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4. 15:39ㆍ허세창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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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진 동명중학교(동네에 있는 남자 중학교) 운동장.
하늘에서는 수많은 별빛들이 보석이라도 뿌려놓은 듯 찬란한 빛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 곳의 별무리는 마치 두어 시간 전에 내게 일어났던 일 따위는 별 대단한 사건도 아니라는 듯, 그 안에서 저마다의 밝기를 마음껏 뽐내며 끊임없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두런거리고 있는 것 같다. 아니다 별들아. 오늘은 진정으로 내게 있어서 최고로 기념할 만한 날이란다. 드디어 내게도 현실에서 실제로 사랑하는, 아니 사랑하고픈 여자가 생긴 날이거든. 승주, 미안하오! 굳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일단은 내게도 여자가 필요하오. 딱! 파! 그러니 너희들도 기꺼이 내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 주어야 해. 비록,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아닌, 연상의 여인, 그것도 애까지 딸린 유부녀이긴 하지만. 승주는 뭐 연상의 여인 아닌가 뭐!
그런데 말이야. 저기 저 별무리의 한쪽에서 빛나고 있는 유난히 큰 별 녀석 하나는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 분명히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한데, 어쩐지 자꾸만 움직거린 느낌도 든단 말이야. 요상해 정말! 정말로 요상해! 혹시 그 여자로 인한 벅찬 희열감 때문에 발생한 마음의 동요 때문인 것일까? 십중팔구는 그럴지도 모른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저 별만 특별히 유난을 떨어댈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 봐. 다른 별들도 죄다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말이지.
아 물론, 보다 정확한 표현을 해 보자면, 본래부터 별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행성별, 항성별 -여기서 잠깐, 천문학자들은 주장하길 항성만이 별이고 행성은 별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학생들의 호박통을 대단히 헛갈리게 만드는 얄궂은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항성인 태양도 별이고, 행성인 화성이나 토성도 별이라고 칭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명왕성, 해왕성, 혜성, 소행성 등 제 모든 행성의 뒤에 붙는 성자가 바로 별 성(星)자를 쓰기 때문이다. 별 성자를 쓰면서도 정작, 별이 아니라고 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자가당착적인 주장이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태양도 별이고, 지구도 별이고, 화성도 별이고, 소행성도 별이라고 일단 칭 해는 주되, 태양은 스스로 빛나는 항성별, 수성이나 화성이나 혜성 같은 것들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 행성별이라고 해 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헛갈리게 항성만이 별이고, 행성은 별이 아니라는 이상한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가 이 말이다. 사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천문학자들의 주장만이 옳다고 인정을 해 버린다고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 될 수밖에 없다. 윤동주 시인이 말하는 별 헤는 밤 속의 별 들 중에서 화성이나 토성 같은 행성 별들은 별이 아니니 응당 집게로 콕 집어내어야만 하고, 또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 속에서도 수성이나 천왕성 같은 행성 별들을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서 쏙 덜어내 버려야 한다는 아주 요상하고도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현상을 겪을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들이나 화가들이나 음악가들이 말하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의 의미는 당연히 항성별이나 행성별을 모두 아우르는 밤하늘의 모든 빛나는 것들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수십 만 년 전 우리들 조상 때부터 죽 이어져온 가장 자연스럽고도 경외스럽고 낭만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이건 어느 책에도 없는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다. 말인즉슨 그렇다는 것이다. -할 것 없이 죄다 나름대로 어떤 축을 기준점으로 하여 주기적인 회전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말이지.
사실 항성별의 경우, 본래는 장거리 여행자라서 자신이 속해있는 은하의 중심부를 기준점으로 열심히 회전운동을 하고 있다. 항성별인 우리의 태양도 마찬가지고. 또 행성별인 우리의 지구는 항성별인 태양둘레를 열심히 돌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여기서 내가 방금 전에 언급한 별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뜻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쉽게 말해서 그냥 밤하늘을 한번 쓱 휘둘러봤더니, 음,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군! 하는 뭐 그런 단순한 의미라고 보시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저 놈의 별 녀석 때문에 또 필요 이상으로 장광설을 늘어놓고 말았네유. 지송혀유 독자님들.
각설하고, 일단 별 녀석이 안 움직거렸다고 치부하고, 다시 또 운동장의 한 구석에서 열심히 호정무 수련을 지속하기로 한다. 벌써 두 시간 째다. 본래는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밥을 먹고 난 뒤, 3층 옥상으로 올라가서 한 시간 정도 호정무를 단련하는 게 내 일과인데, 그 인간과의 예정에도 없던 푸닥거리 때문에 일정이 이렇게 틀어지고 만 것이다.
땀까지 흘려가며 열심히 수련에 몰두해서 그런지 급격히 허기가 끼쳐온다, 장광설의 원인이 된 그 별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역시 대기의 흔들림 때문에 빚어진 착각현상이 분명해 보인다.
그나저나 엄니가 저녁밥을 지어놓고 많이 기다리실 텐데,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겨? 하루 종일 떡 함지박 머리에 이고서, 시장 길이고 골목길을 힘겹게 누비시느라 신역이 많이 고되셨을 텐데 말이지. 물론, 엄니는 내가 늦게 들어가도 크게 타박은 하지 않으신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어진 걸로 착각(?)을 자주 하시니까. 딱! 파! 그래도 일단은 돌아가자. 배고파 죽겠으니까. 그리고 전직 꼰대 녀석도 크게 원망은 하지 말자.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아니던가. 전직 꼰대 녀석의 그 헛발질 덕분에 오늘 아주 극적으로 녀석의 여자와의 관계도 새 전기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녀석이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벌이지 않았던들, 언감생심 어떻게 애기엄마의 손에다가 외간 남자, 그것도 고삐리의 손을 깎지 끼워 넣을 용기를 내어 볼 수 있었을 것인가. 진정으로 고맙소 전직 꼰대여! 고삐리 따위에게 곱게 그렇게 얻어터져 주시고, 또 그대의 어여쁜 아내마저도 곱게 그렇게 헌납 해 주시다니 말이오. 딱! 파!
시나브로 더 해만 가는 애 엄마를 향한 열망과 사내의 동정(動靜)에 대한 궁금증, -설마 아직까지도 녀석이 현관 문 앞에 그대로 널부러져 있는 것은 아니겄지? -그리고 주린 배의 느낌을 동시에 안고서 다시 대문 안으로 쑥 들어섰을 때, -오늘은 내 통학용 자전거의 바퀴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바람이 쑥 빠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냥 집에 놔두고 도보로 등교를 했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보이지 않고, 이층의 우리 집 회사물 마당으로부터 뭔가가 시끄럽게 짖어대고 있는 소리만이 아래층 마당 쪽으로 우렁우렁 울려오고 있었다. 바로, 사내의 목소리였다. 저 새끼가 증말! 네 녀석이 보기 싫어서 배고픔도 참고 일부러 이렇게 충그리다 왔건만......
녀석이 짖어대는 소리 사이로 간간히 엄니의 목소리도 함께 섞여 들려온다. 정말 귀찮은 녀석이군. 가만, 그게 아니지. 새옹지마. 그래 새옹지마를 잊지 말자. 녀석이 짖어대던 아니건, 되어가는 대로 두고 보면 되는 거야. 혹시 알아? 또 좋은 일이 생길지?
그런 기대감을 안고, 계단의 가장 위쪽에다 발끝을 막 디뎌 놓았을 즈음, 야호! 역시 예상대로였어. 말 그대로 새옹지마는 살아 있다가 아닌가. 여자의 숨이 막힐 듯한 저 고운 자태를 보라. 게다가 아기를 포대기에다 둘러업고서 한쪽에 오도카니 서 있는 저 모습이라니. 하! 정말 예쁘네. 아니, 매혹적이네. 누가 애 업은 여자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럽다고 감히 개소리를 지껄여 댔던가. 촌스럽기는커녕, 저토록 색정적이기만 한데. 딱! 파!
그런 내 뜨거운 욕정감이 강력히 전이된 때문일까? 여자 역시도 파브로우의 조건반사처럼 급격히 반색을 표해 온다. 이건 뭐 옥중에 갇혀 있던 춘향이가 이 도령이라도 다시 만난 모습 같다. 게다가 우리 집 마루 등으로부터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그스름한 전구의 불빛이 홍조끼 가득한 그녀의 조막대기안(顔)을 더욱 더 신비한 모습으로 치장 해 주고 있다. 정말 대단한 미모에 엄청난 색정미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이씨 조선에서 태어났으면, 황진이 뺨치는 아주 유명짜한 기생이 되었을지도. 아니면, 장녹수나 장희빈이 추녀로 보이게 할 만큼의 임금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간부(姦婦)가 되었을지도. 아무튼, 그 정도로 여자의 자태가 고와 보인다는 뜻이다. 물론, 여자를 향한 내 욕망의 크기가 자꾸만 확대되고 있는 단계라서 더 그런 생각이 커져 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미안 하오 승주! 나 정말 요즘 여자가 많이 고파진 거 같소! 딱! 파!
어쨌거나 저런 대단한 색정미를 지닌 여자를 고삐리에 불과한 내가 이리도 손쉽게 취하게 될 줄이야. 이게 정녕 꿈은 아니겄지? 미치겄다 증말. 포대기를 두른 정숙한 부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강렬한 색정미를 느끼게 되는 이 이율배반적인 현상이라니. 마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남편의 상중에도 상복 차림 그대로 외간남자(레트 버틀러)의 유혹을 끝내 참아내지 못하던 그 장면 비스무리 하지 아니한가. 딱! 파!
그나저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저런 기막힌 미녀가 -물론, 김승주보다 미모가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어떠한 미인이라고 해도 감히 김승주의 미모 수준에는 필적하지 못한다.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작자의 마누라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저 녀석 저거 대체 무슨 복을 타고 난 겨? 혹시 저 여인이 학교 꼰대를 좋아하는 특이한 체질이라서? 아니면, 두 사람이 초등학교 동창내지는 같은 대학교를 나온 같은 동아리의 선후배 사이라거나 또는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잘 아는 처지라서? 또는 저 녀석 불알친구의 여동생이라도 되어서? 아니면, 녀석이 우연히 길거리에서 저 여인을 발견하고는 눈이 뒤집힌 채 찐드기마냥 마구 들러붙는 바람에?
그래, 녀석의 품성을 봤을 때는 십중팔구 마지막이 정답이 될 확률이 높다. 여자가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녀석이 야수처럼 달려들어 강제로 대못을 쾅쾅 박아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지. 여자 역시도 평소에 워낙 색정끼가 강력한데다가 또 녀석의 시건방진 저런 태도가 오히려 박력 있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여. 그래서 결국, 녀석의 만행(?)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테지. 그렇게 긴가 민가 애까지 낳아가며 살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렇게 녀석의 가면 속에 숨어있던 진면목을 깨닫게 된 것이겠고.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영화필름처럼 호박 통 속을 주르르 흐르고 있는 사이, 사내는 이미 제 부모 죽인 원수라도 다시 만난 양, 게거품을 물고서 빠르게 내 앞으로 이동 해 와 있었다.
"너 이 새끼 잘 왔다! 너 따위가 감히 나를 치고 도망을 쳐? 어디 이 새끼, 다시 한 번 쳐 봐! 어서 쳐 보라니까 새끼야!"
하며 미친개처럼 들이대는 사내의 모습. 하지만,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이미 아까만큼의 그 당당함(?)이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무언가 살짝 김빠진 맥주 꼴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샌님주먹을 움켜쥔 저 모습 또한, 무언가 많이 어정쩡해 보인다. 왜 그거 있지 않은가. 성깔이 더러우면서도 동시에 겁은 많은 그런 아이들이 저 보다 힘센 아이한테 함부로 엉기고 들었다가, 보기 좋게 줘 터져놓고는, 그 분기를 차마 삭이지 못하고서, 꼬리 총총 감아 들인 멍멍이처럼 짖는 소리만 계속 내고 있는 상황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학교에서도 겁 대가리 없이 내게 게기고 들었다가 그대로 묵사발이 되고 만 아이들은 대개가 꼬리말아 들인 강아지 꼴을 해 가지고 나를 슬슬 피하기만 한다. 아, 물론 그런 경우는 아이들이 미처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던 1학년 말 때까지의 일이다. 그 이후로는 전교에 이미 내 소문이 좍 돌아서 함부로 엉기고 드는 인간 자체가 없다. 노는 애들이나 상급생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부 꼰대들조차도 그저 나를 힐끗거리며 몸을 사리기만 할 뿐, 시비 자체를 걸어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저 사내 역시도 이미 내 매운 주먹 -비록, 강도를 아주 많이 낮춘 것이긴 했지만-을 맛보고 난 뒤, 단단히 겁을 집어 먹은 것은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저렇게 우리 집까지 왕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야 당연히 전직 교사로서의 강력한 자존감 내지는 긍지감 같은 것일 것이고, 또 그로 인한 말할 수 없는 치욕감 내지는 수치감, 굴욕감, 분노감 같은 것 때문이리라. 자기보다 한참 어린 고삐리 녀석에게 어이없이 줘 터지고 만 굴욕감이 어디 보통 굴욕감인가. 하지만 이 녀석아! 그것도 다 자업자득인 겨. 당신 같은 녀석은 그 치욕감을 백 배 천 배 더 맛보아도 싸단 말이여! 아니 어디서 감히 겁 대가리도 없이 고딩 스라소니-실질적으로는 전국 도시의 밤무대 똘마니들과 고등학교의 노는 아이들, 그리고 등빨 좋은 운동부 학생들 전부를 아우르는 그런 진짜 실력자-의 용안에다 싸대기를 날려오냐 이 말이여? 그리고 네 여자, 아니 이제부터는 실질적으로 내 여자가 되어버리고 만 저 여자를 허구 헌 날 그렇게 갈구어대고 패대고 하느냐 이 말이여? 이 똥을 싸 뭉개 쳐 발라도 시원치 않을 녀석아! 딱! 파!
“여보! 그만해요. 그리고 어서 내려가요.”
여자가 갑자기 그 독특한 목소리 -비음이 살짝 섞여 있으면서 요들송처럼 미세하게 뒤집어지는 맛이 일품이다. 어찌 보면, 승주 목소리 하고 비슷한 면도 있다. -로 제 남편을 만류하고 나선다. 그 소리에 힐끗 제 아내, 아니 이젠 내 여자 쪽을 돌아보는 사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자의 뇌쇄적이면서도 고혹적인 눈빛은 오히려 제 남편 쪽이 아니고, 내 쪽을 향하고 있다. 아니, 말을 건 건 남편 쪽인데, 왜 시선의 방향은 내 쪽이냐고? 희한하지 않은가? 그렇다. 저런 요상하고도 기묘한 사분거림 맛이 바로 저 여자만이 간직한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자기한테 이상형으로 느껴지는 사내가 눈앞에 번쩍 뜨이기라도 하면, 누가 보거나 말거나, 심지어 제 남편이 곁에 있거나 말거나 노골적이고도 거리낌 없는 태도로 색끼를 발산 해 주는 저런 모습. 그러나 평소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요조숙녀처럼 굴어대는 새침한 모습. 아니 그것은 직접 확인 해 본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틀림없을 거 같다.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아니 계집처럼 그럴 것이 분명하다. 물론, 여자의 저런 처신이 일반적인 도덕기준으로 봤을 때는 크게 지탄받을 일임엔 분명하다, 중동 회교국가에서라면 돌 맞아 죽을 일이기도 하겠고. 하지만 내게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저런 태도가 내게는 더 귀엽고, 대견하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 그건 마치 여자가 나쁜 사내에게 더 강한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것처럼, 사내 역시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착하기만 한 남자와 여자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저런 류의 여자를 정인(情人)으로 취하게 될 경우, 다른 여자들보다는 특별히 더 관리에 신경을 써 주어야 하겠지. 여차하면 또 다른 놈에게 그 유혹의 눈길을 강렬하게 뿌려댈게 분명하니 말이여. 하지만 그대는 이제부터 결코 그런 짓을 못하게 될 겨. 아니, 그럴 염의를 낼 수도 없을 겨! 딱! 파!
“뭘 그만 해? 너 내가 아까 이 자식한테 당한 거 못 봤어?”
“여보!”
“참견 말고 너나 내려가 있으라니까. 너 왜 자꾸 내 말 안 들어?”
인간아, 인간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들 보는 앞에서 아내한테 대고 너가 뭐니 너가? 전직 교사? 흥! 개 코나 전직교사다. 아참, 니 아내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내 여자지만. 딱! 파!
"그만 하시죠 아저씨. 그리고 내가 깨끗이 사과하겠수다. 정말 미안하게 됐수다. 본의 아니게. 그러니 아주머니 모시고 어서 내려가요."
그렇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오로지 내 엄니와 네 여자, 아니 내 여자 때문이다. 인간아, 결코 너 따위가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여.
“뭐 깨끗이 사과하겠수다? 미안하게 됐수다? 이 새끼야, 내가 니 친구니? 그게 학생 놈이 사과하는 말투냐? 무릎 꿇고 공손히 사죄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어디서 그 따위 말투가 있어. 싸가지 없는 놈의 새끼!”
하! 그 인간, 자꾸 주둥이 귀찮게 만드네.
“자꾸 그렇게 욕하지 마슈? 참는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먼저 때린 게 아니지 않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아저씨가 먼저 쓸데없는 참견을 하고, 또 손찌검까지 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거잖수. 아무튼 미안하우. 연장자한테 대든 거는 무조건 내 잘못이니, 깨끗이 이렇게 사과하겠수다. 그러니 그만 화 풀고 내려가요.”
“그 따위 시건방지게 건성으로 하는 사과 못 받겠다 새끼야. 그리고 니가 안 참으면 어쩔 건데? 건방진 새끼! 욕하는 것도 니 허락받고 해야 하냐? 다 필요 없어 새끼야! 너 같이 시건방진 새끼는 콩밥을 먹여야 돼! 어린 새끼가 감히, 겁 대가리도 없이 어른한테 대들어? 그리고 어른한테 손찌검을 해?”
끙! 이걸 그냥 미친 척 하고 또 줘 박아?
"여보, 제발 좀 그만해요. 학생이 저렇게까지 사과를 하고 있는데."
미안 하오 내 사랑. 좀 더 공손한 말투로 사과를 못해서. 하지만, 그 이상은 내게도 무리라오. 더 이상 여기서 공손해질 수가 없구려. 여기서 더 살살거리는 말투를 쓰게 되면 몸뚱이가 간지러워져서 두드러기가 날 것 같단 말이오.
“너나 그만 둬 이 년아! 너 정말 안 내려가고 자꾸 그렇게 초치고 들래?”
그래, 나한테는 오히려 좋은 일이다. 네가 그렇게 계속 네 마누라한테, 아니 내 여자한테 망나니처럼 굴어야, 네 마누라, 아니 내 여자도 더 더욱 내게 들러붙으려고 할 게 아니겠는가. 아잣! 새옹지마!
“왜 자꾸 욕은 하고 그래요?”
“니년이 자꾸 쓸데없이 참견하고 나서니까 그러지! 너 지금 당장 안 내려가면 오늘 밤 또 국물도 없을 줄 알어?”
얼씨구! 이젠 제 아내, 아니 내 여자한테 협박까지? 그래. 계속해라. 새옹지마라니까. 그나저나 국물도 없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 진짜 물리적인 매타작? 아니면, 여자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센 요분질? 아니지. 그건 절대 안 된다. 매타작도 거센 요분질도 절대 허용할 수 없어. 왜? 이제부터 네 여자는 내 여자니까. 딱! 파!
“싫어요. 죽어도 절대 그렇게는 못해요.”
아싸! 잘한다! 우리 애기엄마 선수 아잣! 그나저나 이쯤 되면 저 인간도 무언가 분명히 눈치를 채게 되었을 텐데, 아무리 둔한 인간이라고 해도 여자가 저 정도까지 노골적으로 나오는데 눈치를 못 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것일까? 혹시,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저렇게 부득부득 더 게기고 드는 것이고? 그럴지도 모르지. 사내만의 강한 직감 -여자만이 직감이 있는 게 아니다. -으로?
“그럼 너 거기서 잠자코 있어. 자꾸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계산은 이따가 따로 하자고.”
놀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하도 기가 막혔던지, 어이없는 눈길로 죽 지켜보고만 계시던 엄니가 드디어 입을 여신다.
"이 보우 애기아빠, 보자보자 하니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우? 내가 보기엔 애기 엄마가 바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디.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러두 우리 아들을 콩밥을 멕이겠다니, 그거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우? 우리 아들이 잘못을 했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못을 했다구. 설사 그렇다 쳐두 저리 미안하다구 사과까지 하고 있는 디?"
"너무 하다니요 할머니! 내 여자 내 마음대로 하는데 당신이 왜 참견이야? 그보다 할머니 아들놈이 나를 때렸다는 소리 몇 번 해야 알아들어요? 망나니 같은 당신 아들놈한테 맞아서 여기 이렇게 부어오른 거 안 보여요? 그래서 콩밥을 먹이겠다는데?"
끙! 할머니! 당신! 저 자식이 증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정말, 인내하기 힘들군. 하지만, 그래도 참아야 하느니.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멈출 수는 없느니. 딱! 파!
“아저씨, 자꾸 그렇게 억지 좀 부리지 마쇼. 내가 일부러 아저씨 안 다치게 살짝 배려를 해서 주먹도 날린 건데. 도대체 어디가 부어올랐다고 그러슈? 눈을 씻고 봐도 부어오른 곳이 없구만.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 자체가 아저씨가 먼저 내게 시비를 걸어왔고, 또 먼저 내 뺨에다 손을 대서 이렇게 된 거 아니우? 왜 아저씨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 하는 거요?”
“뭐야? 아니 이 자식이 정말? 그래,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너를 때렸냐? 니가 먼저 욕설을 내뱉고, 또 어른을 함부로 무시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끙! 인내! 인내! 내 여자의 저 간구하는 눈빛을 보라. 알았소 내 사랑. 내 어찌 그대의 마음을 모르겠소. 좀 더 살살거려 보리다.
“자 자, 다 그렇다고 치고 이젠 그만 둡시다. 아저씨가 사나이라면 깨끗하게 내 사과 받으시고, 이쯤해서 내려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보아하니, 아저씨도 보통 성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미안하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몸이 근질거린다. 혹시 살살거리다 몸이 근질거려 뒈져버린 사람도 있으려나? 있을 껴. 분명히!
“필요 없언 마. 그 따위 마음에도 없이 마지못해 하는 사과 내가 받아들일 것 같냐? 너 내일 내가 분명히 진단서 끊어서 경찰서에 고소장 제출 할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 너 같이 쏴가지 없는 놈은 이번 기회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놔야 하니까.”
끙! 싸가지도 아니고, 쏴가지?
“여보, 제발 이러지 말아요. 어린 학생이 작은 실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당신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진정으로 사과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 잘하고 있어요 내 사랑! 어이구 착하지 우리 아기! 딱! 파!
“작은 실수? 뭐가 작은 실수야? 저 자식이 두 번씩이나 내게 주먹질을 해 댔는데 그게 작은 실수야? 너는 대체 누구 편이냐? 니 서방 편이냐 저 자식 편이냐? 너 그렇게 자꾸 나서지 말라고 그랬지?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어? 가만, 너 혹시 저 자식 반반한 면상떼기 때문에 자꾸 편들고 나서는 거 아냐? 너 저 자식한테 반했냐?”
쿵!
찰나의 정적이 영겁의 시간처럼 흐르고 있다.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변해있는 엄니의 얼굴. 그리고 정곡을 제대로 찔려버린 고삐리 소년과 그 소년의 예비 정부(情婦). 결국, 엄니가 먼저 입을 열고야 마신다.
“젊은 양반이 정말 경우가 없구먼? 듣자하니께 선생질까지 해 먹었다든 사람이 어찌 그리도 막말을 함부로 내뱉는 겨? 참말로 몹쓸 사람이구먼!”
지송혀유 엄니. 지도 배알이 뒤틀리긴 하지만, 지금 저 인간이 한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은 아니구먼유. 에그, 그저 죽을죄를 졌시유 엄니. 하지만 이건 제 탓이 아니랑께유. 죄다 저 여자가 저렇게 해끔한 면상을 상판대기에다 매달고 있어서 벌어진 사단이랑께유. 엄니도 한번 생각을 해 봐유. 어떻게 저리도 면상 희멀건 여자를 사지 멀쩡한 사내가 되어 가지고 설라무네 그냥 냅두고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유. 또, 엄니 역시도 당신 아들네미를 너무 지나치게 번듯하니 낳아주셔서 생긴 일이기도 합니다유 네네. 어떻게 이리도 잘난 사내에게 저토록 해반주르르한 여자가 안 끌려들 수 있겄습니까요.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니겄어유? 이건 진실로 음양의 조화와 관련된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불과하다니께유. 따라서 이건 엄니 아들놈의 책임도 아닌 것이고, 또 저 여자의 책임도 아니랑께유. 어차피 불거져야 될 일이 아주 자연적으로 불거져 버린 지극히 온당한 현상이라니께유. 옛날 신문에서 본 어떤 국민 학교의 서른두 살 먹은 여교사와 열두 살 먹은 남학생 사이의 응응 사건, 또 서른 살 먹은 국민 학교 남교사와 열두 살 먹은 여학생 사이의 응응 사건, 그리고 서른다섯 살 먹은 중학교 여교사와 열다섯 살 먹은 남학생과의 응응 사건 같은 것들도 다 그런 이치로 온당하게 발생한 일 아니겄슈 엄니? 게다가 세상에 밝혀진 경우가 겨우 그 정도라는 것이지, 드러나지 않은 경우는 말 그대로 부지기수로 널렸을 꺼구먼유 엄니. 딱! 파!
“......”
엄니의 강력한 반격 탓이었을까. 사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잠시 할 말을 잊고 있다, 그러더니 또 제 아내, 아니 내 여자에게 엉뚱한 화풀이를 해 대기 시작한다. 저 자식이 오늘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내 여자가 무슨 죄가 있다구 자꾸 그렇게 갈궈대는 겨? 딱! 파!
“너 정말 빨리 안 내려가? 모가지를 비틀어 버려야 정신 차리겠어?”
“그래요. 비틀어요. 차라리 그냥 이 자리에서 당신 손에 비틀려 죽는 것이 나아요.”
“아니. 이 년이?”
“응애에!”
흐흐! 신파극이 따로 없군. 어찌됐든 이쯤해서 빨리 정리를 해 주는 것이 좋을 듯싶다. 배도 많이 고프고, 영어 공부도 해야 하고, 또 내 여자가 저 녀석 손모가지에 모가지가 비틀려 죽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흐흐흐!
“아자씨, 마지막으로 경고 합니다. 이쯤 해서 그만 내려가시죠? 나 이제 저녁 밥 먹고 공부해야 합니다. 자꾸 그렇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으며 학생 공부를 방해하고 나서면, 나 또 어떻게 뒤집혀 버릴지 모릅니다. 그 땐 아자씨, 중상도 아니고 최소한 사망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어서 내려가요. 그리고 아까 일은 내 잘못도 분명히 있는 만큼, 다시 이렇게 정중히 사과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 이 새끼가 이 이젠 협박까지? 그래 드 드디어 본성이 나왔구나. 너 사과 따위는 아예 할 생각도 없었지. 안 그래 새끼야? 그래 내 내가 안 내려가면 네 네까짓 게 어 어떡할 건데? 응? 어떡할 건데? 이 이 새끼야!”
자식, 겁먹었군! 말까지 더듬고.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새끼구만! 지금부터는 열을 센다. 그 때까지 안 내려가면 네 호박 통을 아주 아작 내 버리고 말겠어! 내 인내력을 더 이상 시험하지 마라. 나 이래 뵈도 너 같은 놈 하나쯤은, 아니 너 같은 놈 열 명, 백 명쯤은 한 자리에서 손쉽게 아작 내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다. 콩밥? 그까짓 거 한 번 먹어보지 뭐. 건강에도 좋다는데. 그게 대수인가? 너 죽고 나 살면 그만이지. 그리고 더 이상은 너희들 부부싸움으로 다른 집 시끄럽게도 하지 마라. 시끄러워서 공부를 할 수 없으니까. 한번만 더 네 마누라한테 손찌검 하면서 시끄럽게 굴면 그 땐 내가 쫓아 내려가서 너 진짜 그냥 안 둔다? 숫자 세겠다. 하나아, 두우울, 세에엣!”
“수 수창이 너 이눔 자식,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여!”
당황한 엄니의 외침소리,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애기엄마의 요들송처럼 뒤집어지는 외침소리.
“학생, 그러면 안돼요. 나를 봐서라도 제발 학생이 참아요. 여보, 우리 어서 내려가요. 어서 내려가자니까요!”
미안 하오 내 사랑.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인내할 수가 없구려. 숫자를 계속 세어 나가겠소 그대.
“네엣! 다서엇! 여서엇! 일고옵! 여더얼! 아호옵!”
“개새끼! 두고 봐! 내일 내가 진단서 끊어서 너 새끼 고소하는지 안 하는지! 거기다 협박죄까지 추가라는 사실도 명심 해!”
겁먹은 녀석이 진단서는 얼어 죽을! 어쨌거나 아자씨는 지금 계단 쪽으로 주춤주춤 몸뚱이를 물리고 있는 중이다. 너 정말로 현명한 결정을 한 거야. 안 그랬으면 분명히 내 손에 아작 나고 말았을 테니까. 사내는 결국, 애기엄마에게 등을 떠밀리는 형식으로 가까스로 체면(?)을 유지한 채, 계단 아래쪽으로 못생긴 몸뚱이-물론, 면상은 그런대로 괜찮게 생겼지만 -를 굴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잘 내려가시오 내 사랑. 그리고 오늘 밤은 우리 꿈속에서나 봅시다. 꿈속에서라도 당신을 꼭 한번 안아보고 싶구려. 딱! 파!
“쯧쯧! 선생질 해 먹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런 겨? 그나저나 수창이 너 대체 어찌 된 겨? 아참, 먼첨 씻거라. 엄마가 저녁밥 채려 들어 갈 테니 께. 밥 먹으면서 어찌된 사단인지 얘기 좀 해 봐!”
“알았어요.”
엄니의 밥상 차리는 소리를 아련히 귓전으로 헤아리며 방 벽에 가만히 등을 기댄 채 색정미 가득한 그녀의 모습을 허공중에 이리저리 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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