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31. 15:38ㆍ허세창장편소설

44
지구
45억 년 전, 천지가 처음으로 개벽을 하고, 거기서 또 8억년의 세월이 더 흐른 후, 비로소 새 의지(意志)의 덩어리들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지. 그리고 그 후, 수많은 의지들은 저마다의 서글픈 사연들을 간직한 채로 자꾸만 자꾸만 어떤 알 수 없는 심연 깊은 곳으로 어지러이 흩어져 갔었지. 그리고 또다시 지금, 세상의 모든 가련한 의지들은 오만한 한 가지 의지의 횡포로 인하여 하나 둘 저마다의 가슴속에다 혹독한 사연들을 그려 가야만 하지. 마치, 미리부터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듯, 아니 본래부터 그렇게 보잘것없이 스러져가야 할 운명이었다는 듯, 우리 의지의 잔혹한 족속들은 한 줌의 동정심도 없이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또 다른 의지의 가지들을 쳐 내려가지. 그러나 오만(傲慢)의 의지들이여. 진정, 이대로 당신들의 만행을 지켜볼 수만도 없는 일이지. 정녕코, 그들의 멸망을 이대로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아니 이제는, 세상의 모든 의지들이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서고, 저 푸른 바다와 새파란 하늘, 그리고 녹색의 대지가 시퍼렇게 살아 숨 쉬는 그런 세상을 다시 일구어 가야만 하리. 비록, 45억 년의 시간이 다시 지나고, 모든 의지의 덩어리들조차 한줌도 없이 소멸 해 간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후의 세상에서 또 다른 의지들의 서글픈 역사가 끝없이 반복이 되어 진다 할지라도......
(자살미수에 그친 어느 예비 고3 소년의 일기장에서 발견한 알 수 없는 낙서 내용 중)
보름여가 지난 1980년 01월 중순의 어느 늦은 오후, 대전시 중구 은행동 야간비행 음악다방. 질풍노도와도 같았던 1970년대가 저물고, 어느새 이렇게 1980년대로 훌쩍 넘어와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70년대에 있어서 내게 가장 큰 사건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건 두 말할 것도 없이 1976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보고, 그 후로도 지금까지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고, 또 사랑하고 있는 한 여인, 바로 혜은이, 아니 김승주를 알게 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또 하나, 바로 1970년대 마지막 끝자락에 벌어졌던 바로 극적인 그 사건들, 공주미라고 하는 맛좋은 한 유부녀와의 첫 만남을 필두로,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또 다른 아리따운 여인들과의 줄기찬 어우러짐들, 그리고 뼈아픈 한 이별이라고 할 것이다. 그 뼈아픈 한 이별로 인하여, 나는 그토록 귀중한 다른 여인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이 풍진 세상을 하직 해 보려는 시도까지 벌였던 것이니. 물론, 그런 나를 구해 낸 그 존재, 김승주의 얼굴을 그대로 빼어 닮은 외계인과의 만남 역시도 1970년대를 대미로 장식한 놀라운 사건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오늘 이렇게 질기게 살아남아서 묘령의 또 한 여인과 더불어 조용히 휴식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대체 그 묘령의 한 여인이란 누구를 두고 이름 하는 것이란 말인가? 야간 비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바로 그 여자 공주미?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공주미는 아니다. 그건 바로 지리산에서 극적으로 낚아 온 여인, 바로 가출소녀 장희정 그녀인 것이다. 그 깜찍한 가출소녀를 공주미 대신 이렇게 이곳으로 데려 오고 만 것이다. 왜냐고? 그거야 당연히 이 가출소녀 역시 승주와 주미와 희만큼이나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그저 어여쁜 철부지인줄로만 알았던 가출소녀가 열흘 동안이나 나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었으니까. 정말, 그 얼마나 고맙던지. 그렇다면 정녕코, 죽은 희는 그냥 망각 해 버린 거냐고? 그건 아니다. 나란 놈이 아무리 염치가 없기로서니, 그렇게까지 파렴치한 놈은 아니다. 사실, 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내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란 녀석의 잔인한(?) 도움과 가출소녀의 지극정성 덕분으로 인하여 그나마 많이 아물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병원에서 가출소녀와 엄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열흘 가까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많은 이들이 나를 방문 했었다. 담임교사와 반 아이들은 말할 것 없고, 일가친척에 언론사 기자들까지. 특히, 기자 녀석들은 좀 많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슨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기자 녀석들까지 나서서 나를 찾는단 말인가. 그들은 언급하길, 요즘 보기 드문 순애보적인 사랑 어떻고 저떻고라나. 어쨌든, 곱지 않은 태도로 그런 그들을 죄다 병실 밖으로 내쳐 버리고 말았다. 왜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몸뚱이부터가 오글거려 그걸 어떻게 참고 있냐 이 말이지. 순애보는 무슨 당치 않은 순애보란 말인가. 하기야 냉정하게 따져서는 순애보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마냥 부정할 수만도 없긴 하다. 죽은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하고 따라 죽으려 했던 그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지. 더군다나 다른 지 여인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도 않고서 말이지. 그런데 그 여인들이 죄다 내 여인들이 맞기는 한 겨? 아니, 내 양들이 맞기는 한 겨? 승주와 주미, 희정이는 확실한 것 같은데, 옥자와 진숙이, 소희는 아직까지 좀 그렇긴 한 것 같으니 말이여. 딱! 파! 화상, 혜은이도 제외다. 하! 고 자식. 또 아픈 데를 찌르고 드네 그랴? 오히려 옥자와 진숙이, 소희야말로 화상 네 여자 맞어. 왜 짜샤? 그야, 그 여자들 몸뚱이 맛을 이미 다 본 처지니 께 말이여. 찔끔! 하! 고 자식, 할 말 없게 만드네. 하지만, 혜은이는 아직 몸뚱이 맛은커녕, 말 한마디 못 건네 본 처지니께, 네 여자가 아닌 것은 당연한 이치고, 되려 다른 녀석 여자인 게 분명 혀. 왜 짜샤? 승주하고 아직 그런 관계가 없었으니, 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네 논리에 따라 수긍을 한다고 쳐도, 어떻게 승주가 다른 녀석 여자라는 겨? 그야 혜은이는 이미 다른 녀석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께. 그냥 내 추측이다 왜? 그 자식, 아년 마! 승주는 아직 애인이 없어. 내 느낌에 그래. 지금 저렇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돈 버느라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연애 할 시간이 있겄냐? 그건 짜샤 네 추측에 불과할 껴. 그리고 짜샤, 니 논리대로라면, 희하고도 미처 관계를 못 가진 처지니, 희도 내 여자가 아니라는 겨 뭐여? 너 이 새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혀? 어떻게 희가 내 여자가 아닌 겨? 희하고 나는 살만 섞지 않았다 뿐이지, 어느 모로 보나 이미 완벽한 부부 사이나 마찬가진 디? 아니, 그 이상이었는 디? 그게 그런 겨? 어째 자꾸 계산이 복잡해지네 그랴. 그런디 말이여 화상, 너 혜은이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혜은이의 최고 인기 절정기는 ‘당신만을 사랑 해’ 노래로 가수 왕 처음 먹었던 1977년 그 때 아녀? 지금은 그 최고 절정기에서 한 계단 내려 온 수준이고 말이여. 에고, 나도 모르겠다. 니가 그렇다고 우기니 나도 그냥 그런 줄 알아야지 뭐. 불쌍한 녀석! 아니 뭐여? 승주 인기가 한 계단 내려 왔다고라고라? 그리고 불쌍한 녀석이라고라고라? 너 이 새끼! 다시 한 번 읊어 봐라. 승주가 이번에도(1979년)또 가수왕을 타 먹었는 디 무슨 헷소리여? 그것도 3개방송사 죄다 휩쓸면서 말이여. 그리고 내가 왜 불쌍한 녀석이여? 잉? 너 이 새끼 오늘 또 죽을라고 환장을 했냐? 그러고 말이다. 너 왜 꼬박꼬박 혜은이라고 하는 겨? 혜은이라고 하지 말고 김승주라고 해야지. 김승주가 본명이잖여 이 좌식아? 너는 맞아야 혀! 퍽퍽퍽! 꽤액! 에구에구! 짜샤 살려어! 야간비행 손님들아! 중학교 때부터 혜은이한테 완전히 미친 자식이 짜샤 마구 패 죽일라고 한다아! 이게 그래도 혜은이? 에라이! 퍽퍽퍽! 꼬르륵! 드디어 갔냐? 질긴 놈! 미안하다 짜샤! 사실은 혜은이란 예명을 나도 좋아하긴 혀! 김승주란 본명만큼이나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짜샤 녀석을 그렇게 보내 버리고 있는데, 가출소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오빠, 여기 학생도 들어 올 수 있어?”
가출소녀답지 않게 겁이 많다. 그나저나 가출소녀가 갑자기 내게 말을 놓게 된 이유? 그냥 내가 그러라고 시켰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꼬박꼬박 하오를 받는다는 것도 뭔가 좀 낯간지러워서 말이여. 딱! 파!
“괜찮아. 술집도 아닌 데 뭐.”
“그래도 안 될 것 같은데.”
이것아! 그런 것에 뭘 그리 신경을 쓰는 겨? 장사하는 사람들이 군소리 없이 들여 보내주었으면 되는 거지.
“법적으로는 허용이 안 되는지 몰라도 지금 이렇게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데 뭐.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나쁜 짓만 아니라면, 굳이 출입을 막을 이유가 없는 거겄지. 음악 신청하고 감상하고 차나 마시다 나갈 뿐인데 뭐.”
“그럴까? 근데 오빠, 그 무서운 사람들 말이야, 그치들은 왜 또 병원으로 찾아 온 거야?”
그랬다. 나를 찾아온 이들 중에는 학하리 패거리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돈까지 잔뜩 싸 들고서 말이지. 한마디로 희의 급작스러운 자진(自盡) 때문에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그러나 나는 당연히 녀석들을 그냥 쫓아 보냈다. 아니, 피신 시켜 버렸다. 희가 자살을 한 진정한 이유와 진숙이를 감금하고, 소희를 괴롭혔으며, 희정이를 납치하고, 나를 암매장 시키려 했다는 그 모든 사실들까지도 파리(경찰)들에게 입 벙긋 하나 않은 채 말이다. 희를 사랑하고, 정의를 숭상한다는 호정무인이 대체 왜 그랬냐고? 그거야 당연히 학하리 파 자체를 조용히 내 수중 안으로 거두어들이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 차원에서지. 어차피 내 것이 될 것들인데, 굳이 똥파리들의 경계 대상 1호 목록으로 등재 시켜 둘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 말이지. 희가 슬퍼할 거라고? 아니다. 희는 오히려 이런 내 조치를 양해 해 줄 겨. 그건 확실 혀! 크흑! 희야! 불쌍한 것!
“지 발 지가 저린 거지 뭐.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그 자식들은 반드시 큰 댓 가를 치르고 말 테니까.”
“오빠, 그러지 말고, 그치들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 괜히 위험하게 오빠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잖아? 경찰이 알아서 해결 해 줄 텐데.”
소녀야, 소녀야, 그게 아니란다. 너는 모르면 잠자코 있어주렴.
“소용없는 일이야. 내가 직접 복수를 해야 해.”
“그런데 왜 목숨을 끊으려고 한 건데? 직접 그렇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서?”
요것아! 그거야 너무 괴로워서 그랬던 거지. 복수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정말 괴로워서. 순간적으로 그랬던 겨. 그 대신, 지금은 이렇게 후회하고 있잖니.
“내가 생각을 잘못한거지 뭐.”
느닷없이 승주(혜은이)의 새벽비가 신나게 울려 나온다. 얼렐레? 야간 비행에서 웬 일이여? 여기는 미국 가요만 틀어주는 곳인 디? 그나저나 승주, 당신의 목소리는 어찌 이리도 사랑스럽단 말이오? 나 미치겄소. 딱! 파!
“혜은이는 어쩌면 저리도 목소리가 예쁘지?”
헉! 희정이 너도 승주를?
“희정이 너도 혜은이 좋아하니?”
“당연하지. 혜은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뭐?”
“하긴 그렇지. 그런데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정말 궁금하다.
“국민 학교 6학년 때부터지 뭐. 혜은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그랬었구나.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니, 너 역시 국민 학교 6학년 때부터였구나.
“그랬니? 사실은 나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혜은이 엄청 좋아 했다 너?”
“오빠도? 하기야, 혜은이 같이 예쁘고 노래 잘하는 가수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희정아. 오빠는 승주를 단순히 좋아하기만 하는 게 아니여. 그런 수준이 아니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단 말이여. 장차는 내 애인, 아니 내 아내로 만들 작정도 하고 있단 말이여. 딱! 파!
“그런데 너는 혜은이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하는데?”
“당연히 당신만을 사랑 해지 뭐. 물론, 다른 노래들도 다 좋긴 하지만.”
나는 희정아. 승주의 모든 노래를 다 좋아한단다. 단 하나도 싫어하는 곡이 없어.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노래들이니까 무조건 다 좋은 거 있지? 딱! 파!
“오빠도 그래. 물론, 다른 노래들도 다 좋긴 하지만.”
“나도 그래 오빠. 다른 노래들도 다 좋아 해. 그런데 말이야. 오빠는 아직 이렇게 어린데 벌써부터 왜 그렇게 돈을 많이 벌려고 그래?”
승주 얘기 좀 더 하지. 그래, 이쯤에서 끊지 뭐. 괜히 미련 갖다가 승주를 너보다도 훨씬 더 많이 사랑한다는 속마음이라도 들켜버리면 안 되니께 말이여. 딱! 파! 그나저나 어린 소녀가 되어서 그런지 궁금한 게 디게 많구먼 그려. 하기야 나도 어릴 때는 우리 엄니한테 끊임없이 질문공세를 펼쳤다고 한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 엄니, 참 많이도 성가셨을 것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사실 어제 내가 희정이한테 그랬었다. 돈을 아주 많이 벌려 한다고. 그래, 희정아! 이 오빠는 정말 부자가 되고 싶단다. 그렇게 해서 내 여인들을 모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물론, 물질적인 행복이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돈이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살아가는데 편리한 점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니까.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고, 또 승주와 주미도 행복하게 해 주고 싶고, 진숙이와 옥자도 행복하게 해 주고 싶고, 소희 역시도 그렇게 해 주고 싶고, 또 우리 엄니 역시도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고, 아무튼 무조건 그러고 싶다. 그런데 미안 하구나 희정아. 내 여자가 오직 너 하나만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렇지만, 너무 원망은 말아. 다른 여자들까지 두름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해서, 너를 향한 내 사랑 자체가 거짓인 것은 아니니까. 그래, 나 나쁜 남자여. 마음대로 욕해도 좋단 말이여. 이렇게 문어 다리를 척척 걸치고 있다는 사실 자체부터가 나쁜 남자란 증거일 테니 말이여. 이런 내가 그 무슨 할 말이 있겄어. 그래도 어쩌겄니 희정아. 이제 와서 그 여자들을 죄다 어떻게 내칠 수가 있겄어? 알고 보면, 하나하나 다 애틋한 사연이 있는 여자들인디. 그래서 절대로 이렇게 문어발을 풀어 헤칠 수가 없는 겨. 딱! 파!
“그거야 희정이 너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침에 입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해서 정말 미안 하구나. 딱! 파!
“어떻게?”
설명을 해 줄 테니 잘 들어 둬.
“내가 이번에 그 녀석들 조직을 완전히 접수 해 버리려고 그래. 그래서 그 녀석들이 지금까지 차지하고 있던 모든 잇권까지 깡그리 접수 해 버린다는 것이지. 어때? 신날 것 같지 않니?”
“......”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채로 내 얼굴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가출소녀. 이 오빠가 지금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살아나더니, 머리가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녀? 하는 눈치다.
“희정이 너는 아직 이해가 안 갈 테지만, 그냥 무조건 이 오빠만 믿으면 돼. 잘못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내가 말이야 희정아. 깡패 조직을 접수하게 되면, 우선 먼저 어거지 빚에 묶여있는 아가씨들부터 죄다 해방 시켜 줄 거야. 물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계속 화류계에 남아있겠다는 여자들은 어쩔 수 없겠지.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해방시켜 주려는 시도 그 자체를 그만두지는 않을 거야. 단 한사람이라도 다른 삶을 찾겠다고 한다면 말이지.”
그렇다. 내가 지금 뱉어내고 있는 말이 평소의 내 행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화류계 여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 해 주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또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수없이 까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려 보면 어떨까. 허수창이는 분명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고 있는 선수인거 맞다. 하지만, 정의의 호박씨이기도 하다는 거. 아니, 의리의 호박씨이기도 하다는 거. 조선 시대로 치자면, 마냥 무식한 도적괴수인 것만이 아니라, 홍길동이나 임꺽정, 장길산 같은 그런 비스무리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거. 대충 그런 거 말이다. 너 그런 거 알간 모르간? 딱! 파!
“야간 대형 유흥업소 몇 군데 정도만으로도 족할 거야. 더 큰 욕심은 없어. 거기서 생기는 잇권만 가지고도 너하고 나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다른 내 여자들도 죄다 놀고먹게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딱! 파!
“......”
너는 아직 어리니까, 그냥 모든 것을 이 오빠한테 맡겨두기만 하면 되는 거여. 아무것도 몰라도 돼. 그리고 니가 할 일은 오로지 이 오빠 덕분에 호강만 누리면 되는 거여.
문병을 왔던 탁재현과 정인철에게 그런 의사를 슬쩍 내 비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녀석들 역시 뜻밖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었다. 녀석들이 대번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내가 가진 엄청난 전투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또 다른 이유.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 집 만큼이나, 탁재현과 정인철 녀석의 집 형편 역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찢어지게 빈곤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리라. 인철이 녀석의 경우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늘 양은 도시락에다 점심밥으로 개떡만 싸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집에 쌀 팔아 먹을, 아니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말이지. 그 맛없는 밀가루 개떡을 다른 아이들한테는 별미로 싸 오는 거라고 너스레까지 떨어 댔대나 뭐래나. 어떤 때는 꼬박꼬박 하얀 쌀밥만 싸오는 부잣집 녀석들을 곯려주려고, 빨래비누를 덤으로 가져와서 그 녀석들한테 별미개떡이라며 먹어보라는 장난질까지 쳤었다고 한다. 재현이 녀석의 경우엔 한술 더 떠서 그런 개떡조차 싸 가지고 다닐 형편이 못 되어, 아예 빈손으로 학교에 와서는 하얀 쌀밥만으로 도시락을 싸온 부잣집 아이들 도시락을 몰래 훔쳐 먹거나, 강제로 빼앗아 먹곤 했다는 것이다. 물론, 니들 부모나 선생님한테 이르면, 죽여 버릴 껴 을러대기까지 하면서 말이지. 단, 가난한 집 애들 도시락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기특한 녀석! 그러는 화상 너는 그 때 어땠냐고? 그래도 나는 그 녀석들보다는 형편이 좀 낫긴 했었다. 왜냐하면, 엄니가 팔다 남겨 온 김밥이나 쌀떡들을 매번 도시락으로 싸 가지고 다니곤 했으니까. 밀가루로 만든 개떡이 아니고, 쌀로 만든 떡이라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가래떡이나 인절미 같은 거 말이지.
각설하고, 별님과의 조우 이후, 아직까지 그녀에게서 이렇다 할 접근 시도가 없다. 그 조우가 꿈속의 일이기는 했지만, 생시 느낌과 별반 다른 것도 없었기에 나는 지금도 별님과의 그 조우 자체를 절대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게다가 더 의심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별님이 내게 몰래 주고 간 바로 이 반지 때문이다. 지금 내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이 요상한 반지. 희한한 것은 반지의 성분을 종내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무 성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금속 성분도 아니고, 또 석유 합성물도 아닌 이 기묘한 느낌의 물건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왜 이런 요상한 물건을 몰래 내게 주고 간 거여? 혹시, 이 반지가 천일야화에 나오는 그 요술반지?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주문도 열심히 외워 보았다.
수리수리 마수리 나와랏, 날으는 양탄자!
수리수리 마수리 나와랏, 신기한 요술등잔!
수리수리 마수리 나와랏, 힘센 거인노예!
수리수리 마수리 나와랏, 우주 최고의 미녀 김승주!
수리수리 마수리 나와랏, 더 이상 비교 불가 미녀 혜은이!
수리수리 마수리 나와랏, 그립고 그리운 우리 희!
우랑바리 다라나 빠라냐 무따라까 따라까 빠라냐 요잇!
죄다 소용없었다. 역시, 요술반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요술반지로 줄 것이지 그 별님 참! 딱! 파!
그런 망상에 빠져있던 그 찰나, 느닷없이 가출소녀의 숨 넘어 가는듯한 비명소리가 야간 비행 실내 가득 요란스레 울려 터졌다.
“꺄아악!”
경악에 차 있는 그녀의 시선줄기를 고대로 따라 가보니, 저만치에서 오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 사내 하나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식식거리며 다가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아아...... 빠!”
헉! 아아아......빠?
“희정이 너 이누무 지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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