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잎새의떨림06

2024. 12. 18. 09:14허세창장편소설

728x90
반응형
SMALL

                                         06

 

 

[영어, 수많은 세월동안 이 것만큼 우리 한국인들을 많이 웃고 울게 한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그리고 공무원시험 준비생을 비롯한 여타 각종 고시 준비생, 심지어 승진시험을 준비 중인 직장인들까지. 말 그대로 대한민국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시련과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존재. 반면에 그를 극복한 사람들에게는 하염없는 희열감과 성취감을 안겨주기도 하는 존재. 말 그대로 극단의 양면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존재. 취하자니 뜻같이 잘 안되고, 그냥 포기 해 버리자니 차마 그럴 수가 없는 존재, 마치 먹자니 부담스럽고, 버리자니 아까운 그런 계륵 같은 존재, 바로 그것이 영어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왜 이리도 영어를 완벽하게 내 것으로 하기가 힘이 드는 것일까. 아니, 굳이 왜 영어라는 특정한 외국어에 이토록 온 국민이 나서서 미쳐 날뛰어야만 하는 것일까. 우선 먼저 왜 미쳐 날뛰어야만 하는가를 논하기 이전에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영어를 왜 완벽하게 내 것으로 하기가 힘든 것인가 하는 점부터 고찰 해 보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중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를 거쳐 직장 생활을 할 때까지 그 오랜 세월을 그토록 치열하게 영어공부에 매달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원어민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고, 또한 영화 대사, AFKN NEWS 같은 것들 역시 그저 알 수 없는 외계인 염불소리로만 들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일부 외국어 익히기에 특출 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도대체 왜 그럴까. 한국인들이 죄다 어학에 소질이 없어서? 한국어와 영어의 어순이 완전 반대라거나 뒤죽박죽이라서? 물론, 그런 것에도 일정 부분 원인이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대단히 잘못된 영어 교육의 문제, 바로 교육자들의 잘못된 교육 방법론과 개인 각자의 잘못된 영어 익히기 습관 때문입니다. 영어를 단순히 말을 반복하고 내뱉어서 익혀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오로지 전 국민의 문법학자화, 또 교사나 강사, 대학교수들의 철 밥통 도구화, 또 그런 그들에게서 그냥 수동적으로 문법 강의나 듣고 배우기만 하면 된다는 피수강자들의 안이한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버무려져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갓 난 아이였을 때를 생각 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말을 처음 익힐 때 국어문법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익히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처음 내 뱉을 때, 먼저 국어문법부터 익히고 나서 그런 말을 내 뱉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저 아빠 엄마가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들려주는 그 단어를 알아듣고,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가 어린 아이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품사적으로 볼 때 명사고, 아빠라는 단어 역시 품사적으로 볼 때 명사야 라고 굳이 설명을 들려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엄마는 엄마인 것이고, 아빠는 아빠일 뿐입니다. 아가에게 절대로 국어문법학자가 되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도 아가는 아이가 되어가면서 언젠가는 그 의미를 다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아빠 엄마를 내 뱉게 됩니다. 다른 단어들 역시도 그런 식으로 범위를 점점 넓혀갈 수 있고, 또 내 뱉게 될 뿐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갓 난 아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나라의 아가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영문법을 먼저 배우고서 마미 파파를 내 뱉지 않습니다. 우리네 아빠 엄마가 그랬듯 미국이나 영국 아빠 엄마들도 똑같이 그렇게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가르칩니다. 아니 별 생각 없이 무심코 그렇게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아가들은 아이로 자라가면서 차차 제법 능숙하게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문법을 굳이 먼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10년 20년 영어 배우기를 한 일본인이나 한국인들보다 미국 영국 아이들이 더 능숙하게 정확한 발음으로 자연스럽게 영어를 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벌써 답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의 학교 내지는 학원 등에서 가르치고 있는 문법위주 영어교육법. 바로 교사나 학원 강사, 교수들의 철 밥통 유지 수단을 위한 그 쓰잘데기 없는 문법위주 교육법, 그리고 무심코 그에 동조하고 있는 피교육자들 자신이 진짜 문제였던 것입니다. 사실, 영어를 모르는 외국인 입장에서라면 그 누구라도 갓난아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미 파파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은 청소년, 성인들을 붙들어 앉혀놓고, 끊임없이 부정사는 어떻고, 동명사는 어떻고, 분사는 어떻고를 논해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전 국민을 영문법 학자로 만들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토록 치열하게 영문법을 익혀본들 사회에 나가 하나라도 쓸데가 있습니까? 영문법을 잘 해야 농사를 잘 짓고, 공장 일을 잘 하고, 회사 업무를 잘 하게 된답니까?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이런 변명도 늘어놓더군요. 영문법을 먼저 정확하게 익혀야 영어를 바로 말 하고 바로 쓸 수 있게 된다. 얼핏 들으면, 참으로 지당하고도 정당하게 들립니다. 불쌍한 우리의 청소년들이나 영어 피학습자들이 교수나 강사 교수들에게서 일제시대 때부터 50여 년 넘어 가까이 세뇌당해 온 그들만의 강력한 철 밥통 유지수단 궤변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어는 한국인이 사용하는 언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영어 역시도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사용하는 언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의 사용을 능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끊임없이 반복해서 귀에 딱지가 지도록 말을 반복해서 익히고 내뱉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영문법을 힘들여 먼저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까짓 문법이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설사, 틀린 문법으로 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정상적으로 고쳐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아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조리 있게 말을 하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나 학원 강사, 대학교수들은 이제라도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고, 학교 교실에서든 학원 강의실에서든 대학 강의실에서든 학생들을 로봇처럼 붙들어 앉혀놓고, 허구 헌 날, 문법 강의에만 열을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자신들의 철 밥통 챙길 생각만 하지 마라 이겁니다. 양심이 있으면, 그럴 시간에 차라리 책걸상을 모두 한쪽으로 밀어 붙여놓고,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영어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요구하라 이겁니다. 심지어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어울려서 잘 되지 않는 영어이긴 하지만, 상황극 놀이를 즐겨도 좋습니다. 그 과정에서 절대로 잘 못 말하는 학생들을 다그쳐서도 안 됩니다. 그냥 웃으며 잘못만 지적 해주면 됩니다. 어쨌거나 되든 안 되든 선생과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영어 말이나 문장을 끊임없이 반복해 내 뱉으며 익혀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어가 체득화 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영어는 결코 꾸역꾸역 영문법을 연구 해 가며 배워야 할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반복적으로 입으로 내뱉어가며 익혀야 할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문학자를 지향하지 않는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는 더 말이지요. 물론, 영어를 문법적으로 깊이 연구해서 분석해야 할 때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일부 문법학자들에게나 해당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 국민이 다 나서서 어릴 때부터 영문법에만 오로지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영어를 익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문법책만 가지고 골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테이프가 됐든, 비디오가 됐든, 원어민이 녹음 해 둔 영어회화, 영화대사, 장문의 영어 문장을 반복해서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듣고 또 듣고, 또 따라서 발음 그대로 내뱉어 줄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온종일 영어로 된 방송을 들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냥 가볍게 들어주는 것도 좋지만 집중해서 들어주면 더 좋습니다. 마치 갓난아이가 아빠 엄마 말을 반복해서 듣고 자신 스스로도 똑같이 따라하는 경우와 똑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영어를 제대로 익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 등 꼴 빼가며, 국부 유출 해 가며 굳이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허구 헌 날, 교탁 앞에 서서 3형식 동사가 어떠네, 부정사가 어떠네, 5형식 문장이 어떠네 따분한 장광설만 늘어놓아 보아야, 일부 영문학자가 될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다수의 학생들이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나 할 뿐입니다. 그게 지금의 대한민국 영어교육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다니는 학교의 영어 선생들 모습이 떠오르네요. 선생은 선생대로 줄기차게 무언가를 떠들어 대고 있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졸기 아니면, 도시락이나 몰래 까먹는 장면, 그렇게 영어 교사와 학생들이 서로에게서 철저히 유리된 모습. 학생들이 영어를 제대로 익히거나 말거나 그저 내 철 밥통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영어교사의 무책임하고 수수방관적인 뻔뻔한 그 교육태도. 참 한숨만 나옵니다. 오죽하면, 영어에도 이런 속담이 있겠습니까. Practice Makes Perfect. 그냥 멍하니 배우고 앉아 있기보다는 무작정 스스로 익히는 게 더 좋다 하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왜 이토록 영어라고 하는 특정 언어 익히기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어야 하는 가에 대해서 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영어는 지구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인 점은 분명합니다. 중국어, 불어, 독어, 로어, 서반아어 같은 경우 역시도 영어의 위상에 비하면 모두가 다 새 발의 피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또 딴지를 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영어가 그런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쳐도, 굳이 왜 영어가 국어와 영어 수학으로 대표되는 대학입시 내지는 취직시험 최고 중요과목중의 한 반열에 늘 올라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불만 사항입니다. 영어 대신 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영어 대신 생물이나 화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기술 과목이면 안 됩니까?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몰라도 일생생활을 영위 해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냥 영어 단어 읽을 줄이나 알고, 대충 남이 한글로 번역 해 놓은 글이나 소설책을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영어를 잘 몰라도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운전 일을 할 수 있고, 보험 영업을 할 수 있고, 회사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굳이 꼭 영어를 알아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꼭 알아야 될 경우라도 일부 영어 잘 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면 그만입니다. 해외여행을 하거나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났을 때 영어로 능숙하게 대화를 할 수 없어서 답답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손짓 발짓으로 몸 언어, 이른 바 바디랭귀지를 구사 하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해도 거의 다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한마디로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밥을 굶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안에서는 말이지요.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절박한 것이 아닌데도, 왜 이토록 주구장창 영어 아니면, 모든 것이 다 끝장이라도 나 버릴 것처럼 호들갑들을 떨어대야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육당국에 이런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영어를 너무 지나치게 떠받드는 교육 정책을 지양 해 달라 하는 것입니다. 영어 교육이 절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쓸데없이 지나치게 영어에만 몰입시키는 부당함을 폐기 해 달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대다수의 학교 학생들이 영어에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마지못해 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학입시나 취직시험에 필요이상으로 영어과목 점수 비중을 높이 책정 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 당국은 영어과목에만 지나치게 정열을 낭비하고, 비중을 부여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나 화학, 생물, 기술 등으로 대표되는 기초과학 과목에 더 높은 점수 비중을 부여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영어 잘 하는 학생 보다는 물리 화학 생물 잘 하는 학생들을 더 높이 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잘 하는 학생 보다는 물리 화학 생물 잘 하는 학생들이 더 많이 더 쉽게 서울 대, 연 고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나라의 미래가 더 밝아질 수 있습니다. 그깟 영어문법 아무리 통달하고, 영어 아무리 잘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국력이 욱일승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리나 화학, 생물, 기술 과목을 잘 하는 학생들이 차고 넘쳐나는 세상이 되어야, 이 나라의 백년지대계가 더 확고부동해 질 수 있습니다. 영어 잘 하는 국민들만 넘쳐난다고 해서 그런 세상이 절로 오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이 니들 나라사람들 정말 영어 잘 하네 하면서 공짜로 밥을 떠 먹여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면야 못하는 것보다야 낫긴 하겠지요. 하지만 제 말은 국민들이 그토록 배우고 익히기 힘들어하는 영어만을 맹목적으로 떠받들 필요까지가 없다 이 말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어 익히기에만 과도한 국력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기초과학과목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떠받들어 주는 사회 분위기가 더 낫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특히, 우리 같이 노벨과학상 하나 받아 본 적 없는 나라에서는 더 더욱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노벨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녁식사 후, 저번 날 한가할 때 공책에 작성 해 두었던 신문 투고용 영어 까대기 글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고 있는데, 집 대문 밖 골목길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 회사물 마당으로 나가서 대문 밖 골목길을 내려다보니, 유일하게 흉허물 없이 지내는 학교친구 녀석인 정인철이가 헤벌쭉한 표정으로 우리 집 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뜻밖에 내 집을 다 찾아 온 녀석을 반갑게 맞이하며,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올라오다가 슬쩍 주미의 집 거실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뜨억! 저게 뭐여. 좀 전 내려갈 때 아이를 어르다 말고, 눈을 찡긋 하며 내게 손바닥 입맞춤을 날려주던 그녀가 이번엔 또 소파에 앉아서 가슴팍을 허옇게 다 드러 내놓고는 애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장면을 연출 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내가 연출이라고 표현 한 이유는 저 여자가 모유를 먹여 애를 키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느닷없이 젖먹이는 시늉이라니. 거참 알 수 없는 여자여. 분명히 안 그럴 것 같은 여자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저런 돌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단 말이여. 아무튼 요상 혀. 주미야, 어떤 모습이 정녕코 네 진짜 모습이니. 그나저나 이 자식이 눈을 돌리면 안 되는데. 그래서 일부러 더 다급하게 녀석의 등을 떼밀다 시피 해 가며 이층으로 올라오고야 말았다. 휴! 십년감수다.

엄니가 방에 계신지라, 녀석을 데리고 3층 옥상으로 올라가서는 맑은 공기를 들이 마시며 가벼운 농담 따먹기를 즐기던 중, 급기야 애 엄마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허수창이 고교시절을 보내던 1970년대 중 후반까지만 해도 자동차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지 대전시의 대기 질 역시도 요즘보다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음. 빛 공해도 없어서 은하수 별빛까지도 감상할 수 있던 시절임. 서울이나 인천 광주 같은 다른 큰 도시들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글쓴이 주)

사실, 인철이 녀석은 친분관계가 높기도 하지만, 의리도 좀 있고, 착하기도 한 녀석이라서 일부러 뭐를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눈을 화잔 등 만하게 뜨고, 내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연신 침을 꼴깍거리고 있던 녀석. 하기야 혈기 왕성한 이팔청춘에 제 친구가 들려주는 예쁜 유부녀 꼬신 이야기보다 더 꼬신 이야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아니, 예쁜 유부녀한테 꼬심 당한 고삐리 이야기보다 더 꼬신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딱! 파!

(지금 허수창이 혼자 주절대고 있는 말 중의 가장 앞의 꼬신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누가 누구를 유혹한다는 뜻이고, 뒤의 꼬신이란 단어는 충청도 사투리로써 맛이 고소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 말하자면, 동음이의어임. - 글쓴이 주)

"진짜 부럽다. 맛이 어땠냐? 꼴깍!"

여기서 인철이 녀석이 침을 꼴깍 삼키며 내뱉은 맛이란 말의 의미는 당연히 짜장면 맛이 아니고 애기 엄마의 거시기 맛을 의미함. 딱! 파!

(딱! 파! 라는 의성어가 수시로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잠깐 독자님들께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앞의 딱! 소리는 허수창의 내면 안에 동거하고 있는 그의 반자아(反自我))가 그의 자아(自我)에게 허튼 짓 좀 하지 말고 정신 좀 차리라며 한 대 딱! 먹여주는 모습을 묘사한 의성어입니다. 그리고 뒤의 파! 소리는 1970년대 바보상자 속 수사반장이란 방송극에서 좋은 연기를 펼쳤던 최불암이란 연기자의 독특한 파! 하는 웃음소리를 흉내 낸 것이 아니고, 허수창의 자아가 자신의 반자아 녀석에게서 한 대 딱! 하고 호박통 쥐어터질 때, 순간적으로 파! 하며 허수창이 내지르는 소리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파! 하지 않고 그냥 줄여서 파! 해 버린다는 의미죠. 그러니 절대로 최불암 웃음소리라고 헛갈려 하지 마시길. -글쓴이의 별 씨잘데 없는 주석)

“당연하게 맛있지 임마.”

“그렇다면, 너 혼자서 계속 맛있게 먹지, 뭐 하러 나한테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냐? 너 지금 나 염장 지르고 있는 거 맞지? 꼴깍!”

"그랜 마! 염장 지르고 있는 거 맞다. 그런데 인철이 너, 나 하고는 매사에 서로 숨기는 거 하나 없기로 했지?"

이 녀석과 굳이 그런 약속까지 했던 것은 이 녀석이 의리와 착한 성격에 더 해서 되바라지지 않은 면도 지니고 있어서다. 사실 그런 면이 바로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이기도 하고.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난 이 녀석처럼 되바라지지 않은 녀석들이 좋다.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한 느낌이라서 그런 것인가. 사실, 그도 그렇지만 되바라지지 않은 녀석들의 특징이란 것이 대개는 마음속이 하얀 백짓장 같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파에 오염이 덜 되었다는 것인데, 되바라진 녀석들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이 대개는 그 마음 안에다 능구렁이 몇 마리씩은 들어 앉혀 놓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주미 남편 녀석이나, 나 같은 족속 말이다. 내 자신이 그런 과에 속하니까, 오히려 그런 과에 속하지 않는 녀석들을 더 선호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딱! 파!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꼴깍!"

그지없이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의 얼굴. 너무 부러워 할 것 없언 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너와 똑같은 신세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확실히 나 요즘 용 된 거 맞긴 한거지? 그것도 왕 용으로 말이여? 딱! 파!

“얌마! 그만 좀 꼴깍 거려라!”

"저절로 이렇게 되는 걸 낸들 어쩌냐. 그나저나 그 여자 유방 정말 뽀얗고 탄력 있어 보이더라!"

얼레! 이 자식? 유방이라고라고라? 이 자식 이거 내가 잘 못 본 거 아녀? 분명히 안 되바라진 녀석이라고 봤는데? 딱! 파!

"너 봤냐? 언제 봤냐? 못 본줄 알았는데?"

“돈 주고도 못 볼 그런 구경을 왜 놓치냐? 게다가 여자가 나를 보고 다정하게 미소까지 지어 보여 주던데.”

흐흐흐! 그럼 그렇지. 순진한 놈! 아무려면 주미가 너 같은 녀석한테 호감이 있어서 그랬겠냐. 그냥 무심코 그랬을 테지.

"얌마! 설마 그 여자가 너를 보고 웃어줬겠냐? 나한테 한 거지?"

"그런가? 분명히 나한테 웃어주는 것 같았는데? 그나저나 네 성격에 어떻게 저런 봉을 잡을 수 있었냐? 그것도 저렇게 예쁜 유부녀를? 이거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내 성격이 어떤데?"

"몰라서 묻냐? 너 은근히 여자들 앞에서 낯가림 심하잖아? 특히 예쁜 여자한테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물론, 옥떨메들은 예외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더욱 나 역시 지금의 이런 현실이 꿈만 같은 것이다. 옥떨메들은 예외라는 녀석의 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철아, 그래서 나도 이게 꿈인지 아닌지 많이 헛갈린다. 계속 저 여자 꿰차고 있어도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긴 하지만, 아직도 여자 친구는커녕 동정조차 떼지 못한 가련한 이 녀석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는 차원에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뇌까리고 있는 것이다. 딱! 파! 미안하다 인철아. 나만 이렇게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서. 그나저나 인철이 녀석이 감히 학교 대빵 급인 내게다 대고 어떻게 감히 저렇게 흉허물 없이 굴어댈 수 있나 궁금증이 생기신 분이 있을 것 같다. 그게 말이다. 이런 이유라고 생각하면 된다. 말하자면, 학교 대빵 녀석이 다른 녀석들한테는 천하에 둘도 없는 무서운 괴물로 보이겠지만, 또 다른 녀석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양순하고 순박한 친구로 보여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녀석이 철썩 같이 그렇게 믿도록 내가 일부러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오긴 했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순한 양인 척 연기 하느라고 무척 애를 먹고 있다는 야그다. 그러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모두들 짐작하셨을 것으로 믿고, 하던 야그 계속 진행 해 보기로 하겠다.

"너 많이 겁나나 보다? 하긴, 나도 유부녀라는 게 신경 많이 쓰이기는 하지. 하지만 저렇게 어여쁜 유부녀를 애인으로 만들기가 어디 말처럼 쉽겠냐 이거여. 아무 때나 기회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의 저런 엄청난 미모를 가진 여자라면 더 말할 건덕지도 없지."

인석아, 그게 바로 유식한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거여. 물론, 아무리 경국지색이라고 해도 우리 승주 공주보다는 한 단계 아래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딱! 파!

“인철아, 저 여자 너 줄까?”

딱! 파! 화상, 너 또 왜 그러냐?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또 뇌까리고 그러는 겨? 짜샤, 친구니까 그러는 거지. 친구지간에 장난도 못 치냐? 장난? 알았다 나 간다. 꼬르륵! 짜샤아! 너 거기 안 스냐아! 저 자식이 증말!

“너 자꾸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면서 염장 지를 껴? 자꾸 그렇게 사람 가지고 놀리면 못 쓰는 겨. 그렇지 않아도 마음 심란한 디.”

“그러냐? 미안하다. 내가 왜 인철이 네 심정을 모르겄냐? 인철아, 그렇지만 말이여. 내가 네가 좋아할 만한 여자가 눈에 뜨이면 꼭 소개 시켜 줄 테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봐라! 이 엉아를 믿고서 말이다.”

“빈말이라도 고맙다.”

“빈말 아니연 마!”

“알았어.” 

이쯤에서 독자들 중에는 거 참 소설 속 등장인물들 대화 수준이 왜 이리 낮은 겨? 하실 분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의 이 인철이 녀석뿐만 아니라 내 나이 또래들과의 대화 수준이라는 것이 대개는 이 정도 높이고, 이 정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라는 것이 늘 상 저 위의 영어 까대기 글처럼 진중하고 수준 높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유치할 정도로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때로는 기분전환에 좋은 법이니까. 우리가 무슨 허구 헌 날 고상한 이야기나 주고받아야 하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도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철부지 고삐리에 불과하니 말이지. 그러니 독자 여러분들이여, 고삐리 남학생끼리의 대화 수준에 너무 높은 기대치는 갖지 마시길. 뭐 고삐리 여고생끼리의 대화수준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겠지만.

인철이 녀석을 잘 멕이고, 신나게 짝짜꿍 놀이를 즐기다가 잘 보내 놓고는 대문 안으로 다시 들어서자마자 불문곡직하고 그녀의 집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순둥이 녀석이 요람 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녀석, 기특하단 말이여. 아저씨가 올 때 마다 알아서 꿈나라로 들어가곤 하니 말이여. 내 자식은 아니지만, 귀엽긴 귀엽다. 하기야,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피가 반은 섞여 있으니. 기다렸다는 듯 급하게 품 안으로 안겨드는 애기엄마.

“친구는?”

“지금 보내고 들어오는 중.”

“아까 나 어땠어? 그 친구가 뭐래?”

“다시는 그러지 마. 그 녀석 미치려고 하더라. 아직 여자하고 잠 한번 못 자본 녀석인데, 불쌍하잖아. 괜히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 친구 오늘 밤 잠 못 이루겠네?”

“아마 그럴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그것을 보았는데 편안히 잠들 수 있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거지.”

“알았어. 다시는 안 그럴 게.”

“나도 미치겠더라. 녀석하고 얘기를 하면서도 계속 이것만 머리에 아른 거려서.”

“쿡! 짐작 하고 있었어. 이제부터는 얼마든지 자기 맘대로 실컷...... 흡!”

마음 같아서는 밤새도록 절구를 찧어주고 싶었지만, 친구 배웅 나간다고 한 녀석이 대체 어디 가서 뭐 하나 궁금해 하실 엄니를 생각해서, 딱 한 시간만 절구질을 하고 난 뒤, 다시 이층 우리 집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건 그렇고 드디어 우리는 편하게 말을 놓고 지내게 되었다. 거추장스럽게 하오체를 구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지. 이미 살까지 섞은 사이에 하오는 무슨 하오여! 딱! 파!

 

새 주엔 주미와의 편안한(?) 밀회가 다시 곤란해지게 되었다. 바닷가로 떠나갔던 사내가 뒤늦은 귀가를 해 왔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사내가 다음 주부터 입시학원의 강사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각지점에서 다시 짜릿한 밀회를 즐길 때 주미가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바닷가로 머리를 식히러 간다더니 이리저리로 학원자리까지도 알아보러 다녔던가 보다. 입시학원의 강사로 나갈 정도면 실력 자체는 꽤 있다는 말인데, 그 인간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었나? 그런데 성깔은 왜 그 모양이여? 하기야, 사내의 그런 성깔 덕분에 애기 엄마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으니 그 성깔에다 대고 고맙다고 절이라도 올려야 할 터. 딱! 파!

엄니가 몸이 아파서 집에 계속 계시고, 또 사내까지 다시 돌아온 덕분(?)으로 오로지 사각지점에서의 은밀한 밀회만을 지속 시켜 나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식의 아슬아슬한 밀회 방식도 역시 나름대로 깨소금 재미가 있다. 가슴 조이는 짜릿 미(味)가 있으니 말이지. 흐흐흐!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가고, 드디어 사내가 첫 출근을 하는 날이 되었다. 애기엄마는 학원 근무 특성상 애 아빠가 항상 늦게 귀가를 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들려주었다. 대견한 것 같으니라고.

방과 후, 김승주 다음으로 아름다운 그 여자의 말만을 믿고, 책가방을 든 채로 마치 법적인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무도 당당히 그녀의 집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사내는 보이지 않고, 거실의 한 쪽 요람위에서 순둥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녀석이 미워져야 하는데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아서 큰일이다. 딱! 파!

오늘도 어김없이 애기엄마에게 열성을 다 하여 절구질을 해 준 후, 파김치마냥 품안에서 늘어진 그녀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져본다.

“누나는 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말 시키지 마! 나 지금 말할 힘도 없어. 그런데 누나는 또 뭐야?"

“누나 아님?"

“알면서 왜 또 그러는고야."

“누나는 누나라고 불러주는 게 그렇게 싫어?"

“나이 든 것 같아서 싫단 말이야. 그냥 애기나 공주라고 해.”

“못 말려! 에그 이 깜찍한 귀염둥이!”

“깜찍한 귀염둥이는 또 모야?”

“깜찍한 귀염둥이가 깜찍한 귀염둥이지 모긴 모야. 그런데 우리 애기는 나 어디가 그렇게 좋아?”

“어디가 좋기는, 그냥 다 좋은 거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냥 무조건 다. 사람 좋은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거야.”

“하기야. 나도 그렇긴 하지. 우리 애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냥 다 좋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애기는 대학 때 전공이 뭐였어?"

이제는 이런 질문을 할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애기엄마의 육신만을 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다른 모든 것까지도 함께 궁금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내 여자로 만들기 위한 욕심에서일 것이다.

“그건 갑자기 왜?"

생뚱맞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주미. 의외의 질문이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리 정색을 해? 사랑하는 여자가 학교 다닐 때, 뭘 전공했는지 알고 싶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진정으로 자신의 애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무엇이든지 속속들이 다 알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어?”

“하긴 그렇긴 하네. 사실, 놀란 건 아니고, 자기가 그런 질문까지 해 올 줄은 미처 예상을 못했거든.”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특별한 이유는 없고,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애. 아무튼 알았어 대답 해 주지. 음대야. 피아노 전공이고."

“정말? 그럼, 피아노 잘 치겠네? 그런데 왜 피아노 치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봤지? 집에서는 안치는 거야?”

“으이그 맹추! 안치는 것이 아니고, 칠 시간이 없었던 거지. 애 봐야지. 성질 더러운 애 아빠 투정 받아 줘야지. 또......”

“또?”

“이렇게 짬짬이 잘생긴 영계 총각하고 깨소금 맛도 봐야지. 호호호!”

띠요옹!

“사실은 애 아빠가 피아노 치는 거 별로 안 좋아 해. 음악 자체를 싫어하거든. 아니, 문학이니 미술이니 음악이니 하는 것들 자체를 경멸하는 사람이야.”

“그랬었구나. 하여튼 여러모로 피곤한 인간이군. 우리 애기와 결혼한 것도 오로지 우리 애기 육신만 탐이나서였단 말이겠지. 성격이 그렇게 비뚤어져 있는 이유를 알겠어. 그런 인간치고 인성이 제대로 박힌 사람 별로 못 봤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 해?”

“당연하지. 예술만큼 사람의 심성을 선하고 곱게 어루만져주고 다듬어주는 가치가 또 어디 있다고.”

“와, 우리 자기 이제 보니까 생각 하는 것도 무지 조숙하다. 다시 봐야겠는데. 그럼 자기도 서양고전음악을 좋아하는 거야? 가요라든지 팝송 같은 거 안 듣고?”

“왜 가요도 듣고, 팝송도 많이 듣지. 물론, 재즈라든지 서양고전음악도 좋아하고. 우리 국악까지도 즐겨 듣는데 뭐. 특히 판소리 같은 거 말이야. 정정렬 송만갑 명창 소리를 좋아하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보자면, 가요는 박재란이나 이미자 노래를 좋아하다가 요즘에는 주로 혜은이나 들국화의 노래들을 즐겨듣고, 팝송은 비지스나 아바,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지. 그리고 재즈음악은 루이 암스트롱이나 스탄 켄튼을 대표로 하는 초창기 브라스 재즈 음악들을 선호하고, 서양 고전음악으로서는 주로 발레곡들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지.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인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 그리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나오는 발레곡들, 또한 지젤이나 라바야데르에 나오는 발레곡 같은 것들은 정말 심금을 울려오는 뭔가가 있지. 철부지들 중에는 나는 이러이러해서 어떤 종류의 음악은 싫다 이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대단히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지. 한마디로 음악을 즐길 자격이 없다는 거야. 뽕짝이 됐든, 국악이 됐든, 재즈가 됐든, 팝송이 됐든, 서양 고전음악이 됐든, 발레곡이 됐든, 음악은 오로지 음악 그 자체로서 저 마다의 특질과 매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 언제 한번 같이 발레곡 감상하러 공연장에 가 보자고. 나는 학생이니까 표 값은 우리 애기가 계산 하고.”

“어쩜!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 하네 우리 낭군님. 알았어. 당연히 표 값은 내가 계산해야지. 사실 나도 발레를 엄청 좋아하거든.”

이것아, 내가 발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 혜은이 아가, 아니 승주 아가 때문이야. 승주 아가가 어릴 때 장래 희망이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었대나 뭐래나. 그래서 나도 덩달아 발레에 관심을 갖게 된 거지. 그나저나 승주 아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선언을 해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는군. 흐흐흐! 내가 그녀를 그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있는지 너 모르지? 미안하다 주미야. 딱! 파!

“어린 나이에 라는 것은 내가 너무 애 늙은이 같다는 뜻인가?”

“알긴 아네. 자긴 정말 애 늙은이 같애. 다른 학생들 같으면 판소리니, 재즈니, 발레니 하는 단어조차도 생소하게 여길 텐데. 아니,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도 없을 텐데.”

“맞는 말이야. 학교 애들도 발레니 재즈니, 판소리니 하는 것들을 좋아하기는커녕 관심조차도 안 가진 애들이 대다수니까. 그나저나 이번 기회에 나 우리 애기 피아노 연주 좀 들어보고 싶은데, 그래 줄 수 있어?”

“지금?"

“응.”

너무 갑작스런 주문이었을까. 주미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갑자기 무슨 피아노야.”

“나 음악 좋아한다고 했잖아. 분위기 좋을 텐데 뭐."

“정말 듣고 싶어?”

“그렇다니까 그러네. 나 정말 우리 애기가 피아노 치는 소리 듣고 싶어.”

“어떤 곡이 듣고 싶은데? 뭐 아는 곡 있어?"

“라흐마니노프나 쇼팽, 베토벤 뭐든지 다 좋아. 뭐 다른 작곡가들 것도 좋고. 선곡은 애기 마음대로 알아서 해."

“알았어.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원하는 일인데 굳이 못할 것도 없지. 그 대신 흉보기 없기?”

“흉은 왜 봐. 나는 칠 줄도 모르는데.”

벌거벗은 몸 그대로 내 품안에서 살짝 빠져나간 절세미녀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허리를 곧추 펴고 반듯하게 앉더니, 덮개를 천천히 열고는 능숙한 솜씨로 쇼팽을 연주 해 나가기 시작한다. 녹턴이었다. 그림이 따로 없고, 조각이 따로 없다. 어쩌면 저리도 반듯하게 고울 수가 있을까. 몸도 예술, 연주솜씨도 예술, 분위기도 예술이네 예술. 저런 대단한 여자를 마음껏 취할 수 있게 된 이 고삐리 녀석은 또 뭐냐? 이거 혹시 정말 서포의 구운몽은 아닐까? 아니여. 엄연한 현실이여. 천지신명이여! 산신령이여! 단군 할아버지여! 옥황상제여! 용왕님이여! 모두들 정말 고맙습니다. 내게 저런 사랑스러운 여인을 선물 해 주시다니요. 주미의 나신(裸身) 연주회는 순둥이가 깨어나 자그맣게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생각 이상으로 꽤나 훌륭한 솜씨였다. 그리스 여신 같은 완벽한 신체의 모습으로 피아노 앞에 반듯이 앉은 채, 쇼팽의 녹턴을 능숙하게 연주하고 있는 젊은 여인의 모습. 그림으로, 조각으로 남겨두고 싶을 만큼 독특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만일, 동서고금 동서양의 유명 화가들, 조각가들이 저 모습을 봤더라면,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조각으로 새겨 두고 싶어서 난리 블루스를 추었을 것이다. 마치 진주 목걸이를 한 아름다운 소녀를 그려 낸 네덜란드의 그 화가처럼, 마치 뭇 사내들을 유혹하고 있는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나 헬레네 상을 조각했던 고대 그리스 조각가들처럼.

“정말 대단해! 이건 마치 그리스 미의 여신이 나신 그대로 피아노 앞에 현신 한 것 같다.”

“아이 또 부끄럽게.”

“아니야. 정말 최고야! 앞으로도 종종 보여줬으면 좋겠어. 그 모습 그대로.”

“으이그! 알았어. 사랑하는 낭군님이 원한다면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뭐.”

“기대가 많이 되는데? 그나저나 순둥이 아버지는 몇 시쯤에 돌아온다고 했지?"

“마지막 강의가 아홉시쯤에 끝난다고 했으니까. 열시 쯤."

“정말 기막힌데? 마치 우리의 밀회를 위해서 애 아빠가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고 있는 것 같지 않아? 흐흐흐!”

“하여튼 응큼쟁이야! 그나저나 자기는 무슨 재주가 있어? 나중에 학교 졸업하면 어떤 사람 될 거야?"

“특별한 재주는 없어. 그리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면 되겠지 뭐. 지나치게 특별한 사람이 되면, 오히려 몸만 피곤해 질 테니까."

“아니야. 설사 그렇다고 해도 포부 자체는 크게 가지는 게 좋아. 어차피 한번 태어난 인생인데 해 볼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다 해보고 죽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글쎄, 그 해 볼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건데?"

“그거야, 공부를 잘 해서 위대한 과학자가 된다거나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 변호사를 하든지, 아니면 정치인이 되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자리에 앉아 본다거나 직접 회사를 차려서 큰돈을 벌어 본다든지 하는 거 뭐 그런 거겠지 뭐. 대개의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거잖아."

“그렇지. 그런 삶을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정치 쪽만큼은 별로야. 요즘 그런 사람들 치고 존경 받고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잖아. 욕만 잔뜩 쳐드시고 말이야. 나는 오히려 예술 쪽을 선호하는 편이야.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지. 그나저나 우리 애기는 책 읽는 거 좋아해?"

“하여튼 뚱딴지라니까. 글쎄, 옛날엔 많이 읽었는데, 요즘엔 애기 때문에 통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자기 때문에도 더 그렇고.”

“나 때문에? 하기야 틀린 말은 아니군. 그래서 책 읽을 시간은 없고, 잘생긴 영계 총각하고 뒤엉킬 시간은 있다 이거지?”

“호호호! 그래.”

“이 아줌마가 정말!”

“왜 그래 또. 그럼 내가 책벌레처럼 책만 읽고 자기한테는 눈길도 안 줘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건 안 돼지. 내 생각은 굳이 이분법으로 나눌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이야. 독서를 즐기면서도 충분히 잘생긴 영계 총각하고도 재미를 볼 수 있다는 뜻이지. 나는 우리 애기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도 집에 올라가서는 독서도 열심히 하고 있는 걸. 물론, 학과 공부 말고 문학 서적 읽는 거 말이야. 그리고 글쓰기까지도.”

“자기 정말 책 많이 좋아하는가 보다. 문학가 되려고 그러는 거야?”

“어떻게 알았어? 내 어릴 적 꿈이 소설가였다는 거?”
“그랬구나. 문학 쪽에 재주가 있나 보네. 와 자기가 정말 소설가 되면 좋겠다.”

“소설가 남편에 피아노연주가 아내라. 게다가 2세까지도 예술 전공을 시키면, 완전 예술가 집안이 되겠군.”

“정말 그러네.”

딩동!

“어머!”

“한참 재미있는데 느닷없이 뭔 소리여? 혹시, 애 아빠 아니야?”

“아니야. 분명히 아홉시에 끝난다고 했어.”

“아무튼 나는 이제 그만 올라 가 볼 테니까, 자기는 얼른 나가 보라고!”

“어머, 그냥 가면 어떡해?”

“애 아빠가 분명 해. 그리고 오늘만 날 아니잖아. 어서 나가보기나 해!”

“알았어. 그럼 잠깐만 기다려 봐. 혹시 그이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으이그 이 색골!”

“헤!”

딩동!

“어머!”
“어서 나가 보라니까.”

“알았어!”

애기엄마가 급히 옷을 주워 입고, 우아하게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뒷모습을 잠시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현관문 열어젖히는 저 모습조차도 어쩌면 저리 매혹적이냐? 딱! 파!

“누구세요?”

“나야, 왜 빨리 문 안 열어?”

“어머 당신? 어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늘은 그냥 조금 일찍 끝났어.”

“알았어요. 지금 나가요.”

어여쁘게 눈을 깜빡거려주며 얼른 올라가라고 섬섬옥수를 파리채처럼 흔들어 주는 주미. 미치갔다 증말! 저 놈팽이가 보거나 말거나 그냥 확 끌어안고 절구질을 해 줘 말어? 딱! 파! 제 정신이냐 화상? 얼른 튀어 올라가지 못 해? 알았어 짜샤! 올라가면 될 거 아녀!

후다닥!

 

 

 

 


 

 

 

 

728x90
반응형
LIST

'허세창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소설]잎새의떨림08  (0) 2024.12.26
[장편소설]잎새의떨림07  (1) 2024.12.21
[장편소설]잎새의떨림05  (3) 2024.12.16
[장편소설]잎새의떨림04  (0) 2024.12.15
[장편소설]잎새의떨림03  (1) 2024.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