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7. 16:29ㆍ허세창장편소설

53
느닷없이 내 품에 찰싹 달라붙은 녹수와 더불어 한창 신나게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는 중인데, 느닷없이 장지문이 활짝 열어젖혀지며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에그, 빨리도 뛰어든다. 너 그래 가지고 숙용마마 제대로 보필한다고 어디 가서 자랑 질 할 수 있겄냐? 하기는 그랬을 것이다. 이미 무슨 소리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게 당체 숙용마마의 잠꼬대 소리인지 아닌지 많이 헛갈리고 있었을 터. 그만큼이나 우리의 농탕질(?)은 기가 막힐 정도로 은밀한 상태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지문 하나 사이로도 그 소리가 거의 새나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 그랬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느닷없이 시녀가 비루먹은 강아지 꼴을 해 가지고는 그 자리에 폭 주저 않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내가 손을 쓰지는 않았는데? 그렇다면 혹시 이 여자가?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녹수 당신이?”
끄덕끄덕!
“어 어떻게?”
“구디 케나려 들디 말아. 근아전아 너난 대채?”
“내가 뭘?”
“오째 이대지두 시랄 쑤가 이딴 마리냐?”
실하다? 하긴 맞는 말이긴 하지. 나만큼 실한 사내가 또 어디 있을까. 당신뿐만 아니라 우리 주미에게도 정말 실한 사내이긴 하지. 흐흐흐!
“그러지 말고 말 좀 해 줘 봐. 궁금하니까.”
“그기 그리두 궁구마냐?”
이 여자가 정말? 궁금하니까 물어보지 안 궁금하면 왜 물어봐.
“그렇다니깐!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별 꺼 아늬다. 근아전아 너난 오째 이리두 고분 개야? 오째 이리두 시란 게야?”
에구! 완전히 맛이 갔군.
“내 얼굴이 그리도 고와 보여?”
“아모렴, 곱꼬말꼬. 시상에 태어나써 너맨끔 고분 사나는 처으민 게야.”
“녹수 당신도 마찬가지야. 주미만큼, 아니 하늘만큼 땅만큼 고와.”
“고 고맙따. 글안대 주미? 혹씨 니 애이니냐?”
녹수의 고운 눈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 질투 하는 것인가? 그래, 이럴 때는 좀 속여 주는 것도 괜찮겠지. 속인다고 해서 니가 나를 따라 나설 것도 아니고.
“그냥 이웃집 사는 여자야. 그나저나 저 시녀는 언제 깨어나지?”
“니웃집 녀자라구? 음! 아랐다. 그리고 이 아이는 더 이상 께나지 아늘꺼다. 귀차늘 꺼 가타 아예 수믈 끄너 노아타.”
뜨억! 숨을 끊어놓았다고? 독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녀 같으니. 하지만, 이런 정의는 썩 잘 들어맞는다고 볼 수는 없다. 보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나야 당연히 전자 쪽이지. 이런 여자가 냉혈녀가 아니면, 도대체 어떤 여자가 또 냉혈녀란 말이여? 그런데도 왜 당장 냉혈녀 곁을 벗어나지 않느냐고? 그거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 아녀? 쫄깃쫄깃 그 맛을 아실랑가 모르시겄네! 딱! 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 죄도 없는 여자를 함부로 죽이다니? 당신 왜 그렇게 독한 거야? 이래도 되는 거야? 하늘이 두렵지도 않아?”
“하날이 두렵찌 안냐구? 호호호! 역시 너난 안즉 어린 사네야.”
“이러니 다들 장녹수를 보고 독부라고들 하지.”
“독부? 호호호! 틀린 소래도 아늬다.”
졌다. 더 이상 내가 족치고 들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왕에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마지막으로 이 얘기만 하나 들려주고, 이만 이 여자와의 상봉은 끝내 버리는 게 좋겠군. 사람까지 죽인여자 하고 계속 그 짓거리를 이어간다는 것이 솔직히 께름칙한 것도 사실이니 말이지.
“그런데 녹수, 연산이 천하에 개잡놈이란 거 알아?”
“무 무시라? 느 느 갑짜게 왜 또 니러는 그냐? 내가 즈 애랄 손 봤따고 그라는 그냐? 상감 야그는 하지 말레두.”
“연산이 제 숙모뻘인 월산대군의 첩을 잡아먹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느 지금 도다채 모슨 소레랄 하고 인난 그냐? 니난 증녕쿠 광이니 분명타. 그러치 안코서야 하느 말마따 어찌 니리......”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광인이지. 그것도 색광. 흐흐흐!
“잘 있어 녹수! 이젠, 열여덟 살의 녹수를 보러 가는 길이니, 굳이 인사를 할 필요는 없겠군. 그래도 잘 있어 녹수!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주 소중한 만남이었어. 그리고 녹수한테 내려지는 운명의 심판도 겸허히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기왕에 그렇게 되는 거 의연하게 받아 들이라는 말이야. 물론, 힘든 일이기는 하겠지만 말이지.”
에고 아깝고 불쌍한 것!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너를 도와 줄 수 있단 말이냐. 나 하나 몸도 주체하기 힘든 판에.
“느 대채 즈금 무신 마를 해고 인느 거시냐? 내느 당체 느가 무스 마를 해고 인는지 모르게꾸나. 그나저나 이고슬 어떠케 빠저 나간다는 거시냐? 드러 올 때느 어떠케 료행수르 수머드러와쓸찌 모르게쓰나, 나갈 때난 그리 호락호락카지가 아날끈대. 그러니 우리 함깨 잠시 방도랄 모새케 보자. 그러케 모작쩡 서뒤른다고 될 니리 아늬다.”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그저 연기처럼 사라지면 된다니까.”
“연기처람?”
“그렇다니까. 잘 있어 녹수!”
“아된다. 아되!”
“안녕!”
관자놀이를 두 손끝으로 압박을 하며 꽃다운 열여덟의 녹수 처녀가 들녘에서 봄나물을 캐고 있는 시간대로 보내주길 반지에 염원하니, 벌써 내 몸뚱이는 화사한 새 봄날의 한적한 저 들판아래 동그마니 쪼그리고 앉아있는 녹수 처녀의 곁에 곧바로 서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녹수처녀는 지금 열심히 봄나물을 뜯고 있는 중이었다. 수수한 무명 저고리 차림에 무명 치마를 에둘러 입은 모습이긴 하나, 젊은 처녀로서의 싱싱하고 풋풋한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드니, 아닌 대낮에 홍두깨 격으로 느닷없이 출현한 산 도적놈 같은 내 모습을 본 녹수가 기겁을 하며 바구니마저 팽개치고는 죽자 사자 도망질을 쳐 대는 것이 아닌가. 온 들판이 떠나가도록 비명까지 내지르면서 말이지. 흐흐흐! 나 같아도 정말 황당했을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소년이 느닷없이 현신을 해 버렸으니 말이지...... 가 아니고, 신기하게도 나는 지금 나체상태가 아니다. 아래위로 완전히 옷이 입혀져 있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과거로 떠나올 때 입고 있던 그 가림 옷이 아니고, 느닷없는 학교 교련복이라는 사실이다. 얼룩덜룩하고 후줄근한 그 교련복 말이지. 바로 그런 이유로 녹수가 저리도 놀래서 달아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허수창이 고교시절을 보내던 그 당시만 해도 소위 교련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학생 집단을 학도의용군 비슷한 준군사조직으로 만들어, 평상시에는 일반 학과 수업과 교련 훈련을 병행 시키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죄다 전선으로 투입 시키는 범국가적 병력자원 운용 정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요즘도 교련 시간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조사를 해 보지 않아서 글쓴이 자신도 잘 모르겠다. - 글쓴이 주)
반지 이 녀석, 정말 웃기는 녀석이네. 이 자식 이거 혹시 장난질 무지 좋아하는 녀석 아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 디? 어찌됐든 그건 나중에 따져 보기로 하고, 일단은 녹수 처녀를 쫓아가야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즉시 높이 도약해서는 엎어질 듯 구를 듯 죽기 살기로 도망을 치고 있는 녹수의 바로 앞 쪽으로 사뿐하게 날아 내렸다. 그러고는 씨익! 하고 썩소 한방을 쏴 주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녹수의 낯빛이 하얗게 변색이 되면서 곧바로 풀썩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거 참 예쁜 처자가 기절도 잘한다. 이렇게 여리고 순박했던 시골 처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폭군의 갈보가 되어 버릴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사람팔자 뒤웅박, 아니 여자팔자 뒤웅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이다.
오뉴월 엿가락처럼 축 늘어진 녹수 처자의 몸뚱이를 번쩍 안아들고는 시골의 오솔길을 한가로이 걷고 있노라니, 저기 저쪽에 봄맞이꽃 하얀 다섯 잎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해 있고, 노랑제비꽃 다섯 잎들도 저곳 이곳에서 살랑대며 모두들 내게 시샘의 눈길을 보내오는 것만 같다. 도적놈이 제발 저려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 흐흐흐!
그나저나 공기 좋고 물 맑은 우리네 옛 시골의 정취가 고스란히 눈앞으로 펼쳐지고 있어서 그런지 기분은 더더욱 상쾌하다. 개울물 졸졸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풀 숲 사이의 작은 너럭바위 위에 이르러 축 늘어져 있는 녹수 처자의 몸뚱이를 조심스레 한 쪽 편에 뉘어놓고는 양말을 벗어들고 아직 차게 느껴지는 춘삼월의 개울물에 살짝 발을 담가보았다. 역시, 오염되지 않은 오백년 전 조선의 시골 계곡물 속이라서 그런지 발등을 간질이는 맑은 물의 느낌부터가 무언가 달라도 한참은 다른 것 같다.
그 순간,
“꺄아악!”
째질 듯한 녹수의 비명성이 내 귓속을 사정없이 후비고 든다. 개울가 주변을 장식하고 섰던 모든 나무와 풀잎들, 그리고 가재와 송사리 달팽이 개구리 같은 모든 것들도 덩달아 기겁들을 하는 듯싶다.
어쨌거나 최대한 빨리 녹수 처자를 안심시켜 주어야 할 듯싶다. 그런 소박한 내 바람에도 불구하고 녹수 처자는 기어코 엎어지고 자빠지는 모양새를 하며 정신없이 개울물을 건너 저쪽으로 미친 듯 내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낯선 사내를 경계하는 젊은 처자의 그런 허둥거림이 참으로 신선하고, 싱그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가 떠나온 시대를 살아가는 도시 처자들에게서는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원초적 순박미라고나 할까.
휘릭!
꺄악!
휘릭!
휘릭!
척!
이 다섯 의성어 내지는 의태어를 굳이 설명 해 보자면, 휘릭 날아서 꺄악 소리 지르는 녹수의 몸뚱이를 휘릭 낚 채서는 다시 휘릭 날아서 척 하고 너럭바위에 내려선 상황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된다.
녹수 처자를 꼭 껴안은 채로 너럭바위의 한 가운데 천천히 쪼그리고 앉았다. 녹수는 이제 온 몸을 바들바들 떨어대고 있다. 삼십 대 녹수에게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참으로 싱그럽고 신선한 느낌이 아닐 수 없다.
“놀라지 마시오 녹수 낭자!”
그랬음에도 녹수 처자는 감은 눈 자체를 다시 뜨려고 하지를 않는다. 떨리는 몸뚱어리 때문인지 눈물 젖은 속눈썹마저 가늘게 파동을 짓는다.
“안심하오 녹수, 나는 도깨비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오.”
그랬음에도 여전히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고, 흐르는 눈물을 좀체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녹수 처자.
“안심하라니까요. 나는 당신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소. 그냥 당신과 이렇게 잠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오.”
“대 대근?”
떨려 나오는 처자의 목소리가 서른 살 녹수의 그것 하고는 많이 다르다. 서른 살 녹수의 목소리가 농익은 과일의 맛이라면, 처녀 녹수의 그것은 설익은 풋과일의 맛 딱 그것이다. 어쨌거나 농익은 과일이건, 설익은 풋과일이건, 제각기는 그 나름대로의 맛과 향취가 있는 법이니, 어떤 게 더 낫네 아니네 따질 필요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음, 나는 말이오. 저 멀리 충청도 땅에서 온 허 도령이라고 하오.”
맞는 말 아닌가? 대전이 곧 충청도 땅 안에 있는 도시니 그렇고, 내 성이 허씨니 허 도령도 맞는 것이고, 나는 지금 녹수 처자한테 단 한입도 거짓뿌렁을 말하지 않고 있다.
“......”
“왜 거짓말 같소?”
도리도리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어주는 녹수 처자의 빛나는 눈동자. 언제 그렇게 겁을 집어먹었냐는 듯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이 당당한 눈빛. 그 눈빛 한번 정말 영롱하네. 승주 역시도 어릴 때는 이랬을까? 그래, 얼른 승주도 만나 보러 가야지. 승주가 어렸을 때의 그 시절로 한번 가 보는 거야. 그래서 어린 승주를 안아도 주고, 업어도 줘 보는 거야.
“그란대 어 어뜨케?”
서른 살 녹수에게 해 주었던 설명을 다시 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처녀 녹수의 외양이 김지미 처녀 때 모습 그대로라는 모습을 확인 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 이 정도면 정말 아름다운 거야. 더군다나 옛날 여자치고는 아주 특이하게 예쁜 거라고 보면 되겠군. 하지만, 딱 여기까지 만이다. 나는 결코, 집에 있을 때도 영화배우 김지미한테 마음을 빼앗겨 본적이 없다. 김지미 뿐만 아니라 남정임, 문희, 윤정희 같은 일류 여배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단 하나 오직, 인기 여가수 혜은이, 김승주 그녀에게만 내 온 마음을 송두리 째 빼앗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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