지고 나면, 출연한 단원들 모두가 횡대로 늘어서서 허리를 반으로 접어 보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구경꾼들의 함성 소리와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 역시 길게 이어지기 시작한다. 일주일 째 늘 보아온 그런 장면이요 모습들이다. 그리고 나 또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하릴없이 툴툴 집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는 바에야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집안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엄마는 오늘도 역시 공짜 구경을 놓치고, 하루 온종일 다른 볼 일을 보러 나가 있는 중이다. 바로, 며칠 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서 말이다.
방안의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채, 다시 한번 그녀의 모습을 떠 올려본다. 그래, 오늘 밤에 다시 한번 거기에 가 보는 거야. 어쩌면 그녀를 다시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아니면, 목소리만이라도 다시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도대체 얼마를 잔 것일까. 엄마가 돌아와서 야단을 치는 소리에 비로소 초저녁잠에서 깨어난다. 방학이라고 허구 헌 날 놀아대기만 할 거냐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엄마. 아마도 아버지를 찾지 못했나 보다. 엄마의 발길질이 시작되기 전에 재빨리 앉은뱅이책상 쪽으로 엉덩이를 밀쳐간다. 그리고는 전과를 펼쳐 놓고서 고개를 직각으로 푹 꺾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내 모습을 엄마가 한참동안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역시 아버지는 귀가를 하지 않을 모양이다. 엄마는 설거지도 하지 않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 쓴 채 미동조차 않고 누워있다. 더 이상은 모든 것이 다 귀찮아진 모양이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도 엄마를 속상하게 하는 것일까. 저토록 젊고 고운 엄마조차 마다할 만큼,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란 말인가. 그 여자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언제부턴가 엄마의 가는 한숨 소리가 간헐적으로 방안의 침묵을 깨고 있다. 그리고는 간간이 이어지는 이 악물림 소리까지도.
“그년을! 그년을!”
엄마가 그러고 있거나 말거나, 나는 이제 내 볼일이나 보러 가야 할 시간이다. 모든 것을 각오 하고 책상머리에서 물러나 가만히 방문을 열어젖힌다.
“또 어디 끄대 가?”
이럴 때 엄마의 목소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조금은 닮은 것도 같다. 약간 굵은 그 목소리.
“오줌 누러!”
“그놈의 오줌은...... 빨리 누고 와서 책 들여다봐!”
“알았어.”
하지만 엄마, 책 들여다보는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정말 미안 해!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밤이다. 좁은 골목길 한쪽의 수챗물 안에서도 달빛이 일렁거리고 있다. 저 앞쪽으로부터 자전거 한 대가 따르릉거리며 천천히 다가온다. 천변 목공소 동수 아버지의 짐 자전거다. 이제야 일이 끝난 모양이다. 한쪽으로 비켜서서 공손한 척 인사를 올린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그래. 근디, 이 밤에 어딜 가?”
“엄마 심부름요.”
“그려, 착하구나.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이여.”
“예!”
지겹다. 어른들은 무조건 공부, 공부, 그저 공부. 하기야,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중에 어른이 되서 잘 먹고 잘 살 확률이 높아지겠지. 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 아닌가.
동수 아버지를 만나고서도 5분정도가 더 흘러간 셈이니, 이제 곧 그녀의 삭월 셋방이 저쯤 보일 것이다. 가슴속이 마구 용두박질을 해 대기 시작한다.
아, 드디어 저기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일까? 어디서 많이 보던 남자인데. 그렇다. 바로 내 아버지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체 왜 저기에 있는 것일까.
언제 그 골목길을 뛰쳐나왔는지 나 자신조차 알 수가 없다. 숨이 턱에 차오도록 달리고 또 달리고 있지만, 도저히 이대로 멈출 수가 없다. 무심한 달빛만이 처량하게 온 세상을 훤히 내리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 내 귓가로 계속 엄마의 그 소리가 맴돌이 질을 쳐 대고 있다.
그년을! 그년을!
2005.10. 허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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