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8. 09:14ㆍ허세창장편소설

42
잔인한 시간에 붙여
살처럼 흐르는 시간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빛처럼 흐르는 세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 시간의 덧없음이여.
아, 세월의 덧없음이여.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큰 생채기를 그어주는가?
이토록 큰 절망감을 안겨주는가?
잔인한 시간이여!
잔인한 세월이여!
사랑하는 그대!
그 숭고한 미의 화신에게조차도
도대체 왜 그런 생채기를 그어주는가?
도대체 왜 그런 절망감을 안겨주는가?
잔인한 시간이여!
잔인한 세월이여!
말을 해 다오!
제발 말을 해 다오!
(어느 고삐리 소년의 슬픈 넋두리 일기 중)
희의 싸늘한 주검이 창백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병원 시체실,
그리고 영안실.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얼굴로 그녀의 영안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허수창 소년.
정말, 믿을 수 없다. 아니, 어떻게 이런 장면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죽음의 주인공이 진정코 희 너란 말인가?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희 니가 진정 맞단 말인가? 눈을 떠다오 내 사랑! 제발, 눈을 떠다오 내 사랑! 그리고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 해다오 내 사랑! 조금만 참고 견디면 되었을 것을...... 조금만 참고 견디면 내가 너를 지켜 주었을 것을...... 도대체 왜? 왜? 이 바보야! 왜에에?
내가 미친놈이여! 내가 미친놈이여! 너를 놔두고 그렇게 지리산으로 가는 게 아니었는 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너의 방 창틀 아래서 너 하나만을 지키고 있었어야 했는 디! 설사 그 한자리를 지키다가 몸뚱이가 다 썩어내려 말라비틀어진 진토(塵土)로 되었을망정, 오로지 그 한자리만 지키고 있었어야 했는 디! 오직 니 곁에서만 머물러 있었어야 했는 디! 내가 미친놈이여! 내가 미친놈이여! 니가 이렇게 서럽게 죽어간 것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나는 그렇게...... 아아아! 더 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하단 말이여? 더 이상 내가 어떻게 이 상태 이대로 뻔뻔하게 이 세상에 홀로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이여? 기다려다오 희! 나 하고 같이 가자! 나 하고 같이 가!
자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빈소의 한 모서리. 그리고 그 희의 영정 사진을 눈물 속에서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는 허수창 소년. 사람들은 그녀 죽음의 정확한 원인을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냥 막연히 학업이 부담이 되서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일부러 나서서 그녀 죽음의 정확한 원인을 새삼스레 까발리고 싶지는 않다. 그래봐야 그녀가 다시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니니 말이지.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 그만인 것이다.
지송해요 엄니! 이 불효자식, 효도도 제대로 못 해보고 부득이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됐습니다. 이 못난 자식을 제발 용서 해 주세요.
안 돼 수창아!
이제는 환청까지 들려오는가? 엄니의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하게 들려오다니. 혹시, 엄니가 와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눈길로 황망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하얀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 제기랄! 이 여자는 소복 차림마저 왜 이리 섹시, 아니 고혹적인 겨? 레트 버틀러가 상복 입은 스칼렛 오하라에게서 차마 눈길을 떼지 못한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어.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책 내용 중에 나오는 장면을 말함 - 글쓴이 주)
하지만 주미, 이젠 그대하고도 영원한 작별이군.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 줘 주미! 이건 진심이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어. 우리 다음 생에도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슬픈 얼굴로 무언가 말을 하려는 주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영안실을 빠져 나왔다. 죽는 마당에 더 이상 여자와 말을 섞은 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리고 가출소녀 너와도 만나자 이별이 되었구나. 그래, 너한테도 미안하다. 부디, 공부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교 들어가고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서 행복하게 잘 살아다오. 우리 다음 생에도 꼭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래.
그리고 승주씨! 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했던 그대! 그대만 생각하면, 가슴이 하염없이 에려 옵니다. 그토록 당신을 사랑하고, 또 언젠가는 그대와 꼭 직접 인연이 되고도 싶었건만, 끝내 이렇게 그대와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가게 되었군요.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반드시 그대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 사랑 합니다 승주씨! 사랑 합니다 승주씨! 흐흐흑!
그리고 진숙씨, 당신 역시도 행복해야 해! 우리 꼭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옥자씨, 소희씨 당신들도 영원히 안녕! 모두모두 우리 다음 생애에 다시 보자고! 크흐흑!
모두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는데도 저 여자는 왜 저리 질기게 따라붙는 겨? 주미, 제발 정신 좀 차리란 말이여!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정부가 아니라니께.
“허수창......”
이 정신 나간 여자야. 허수창은 이제 더 이상 니 정부가 아니라니께. 그래, 대답을 하지 말자.
“......”
“창이 니 마음 다 알아. 그래도 기운을 좀 차려야지.”
이건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 해 주고 있는 겨? 내가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기는 너나 나나 괴롭기는 다 마찬가지일터.
“......”
대답도 없이 무서운 눈으로 주미를 노려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미는 퉁퉁 부운 눈으로 묵묵히 제 정부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
에그, 이 철부지야! 사촌 여동생이 죽었는 디 지금 내가 어디 가는 것이 중요한 겨? 가서 니 사촌 여동생의 빈소나 지키란 말이여. 나는 지금 니 사촌 여동생 따라서 죽으러 가는 길이란 말이여. 그래, 마지막 가는 길이니, 그리도 소원이라면 딱 한마디만 해 주고 가지.
“가 볼 데가 있으니까 당신은 이제 돌아가. 가서 희 곁을 지켜줘야지.”
“알았어. 어쨌든, 오늘 고마웠어. 이렇게 와 줘서.”
이 여자가 지금 제 정신인 겨?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죽었는데, 그 죽은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안 와보면 대체 누가 와 본다는 겨?
“잘 있어. 나 이제 그만 가 볼 게.”
그냥 잘 있어가 아니고 영원히...... 그냥 가 볼 게가 아니고 영원히......
“그래, 어서 가 봐! 나는 들어가 볼게!”
주미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미리 생각 해 두었던 그 아파트 앞까지 총총히 걸어왔다. 그리고는 별 생각 없이 경비실 앞을 지나쳐 가려는데, 느닷없이 경비 아자씨가 문을 열고나오는 것이 아닌가. 제길!
“학상! 잠깐 나 좀 봐! 자네 여기 사는 사람 맞어?”
“그런데요?”
진짜 거주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을 해 주었다. 들킬 때 들키더라도 완전하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굳이 내가 먼저 시인을 하고 들 필요는 없으니 께. 하지만 말씨를 보았을 때, 충청도 내지 대전 토박이로 보이는 이 경비 아자씨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좀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에그, 죽기도 이리 번거로운 겨? 미안해 희야! 조금만 기다려 줘. 그랬다가 우리 같이 손 붙잡고 저 세상으로 가는 겨. 거기 가서는 우리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둘이서만 살아보는 겨. 영원히! 영원히! 미안 하오 승주씨! 사실은 가장 절실하게 당신과 그렇게 해 보고 싶었는 디! 딱! 파!
“그려? 첨보는 디?”
“맞다니까요.”
아니, 첨보는 학상 맞아유. 헌디, 날 그냥 내 비러 두면 안 되유? 나 빨랑 죽어서 우리 희 하고 같이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단 말여유! 딱! 파! 화상, 다시 생각 해 보면 안 되겄냐? 왜 짜샤? 그야, 너 하고 나 하고 허구헌 날 이렇게 티격태격 하는 재미 때문에 그러 쟤. 이 새끼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겨? 에라이 이 좌식아, 마지막으로 죽는 마당에 짜샤 너나 실컷 패고 죽을란다. 퍽퍽퍽! 꽤애액! 사람 살려어 아파트 사람들아! 여기 여자 친구 때문에 귀중한 지 목숨 스스로 끊으려고 하는 못난 녀석이 사람 막 패 죽인다아! 퍽퍽퍽! 꽥! 꼬르륵!
“아녀, 아무리 봐도 첨보는 얼굴이여.”
그 참 정말 귀찮게 구네. 금방 죽을 사람인 디 처음 보는 사람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쩔껴 이 오지랖 넓은 토백이 아자씨야? 제발 날 좀 그냥 내 비러 두라니께!
“사실은 이 아파트 사는 학교 친구 만나러 온 겁니다.”
귀찮은 생각이 들어, 그냥 이실직고 해 버렸다. 아니, 이실직고 하는 척 해 버렸다.
“핵교 친구? 증말이여?”
미치갔네 증말! 이 아자씨 대체 왜 이러는 겨? 뭔 낌새를 알아 챈 겨? 하기야, 식당 집 개 3년이면, 김밥을 만다는 디. 그나저나 아자씨! 나 지금 정말 바쁜 사람입니다. 죽은 내 애인이 저기서 나를 기다고 있다니께유!
“정말이라니까요.”
“그 친구 몇 호 사는 디?”
찰거머리가 따로 없구먼! 이거 혹시, 외계인들이 장난치고 있는 거 아녀? 나 못 죽게 하느라고? 내가 죽으면, 쫓아다닐 사람 없어서 심심할 테니......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더 죽어야지. 희도 희지만, 너희들이 귀찮아서라도 더 죽어야겄어. 정말, 왜들 이러는 겨? 나 정말 이제는 이 의미 없는 세상 머물러 있기도 싫다니 께. 나에게 제발 죽을 권리를 달란 말이여. 승주씨! 꺼으윽! 승주씨! 당신을 두고 그냥 이대로 가는 게 아쉽기는 하구려! 딱! 파!
“404호요.”
“알았어. 잠시 확인 해 볼 테니 기대려!”
에라 모르겄다.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봐 이 늙다리야! 이 고래심줄 보다도 더 질긴 늙다리야!
후다닥!
“어 어! 거 거기 서! 서라니 께!”
지송혀유 아자씨! 이제 곧 죽을 놈이 서란다고 고분고분 서겄습니껴? 도망가는 도둑놈 보고 거기 서라고 하면 그 도둑놈이 그냥 서겄습니껴?
죽을힘을 다 해 위층으로 향하는 복도 쪽으로 뛰어가는데, 늙다리 경비 아자씨 역시 죽을힘을 다 해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 아파트가 1969년도에 처음 건립 된 승강기 없는 옛날 식 5층짜리 아파트라는 점이다. 오로지 위층으로 향하는 복도를 따라서 지그재그 식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손수레(니어커)조차 끌고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구조다. 노쇠한 몸이라서 그런지 아자씨는 좀체 벌어진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따라와 볼 테면 따라와 보쇼 이 거머리 아자씨야! 죽으러 가는 마당에 참 별짓 다 하고 있다. 지송혀유 독자 여러분! 아이고 그러고 보니 독자 여러분들께도 작별 인사를 못 드렸구먼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유 독자 여러분, 지는 이제 희를 따라서 저 세상으로 갑니다유. 그러니 여러분들은 부디 이승에 남으셔서 행복하게 잘 사셔유! 그러고 제 야그를 끝까지 못 들려 드려서 정말 지송허구먼유! 꺼흐흑!
아파트 옥상의 문은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지금 내 눈 밑으로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아래세상의 저 어떤 것들조차도 그저 부질없게만 느껴질 뿐이다. 어떻게 이런 기분이 들 수 있는 것일까? 비록, 희가 저승으로 갔다고 해도, 이승에는 아직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승주도 남아 있고, 주미, 희정, 진숙, 옥자, 소희까지도 다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죽을 용기가, 아니 죽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어오는 것일까? 혹시, 희의 영혼이 강제로 나를 부르고 있어서? 애통한 희의 영혼이 정말로 나와 함께 가고 싶어서?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다 좋다. 기꺼이 네 부름에 응해 줄 겨. 까짓 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남?
“간다 희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혀!”
“아니, 저 저 저걸! 학사앙! 학사앙! 학사앙!”
“희야아아아아아!”
“학사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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