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잎새의떨림07

2024. 12. 21. 15:03허세창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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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

 

 

가을밤이

다시 또 깊어만 간다.

내 기억 속의 수많은 상념들을

마음껏 희롱하면서......

밤은 그렇게 날마다

나약한 내 가슴속을 휘젓다가는,

허망한 몸짓으로 흩어져간다.

새벽안개 자욱한 저 먼 곳으로......

어둔 밤이 그렇게 다 지나가면,

나는 다시 이렇게 일어나 앉아,

서글픈 그 무언가를 그려야 한다.

승주, 좋아했단 말로는 많이 부족한,

아쉬웠던 기억으론 다 못 다 채울,

사무친 기억 속의 내 사랑 그대!

나 이렇게 다시 또, 그댈 그리면,

눈가엔 작은 눈물 흘러내린다.

(스무 살 김승주에게 바치는 열네 살 허수창의 넋두리 중)

 

11월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제법 날씨가 쌀쌀해져 있었다. 그런 동안에도 아래층여자와 고삐리 녀석의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밀회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래층여자의 법적인 남편은 요즘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들의 대학입학 수험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성깔은 더러우나 무능력함을 덜어내고, 다시 또 돈을 잘 벌어다 주기 시작하니, 주미는 요즘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남편으로부터 한번 멀어진 그녀의 마음은 다시 회귀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왜? 그녀가 지금 미쳐있는 바로 그 고삐리 정부(情夫)녀석 때문이지 뭐. 흐흐흐!

게다가 이 고삐리 녀석이 더 대견한 것은 그런 자신의 정부(情婦)로부터 절대 돈 한 푼 받아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제 정부가 몰래 자신의 교복바지 안에다 용돈을 숨겨 놓아도, 발견하는 족족 심한 질책(?)과 더불어 즉시 반납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도대체 이 무슨 주제넘은 짓거리란 말인가? 여기서 질책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제 여자의 탱탱한 방둥이 살을 손바닥으로 찰싹 찰싹 맴매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흐흐흐! 고삐리 녀석의 생각으로는 불알 찬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여자한테서 용돈을 받아쓰랴 하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한다. 헤이고 등신자식, 가진 것 하나 없는 놈이 씨잘데기 없이 존심은 높아 가지고. 그깟 용돈 좀 받아쓴다고 어디가 덧나냐? 정당하게 봉사(?) 해 주고 정당하게 받아 챙기는 거 아니냐 이 말이여. 그럼 네 여자도 아주 흡족 해 할 것이고, 너 자신도 친구들 앞에서 돈 펑펑 써 대며 가오(으스댐) 한껏 펴댈 수 있을 것이고. 말 그대로 도랑치고 가재 잡긴 디 도대체 왜 안 받아 챙기는 겨 이 쪼다 자식아. 그래, 뚫린 주둥이라고 마음대로 짓고 까불어라. 그러나 말이다 짜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냐. 에게게! 지가 무슨 봉황이라고. 기껏 유부녀 치마폭에나 휩싸여 있는 주제에. 너 이 새끼 말 다했어?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겨? 이 멍청한 자식아, 주미가 속으로는 이런 내 모습을 더 좋아하고 있다는 거 너 모르지? 이런 내 모습을 아주 믿음직하게 여기고 있단 말이다 이 자식아. 정말?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 이 돌대가리 자식아. 보면 모르냐. 그러니까 주미가 그렇게 더 내게 미친 듯이 매달려오는 거지. 만일, 내가 병아리가 모이 쪼듯 주는 대로 덥석덥석 용돈을 받아먹는다고 생각해 봐라. 네가 생각하기에도 참 모양 빠져 보일 거 같지 않냐? 그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한 디, 그래도 좀 아깝잖어. 이 자식아, 아깝긴 뭐가 아까워. 그깟 돈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 거지. 우리 엄니가 밥을 굶기기를 하냐? 옷을 안 사주길 하냐? 학용품을 안 사주길 하냐?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돈 꼬박꼬박 안 주시길 하냐? 심지어 팔다 남은 떡까지도 노상 갖다 주시는 디. 미처 못 다 해 치운 떡 우리 주미한테도 슬쩍 가져다주면 아주 맛있다고 먹기만 잘하고. 그 여자 보기와는 달리 아주 떡순이여. 예쁜 여자가 떡도 무지 잘 먹는다니 께. 여기서 더 뭘 바라냐? 게다가 여체가 그리우면 주미의 몸뚱이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고. 음악이 듣고 싶으면 주미가 벌거벗고 앉아서 정성스럽게 쳐 주는 생음악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면 되는 것이고. 과자니 뭐니 주념부리가 댕기면, 주미가 쟁반에다 정성스럽게 담아다주는 과자니, 과일이며를 씹어 먹으면 되는 것이고. 말 그대로 나한테는 용돈이 전혀 필요 없다 이거여. 용돈 얻어 쓰는 것은 싫다면서 과일이니 과자는 왜 얻어 먹냐? 그건 얻어먹는 것이 아니고 받아 쳐드시는 거냐? 이 자식아, 그런 정도야 예의상 그냥 먹어 주는 거지. 그런 것까지 어떻게 거절을 하냐. 에그 화상, 둘러 붙이기는. 이 자식이 정말 오늘 너 죽을라고 환장을 했냐? 퍽퍽퍽! 에구구, 짜샤 맞아 죽는다. 동네 사람들아아! 짜샤 살려어!

 

11월 중순의 어느 늦은 금요일 오후,

오늘도 고삐리 녀석은 늘 그렇듯이 아래층여자와의 꿀 같은 밀회를 즐기기 위해 서둘러 방과 후 귀가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물론. 반 친구 녀석들과 어울려 어디를 먼저 놀러 가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짓도 한 두 번이지 녀석들과 늘 함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용돈 자체가 풍족하지 않으니, 아니 거의 없으니, 자연스럽게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주미에게 용돈을 구걸 한다고 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내게 있어 주미는 주미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로서 충분할 뿐이다. 세상에서 내 기분을 가장 흥미롭고 즐겁고 행복하고 재미있고 황홀하고 짜릿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꿀단지 같은 존재. 그런 존재로서의 의미 이외에 더 무엇을 바랄  필요가 있단 말인가. 아 물론, 승주의 경우는 짝사랑을 하고 있는 존재니까 일단 예외로 제껴 놓고서 말이다. 그런 강한 기대감을 안고, 평상시처럼 보무도 당당히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우리의 고삐리 선수.

띠요옹!

말 그대로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우뚝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후아 이건 또 웬 물건이여? 와! 깨물어 먹고 싶을 정도로 깜찍한 저 얼굴 좀 봐! 그랬다. 이건 마치 순정만화책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그런 초현실적인 깜찍함이라고나 할까. 이 하늘 아래 저토록 깜찍한 여자가 또 존재하고 있었다니. 귀 빠지고 나서 깜찍 승주를 처음 발견한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인 것 같다. 이게 정녕코 꿈이여 생시여? 꿈이면 절대 안 되는 디. 아닐 껴. 절대 아닐 껴. 이것은 절대로 꿈이 아닌 것이여. 어디 살이라도 한번 꼬집어 볼까나. 아아악! 

그렇게 허공중에서 강하게 뒤얽혀 버리고 만 깜찍 미소녀와 고삐리 미소년의 시선 뒤얽힘은 불과 3미터 사이의 공간을 두고, 10초, 20초, 30초 종내 풀어 헤쳐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소녀는 그렇다 치고, 내 자신부터가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나란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집요한 모습으로 변해 버릴 수 있는 거지? 본래 나란 녀석은 예쁜 여자와 마주치기만 하면, 시선 둘 곳을 못 찾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허둥대던 녀석 아니었나? 인철이 녀석 말마따나 말이지. 그랬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낯가림도 안타고 대범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 수가 있는 겨? 낯가림은커녕, 이건 뭐 한 마리의 먹음직한 꽃사슴이라도 발견한 개호주(호랑이)마냥 침까지 질질거리고 있지 아니한가. 그려. 이게 다 주미 때문이여. 주미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준 것이여. 보다 정확히는 애 딸린 절세미녀를 정복한 사내로서의 절대 자부심이 여자에 대한 자신감을 이토록 크게 부풀려 놓은 것이여.

그나저나 저 아이 참 대단하네. 어떻게 저렇게 처음 보는 남학생한테 집요할 정도로 송곳 같은 시선을 던져 올 수가 있는 거지? 이건 뭐 추파 수준이 어린 주미의 화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네. 가만, 그러고 보니 외모도 어쩐지 주미하고 많이 닮은 것 같은데? 맞아. 여동생이었구나. 주미한테 여동생이 있었어. 그래서 저렇게 언니 집에 놀러 온 것일 테고. 아하, 이제야 그림이 그려지는구나. 그래서 제 언니처럼 저렇게 끼가 농후한 것이겠지. 그런데 주미는 내게 단 한 번도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는데? 이런 괘씸한. 저렇게 깜찍한 여동생을 숨겨놓고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이지? 내 이 여자를! 그냥 두고 보나 봐라. 절구질을 마구마구 피 터지게 해 주고 말 껴! 딱! 파! 가만, 하기야 주미가 굳이 내게 여동생이 있다는 보고까지 할 필요는 없는 일 아닌가? 내가 먼저 물어본 것도 아니고? 또, 제가 먼저 나서서 미래의 연적(?)이 되어 버릴지도 모를 존재를 일부러 까발려 버릴 필요도 없는 일이고? 그랬었구나.

 

세면을 하면서도, 엄니가 오전 나절에 준비 해 놓고 간 저녁 밥상을 두 발로 감고 앉아 밥술을 뜨면서도, 계속 깜찍 미소녀의 모습만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중이다, 깜찍 승주의 모습이 아닌, 그렇다고 교태 주미의 그것도 아닌, 엉뚱하게도 깜찍 미소녀의 모습만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래? 나 지금 깜찍 혜은이, 아니 깜찍 승주를 죽을 만큼 짝사랑하고 있는 거 맞어? 맞다. 교태 주미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 거 맞어? 맞다. 그런데 왜 이 호박 통 안엔 지금 두 여자 다 밀쳐두고 깜찍 소녀의 모습만이 그득 차 있는 겨? 이걸 뭔 말로 설명해야 하는 겨? 가만,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 없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까? 그래 맞어! 남자라는 게 본래 그런 족속이잖어. 옛날 왕이라는 족속들도 다 그랬는디 뭐. 정궁 후궁 궁녀...... 딱! 파!

장차 수없이 많은 후궁을 거느릴 왕이 되기로 혼자서 굳게 결심한 우리의 고삐리 선수, 아니 카사노바 선수, 천천히 체육복으로 갈아입고서 한 발 두 발 바깥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중이다. 딴 때 같았으면 엄니도 없겠다 당연히 실내 복도계단 통로를 이용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언감생심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애기 엄마를 고삐리 선수의 정부가 아닌, 그냥 오며가며 인사나 나누는 평범한 아랫집 아줌마쯤으로 대해야 한다. 최소한 저 소녀의 정체가 정확히 파악되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나저나 아직 머물러 있을까? 그냥 가 버렸으면 어쩌지? 그러면 안 되는데......

끼야호!

있다. 아직 안 가고 그대로 있어. 그런데 두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재미나게 나누고 있지? 웃는 모습도, 몸을 흔드는 모습도 딱 자매지간 그대로일세 그려. 오메, 봤다. 소녀가 나를 봤어. 캬하! 저 깨물어 먹고 싶도록 깜찍한 모습 좀 보라지. 정말 기가 막히는군! 세상에 어쩌면 저토록 깜찍할 수가 있지? 참말로 이 세상에 깜찍한 여자는 오직 승주 하나 밖에 없는 걸로 굳게 믿고서 살아왔는데 말이여. 꿀꺽! 꿀꺽! 꿀꺽!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애기 엄마가 지금 내게다 은밀한 눈짓을 쏘아주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 까닭으로 고삐리 선수는 지금 마구 쏘아져 오고 있는 저 깜찍 미소녀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서 소 닭 본 듯이 무덤덤한 모습을 연출 해 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 주어야만 한다. 애간장이 다 녹을 것 같군! 딱! 파!

드디어 대문 앞. 이젠 어찌해야 한다? 이대로 대문을 열고, 그냥 직진 해 버려? 동명중학교 운동장까지? 아니여! 장소가 문제 되는 건 아니여! 그냥 여기서 수련을 해 보지 뭐. 딱! 파!

슉슉!

핑그르르으 붕 휙휙!

“허여어!”

착!

쉭쉭! 쉬시식!

“헙 헙! 이야앗!”

이쯤이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 디, 어찌들 안 나온다냐? 딱! 파!

뻐그저억!

그럼 그렇지. 니들이 안 나오고 배길 수 있간? 바닥에 긁히는 현관문 소리마저 왜 이리도 살 떨리게 느껴진다냐? 딱! 파!

“어머 학생? 여기서 뭐 해요?”

흐흐흐! 학생이라..... 주미 입에서 오랜 만에 학생 소리를 들으니, 어째 기분이 묘해지네 그려. 그나저나 이것아. 뭐하긴 뭐하겄어. 보면 몰러. 바로 당신 여동생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지.

“아 예 아주머니. 무예 수련 좀 하고 있었습니다.”

흐흐흐! 아주머니라...... 그나저나 오늘따라 주미의 뽀얀 볼 살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음을 본다. 에그 이것아! 걱정할 것 없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겨!

“어머, 그랬군요. 나는 또 어디서 싸우는 소리 같은 게 들려 오길래.”

“시끄럽게 해 드렸다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아주 멋진데요 뭐.”

으이그 이것아, 너무 그렇게 속 끓이지 말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당신을 어찌 내치겄냐. 당신 같이 착착 감기고, 감칠맛 좋고, 속살 부드러운 여자를 내가 왜 내치겄어? 다다익선 아잣! 주미씨 알지? 딱! 파! 그나저나 주미씨, 당신 여동생 저거 어쩔것이오? 누가 당신 여동생 아니랄까봐 저리도 시선 하나 흩뜨리지 않고, 끈질기게 내게 추파를 던져오고 있는데 말이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니 왜요 학생. 그냥 더 해도 되는데......”

떽!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린 함부로 지껄이는 게 아니여. 당신 지금 당신 여동생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거 내가 다 안다니까 그러네.

“아닙니다. 본래 무예 수련은 학교 운동장이나 옥상에서 주로 하는 것인데, 오늘은 제가 쓸데없이 안 하던 짓을 했네요. 저 그럼 아주머니, 다음에 또.”

바로 그 순간.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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