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잎새의떨림08

2024. 12. 26. 14:18허세창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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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8
 
 
“안녕하세요. 나는 공주희라고 해요.”
누가 물어 봤니? 누가 물어 봤냐고? 아녀, 아녀 고마워. 다짜고짜 그렇게 이름부터 알려줘서 말이여. 흐흐! 공주희라...... 음...... 공주미 동생 공주희라...... 앞으로 공주 두 마리 확실하게 키울 수 있을 것 같구먼. 딱! 파!
당황한 표정으로 제 동생을 휙 돌아보고 있는 애기엄마. 그래, 많이 놀랬을 겨. 사실, 나도 조금은 놀랬단다. 니 여동생이 저렇게 아무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나설 줄은 나도 전혀 예상을 못했으니 께. 아무튼, 너희 두 자매 정말 대단 혀. 대단하다니 께.
“아, 네. 반가워요. 나는 허수창이라고 합니다.”
동생뻘로 보여 말을 낮추어 주려다 일단은 하오를 붙여 줘 본다. 초면이니까. 딱! 파!
“아니 주희 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주미야 주미야, 너 왜 그러니? 예쁜 여동생이 잘 생긴 오빠한테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여. 너 혼자서 이 잘생긴 사내를 독점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여.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지 암! 암! 딱! 파!
"수창 군, 인사해요. 우리 사촌 여동생이에요."
역시 상황 판단이 빨러. 아니, 똑똑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그대로 인정해 버리고, 빨리 다음 해결책으로 넘어가 보자 이거지 주미야? 흐흐흐! 기특한 것! 그나저나 사촌여동생? 친 동생 아니고?
“아, 그래요? 친동생 아니고요?"
“네, 우리 작은 아버지 딸내미.”
“그랬군요. 난 또 친동생인줄 알았네요. 그런데 주희양, 우리 구면 맞지요?"
순간 석고상처럼 굳어져 버리는 애기엄마 얼굴. 반면에 무척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사촌여동생 얼굴.
“네!”
“어머, 주희 너 저 학생 오늘 처음 본 거 아니었어?”
“아냐 언니, 조금 전에 현관문 밖에 서 있다가 수창 군 들어오는 거 처음 본 거야.”
“수 수창 군...... 그랬었구나.”
수창......군 이라고라고라? 씨가 아니고? 떽! 어린 것이 당돌하게. 감히 오빠뻘 되는 사람한테 수창 군이라니. 하지만, 딱 한번 봐준다. 예쁘니까. 귀여우니까. 사랑스러우니까. 깜찍하니까. 흐으! 딱! 파!
“그런데 주희양은 지금 몇 학년입니까? 중2?”
“아니, 수창 군처럼 나도 고 2에요. 내가 그렇게 어려 보였나요?”
헉! 고2? 중2 아니고? 어떻게 저런 모습이 고2? 저건 분명히 중2 모습인데? 사복을 깜찍하게 차려 입어서 그런가?
“그래요? 와, 진짜 어려 보이네. 난 정말로 중2인줄 알았는데. 혹시 거짓말 아녜요?”
“그런 거짓말을 뭐 하러 해요? 아무튼 고마워요 어리게 봐 줘서.”
“그래요 수창 학생, 우리 주희는 지금 고2에요. 얘가 좀 나이보다 어려 보이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두 사람 같은 동갑끼리 군이니 양이니 하는 게 대체 모야? 옛날 사람들 같다.”
“예? 아 예! 하하하!”
“정말 그러네. 그럼 수창 씨. 우리 이제부터는 그냥 씨로 부르기로 해요.”
씨...... 그렇지. 군이 아니면 씨가 맞는 거지.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 말 놓자 뭐. 같은 고2끼리 씨를 고집할 건 또 뭐여? 딱! 파!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은 고2니까 그냥 말 놓자. 그래줄래 주 주희......야?”
고오오!
“.......”
“......”
두 여자 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당황한 것 같다. 그래 이것들아. 나도 너희들만큼 황당한 놈이란 말이여. 너희들만 황당한 줄 알어? 흐흐흐!
“그 그러지 뭐 수 수창......아.”
“주희 너?”
에그 주미야, 뭘 그렇게 조바심을 내고 그려? 걱정 말라니께. 니 사촌여동생하고 친구가 된다고 해서 너를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겨. 내가 어떻게 너 같이 맛좋은 여자를 그냥 내쳐 버릴 수 있겠니? 사실, 너 하고도 시작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나저나 우리 주희 저 살짝 벌어진 입 속 뽀얗고 고른 치열 좀 보라지. 어쩌면 저리도 고르고 윤기도 자르르 흐를 수 있는 겨? 언니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치아까지 저렇게 예쁘게 생긴 것을 보면, 역시 미인 집안 내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딱! 파!
“수창 학생, 미안해요. 운동하는 사람 계속 이렇게 붙잡아 두는 게 아닌데. 그럼 우리 다음에 또 보기로 해요. 우리는 이제 그만 들어가자 주희야. 수창 학생 운동 계속하게. 너한테는 언니가 떡볶이 만들어 줄게.”
괜시리 서두르는 애기엄마. 괜시리 바빠진 척 하는 애기엄마. 그렇겄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어린 정부를 이대로 방치 해 두었다가는 자신의 사촌 여동생에게 탈취당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본능적으로 발동한 탓이겄지. 죽 쒀서 개 주기는 싫을 테니까. 흐흐! 하지만 걱정 말라니께 그러네 주미야. 나는 한 여자만을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는 카사노바란 말이여. 너도, 니 사촌여동생도 그리고 승주도 모두 내 여자로, 딱! 아야! 이쒸, 왜 또 때려? 정신 차려 이 좌식아! 여자들이 알았다가는 너 즉시로 몰매 맞아 죽는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문어발 행세를 하려고 그러는 겨? 몰래 하면 되잖어. 안 들키고 말이여. 꼬리가 길면 밟히는 거 몰러? 언젠가는 다 알려지게 되어 있어. 그래도 나는 할 겨. 세 여자 다 절대로 놓칠 수 없단 말이여. 딱딱! 파파! 이 새끼가 왜 자꾸 때리고 쥐랄이여 쥐랄이? 에라 너도 한번 터져 봐라. 퍽퍽! 꽥! 동네 사람들아아! 호색한(허수창)녀석이 사람 마구 팬다아!
“저기, 아주머니. 주희 하고만 따로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주희는 어때?”
고오오!
내 낯가죽이 어찌 이다지도 두꺼워질 수 있단 말인가. 인철이 말마따나 그리도 낯가림 심하고, 수줍음 많던 내가 도저히 상상 할 수도 없던 행동을 서슴없이 나투어 보이고 있다. 애기엄마의 얼굴 표정은 이제 당황함을 넘어 경악의 형상으로까지 변해 있다. 충격이 엄청 심했나 보네. 에고 불쌍한 우리 애기엄마. 미안해 주미야. 너 하고는 벌써 많은 시간 살을 섞고, 이야기도 엄청 나누었지만, 주희하고는 오늘 처음이잖니. 그러니, 네가 쬐끔만 양보 해 주라. 그 대신 다음에는 더 확실하고 힘차게 꾹꾹 눌러 줄께. 딱! 파!
“나도 수창이 하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언니. 그래도 되지? 그럼, 그동안 언니는 떡볶이 맛있게 해 놓고 우리 기다리고 있으면 되잖아.”
“주 주희 너?”
주미야! 주미야! 너 왜 자꾸 그러는 겨? 니가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을 쳐도 어차피 니 사촌 여동생과 나 사이는 너와 나 사이처럼 단번에 결정이 나고 만 것이여.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한다니께! 딱! 파!
“언니는 떡볶이 맛있게 만들어 놓고 있으라니까. 나, 수창이하고 좀 더 대화를 나눠보고 싶단 말이야. 우리 일단 밖으로 나갈래? 잠깐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
흐학! 조 좋아 주희야. 나도 정말로 원하던 바야. 딱! 파!
“나는 좋지. 어서 나가자.”
“허 허수창! 아 아니 수 수창 학생! 주희야!”
당황한, 아니 몹시도 낙심한 애기엄마의 신음을 뒤로 한 채로 우리 두 사람의 발걸음은 이미 대문 밖을 한참 멀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주희 너, 손 좀 이리 줘 봐.”
“왜?”
왜는 무슨 왜여. 야들야들한 영계 손 한 번 주물럭거려 보고 싶어서지. 딱! 파!
“손 한번 잡아 보고 싶어서. 우리 이미 서로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안 그런 척 내숭 떠는 거 하지 말자. 시간낭비잖아. 솔직히 너 나한테 첫눈에 반했고, 또 나도 너한테 첫눈에 반한 거 변할 수 없는 사실이잖아. 안 그래?”
와, 인간 허수창, 정말 화끈해졌네. 이리도 시원시원하게 성격이 변해버릴 수가 있나. 나 정말 이래도 되는 겨? 딱! 파!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수창이 너 성격이 되게 급하고 화끈하구나? 하지만 좋았어. 니가 그렇게 급하고 화끈하게 나온다면, 나 역시 굳이 불필요하게 내숭 떨고 싶지는 않아. 여기.”
오메 보드라운 거! 비단 결인들 이 보다 더 보드라울쏘냐? 딱! 파!
“정말 좋네. 어쩌면 이리도 손이 부드럽냐?”
“그럼 여자 손이 부드럽지 남자 손 같을까봐?”
“그런가?”
“그럼.”
초장부터 왜 이리 죽이 잘 맞는 겨? 이건 정말 천생연분이여. 딱! 파!
“그런데 수창아,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저기 동명 중학교 운동장. 거기 가서 얘기 하자. 싫어?”
“싫지는 않지만, 왜 하필 거기야?”
“호젓하고 좋거든. 사람도 별로 없고. 그나저나 니 언니가 좀 당황한 것 같던데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어쩔 껴 지가. 서방님이 작은마누라(?)하고 건전한 대화(?)의 시간을 좀 즐겨보겠다는데. 흐흐흐! 화상아, 화상아, 건전한 대화의 시간을 즐겨보자는 게 아니고, 수작질 내지는 걸떡질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거겄지.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혀 이 호색한 자식. 이 새끼가 정말. 너 죽을 래! 딱! 파!
“언니가 무슨 상관이야. 나는 나고 언니는 언니인데. 그리고 나 이따가는 언니 집으로 안 가고 곧바로 우리 집으로 갈 거야.”
맞는 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주미는 주미고, 주희는 주희고, 승주는 승주고, 수창이는 수창이인 것이다. 이 보다 더 확실한 만고고금의 진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딱! 파!
“니 언니가 떡볶이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나중에 만났을 때 그 원망 감당할 수 있겠어?”
“형부하고 언니가 다 먹어치우겠지 뭐. 그리고 우리 언니 그런 거 그렇게 심각하게 안 따져. 가면 가고, 오면 오는구나 할 뿐이지. 어머, 저기 길고양이 좀 봐. 어쩜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마치, 인형 같아.”
쓰레기 더미를 열심히 헤집고 있는 길 고양이를 향하여 너무나도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있는 착하디착한 고2소녀. 대견하네.
“나는 고양이보다도 주희 니가 더 예쁘고 매력적인 걸?”
대패, 대패 어디 갔어? 딱! 파!
“고맙긴 한데 좀 닭살스럽다. 그렇다면 나도 한마디 안 할 수 없지. 사실 수창이 너도 살아있는 조각상 같아. 마치 다비드 같애.”
다비드? 미켈란젤로? 아니,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니다. 미켈란젤로 맞을 겨. 어쨌든 거 디게 쑥스럽구만. 딱! 파!
“다비드씩이나? 어쨌든 고맙다. 그래서 그렇게 초장부터 나를 조각상 감상 하듯 뚫어져라 노려봤던 거니?”
“너는 어떻고. 나 얼굴 빵꾸나는 줄 알았잖아.”
“크흑!”
“푸훗!”
이리도 죽이 착착 들어맞을 수가! 주미하고의 그 짓거리 때만큼이나 그렇게. 딱! 파!
“그런데 우리 오늘 초장부터 너무 닭살스럽지 않냐?”
“뭐 어때. 우리끼린데.”
하기야 닭살이면 어떻고 삼겹살이면 어떠리! 우리끼린데. 딱! 파!
“그래그래! 그런데 말이야 주희 너, 사촌 언니하고는 많이 친하니?”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당연하지. 친하니까 오늘도 이렇게 놀러 온 거잖아.”
“하기야, 친하지 않으면 놀러 올 일도 없었을 테지. 그랬으면, 우리의 이런 운명적인 만남도 불가능했을 테고.”
“맞는 말이야.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우리 언니 고아야. 고아였기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을 거야. 하지만, 천성이 워낙 밝고 낙천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거지.”
쿵!
내 의식의 심층 저 아래로부터 쏴! 하는 뭔가가 밀려올라오고 있다. 그런 여자가 저토록 그늘 없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니. 이건 정말 기적이다. 참으로 대견한 여자다. 아, 미안 하오 주미.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큰 아빠와 큰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우리 아빠 엄마가 주미 언니를 맡아서 길러 주셨던 거야. 옛날에 신문에도 나왔었대나 봐. 정말 큰 사고였대.”
“그랬었구나. 하지만, 아무리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밑에서 컸다고 하더라도 힘든 점은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저렇게 성격이 밝으니.”
“정말 그렇다니까. 그나저나 우리 언니 참 미인이지?”
“그래, 보기 드문 미인이더라.”
그래서 내가 니 사촌언니를 따 드신거야. 딱! 파!
“그럼, 너는 우리 언니하고 나 하고 둘 중에 누가 더 예쁘다고 생각 해?”
가만, 여기서 어떻게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까? 그래, 그러면 되겠군.“
“니 언니는 성숙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면, 주희 너는 뭐랄까. 깜찍한 아름다움이 좀 더 돋보인다고나 할까. 그리고 둘 다 같은 점은 막상막하의 국보급 미녀들이라는 사실.”
딱! 파! 화상, 대패 어딨냐? 짜샤, 나도 지금 찾고 있는 중이다. 
“국보급씩이나? 이거 너무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걸. 우리를 그렇게나 높이 쳐 주다니. 아무튼 고마워. 좋아! 나도 화끈하게 인심 한번 썼다. 수창이 너도 정말 보기 드문 미남이야. 국보급 미남.”
“에그 이거 쑥스럽구만! 어쨌든 고맙긴 한데, 아무래도 우리 이거 다음에 만날 때는 대패 한 자루 씩 꼭 휴대해야 하겄다. 안 그러냐?”
“대패?”
“그래야 시시때때로 닭살 박박 밀어가며 대화 죽죽 이어나갈 수 있을 거 아니겄어?”
“대패만 가지고는 안 되겠는 걸? 솔도 필요 해!”
“솔?”
“그래야, 박박 밀어낸 닭살 깨끗하게 잘 털어 낼 수 있지.”
“푸식! 정말 그러네!”
“푸훗!”
독자들의 빗발치는 아우성에도 아랑 곳 없이 꿋꿋이 닭살 행각을 이어가던 암수 어린 영계 한 쌍이 동명 중학교 정문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는 다른 때와 달리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열심히 공차기 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딴 때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니만. 머피의 법칙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에고, 이 따위 머피의 법칙이라면 하나도 안 반갑다.
운동장 가의 미루나무 아래쪽으로 애기엄마의 사촌여동생을 이끌고 갔다. 그리고는 낡은 나무 긴 의자위에다 사이좋게 엉덩이를 걸치며, 붉게 물들어 오기 시작하는 서녘 하늘 쪽으로 함께 눈길을 모아본다. 애기엄마의 사촌여동생이 이미 그 쪽에다 먼저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말이지. 
“노을 빛 참 곱네.”
“정말 그러네. 너 하고 함께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더 고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주희 너는 사는 곳이 어디야?”
이것아, 나는 지금 영양가 없는 저 저녁노을보다 너 사는 곳이 더 궁금하단 말이여. 아 물론, 나 혼자 올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 아름다운 저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애수에 잠길 때도 많았으니까. 삼삼한 여인들의 거시기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말이지. 딱! 파!
“사는 곳? 돌다리.”
“돌다리? 그러고 보니 가까운 데 살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이제야 온 거야? 니 언니 이사 온지도 한참 됐잖아?"
여기서 잠깐, 애기엄마의 사촌여동생이 말한 돌다리란, 석교동(石橋洞)의 순 한글 식 표현이다. 돌다리 동네란 뜻이다. 호동(虎洞)을 순 한글로 풀어 놓으면, 범골이 되는 이치와 같다.
“그동안 많이 바빴거든.”
“고2가 뭐가 그렇게 바빠?”
“고2도 바쁠 때는 무지 바쁘다 너.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말이지.”
“하기야.”
나 역시 고2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정신없이 바쁘지 아니한가. 공부도 공부지만, 애기엄마와의 신나는 푸닥거리 때문에도 그렇고 말이지. 딱! 파! 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는 애기엄마 사촌여동생의 곱디고운 옆얼굴을 몰래 훔쳐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폭 하고 새어져 나온다. 이건 정말로 만화 속 노을이 비치는 장면속의 그 여주인공 모습하고 하나 다를 게 없지 아니한가. 신비로운 느낌. 이런 신비로운 느낌을 느끼게 해 주는 여자들에게는 웬지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건드리지 않고, 그냥 곱게 한 자리에 모셔두고서 감상만 해 주어야 할 것 같은, 마치 고상한 고려청자와도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일까. 공주미는 그렇지 않은데, 김승주(혜은이) 그녀를 생각하면서 하는 자위행위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무언가 죄책감 같은 것만 잔뜩 들어오면서 말이지. 이 소녀 역시도 그렇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온다. 이러다 입맞춤도 못하게 되는 거 아녀? 입맞춤 할 때 죄책감이 들어오면 안 되는데. 쉽게 말해서 공주미는 상상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언제든지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대할 수 있는 쉬운(?) 여자로 느껴지는데 반하여, 김승주나 공주희는 그런 대상이 아닌, 고려청자처럼 그냥 그렇게 곱게 모셔두고서 살아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존재들이라고 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소녀의 입술만큼은 기필코 쟁취하고 말 겨. 딱! 파!
“후우우!”
“어머, 갑자기 웬 한숨?”
“석양빛에 물든 주희 니 얼굴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절로 이렇게 한숨이 다 새어 나온다 야.”
“푸훗! 오늘 닭살 여러 번 돋네. 수창이 니 얼굴빛도 아주 멋진데 뭐. 뭐라고 할까. 마치, 잘 익은 홍시감 같애. 큭큭!”
요것이 벌써부터 서방님을 놀려 먹는다 이거지? 애들이 보건 말건 그냥 여기서 콱 흡입 해 버려? 딱! 파!
“홍시? 강시가 아니고? 그래 나 홍시 훔쳐 먹다가 목에 걸려 죽은 홍시 귀신이다. 우리 주희 처녀 잡아먹으려고 환장하신 홍시 귀신이여. 이히히히!”
“야아! 그러지 마. 무섭단 말이야.”
“무서워? 다 큰 애가?”
“다 컸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야.”
“하기야, 우리 엄마도 귀신 무서워 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전설 따라 삼천리 라디오로 들을 때마다 이불 푹 뒤집어쓰던 거 생각난다.”
“그랬어? 나도 그랬었는데. 이불 안 뒤집어쓰면, 뒤에서 귀신이 덥썩 하고 덮칠 것만 같았잖아.”
“그랬었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언제 한번 놀이공원에 같이 놀러 가면, 귀신의 집에도 들어가 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귀신의 집이 아니라, 정작 우리 언제 한번 놀이공원에 같이 놀러 가면이란 그 말씀. 딱! 파!
“싫어. 나 그런데 못 들어가.”
“말만한 처녀가 엄살이 심하군. 아무튼, 나 하고 같이 놀이 공원 한번 놀러 가는 거야?”
“알았어. 귀신의 집은 그렇지만, 놀이기구 타는 건 좋아하니까.”
끼야호! 이로써 애기엄마의 사촌여동생도 확실하게 내 수중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된 셈인가? 그렇다면 이제 김승주만 남은 셈이군. 딱! 파!
“기분 째지네.”
“그렇게도 좋아?”
“그걸 말이라고 하니? 너 같이 예쁜 여자 애하고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간다는데,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남자들의 마음도 다 똑같을 걸?”
“사실은 나도 너처럼 잘생긴 남자하고 같이 놀러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있어.”
“정말? 이거 인간 허수창 오늘 진짜로 기분 째지는 날이구나. 고맙다 주희야. 그건 그렇고 너 오늘 그냥 돌아가지 마라?”
“?”
뭘 그리 놀래니? 여관에 가잔 소리 아니니까 걱정 하덜덜 말어. 딱! 파!
“니 언니 집에 잠시 들렸다가 가라고.”
“아, 난 또 뭐라고. 그건 아까 말했잖아. 시간이 늦어서 그냥 우리 집으로 갈 거라고.”
“그러지 말고, 언니 잠깐 만나보고 가라.”
“왜?”
왜긴 이것아. 니 언니 지금 우리 때문에 잔뜩 토라져 있어서 그러지.
“니 언니 아까 보니까 약간 삐진 것 같더라. 그러니, 기분 좀 풀어주고 가란 뜻이야.”
“언니가 삐졌다고? 아냐. 니가 잘 못 본 거야. 우리 언니, 삐지고 그런 거 없어. 그 언니 성격에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러네. 그건 말이지. 너 하고 나 때문에 그럴지도 몰라.”
“나 하고 너 때문? 그러니까 언니가 지금 우리 사이를 질투라도 하고 있단 말이니?”
“그래. 내 느낌에는 딱 그런 것 같더라.”
이것아, 그런 것 같더라가 아니고, 사실이라니까.
“말도 안 돼. 우리 언니가 무슨. 우리 언니는 결혼한 여자야. 그리고 형부를 사랑하고 있고. 수창이 너가 잘못 생각 한 거야. 설사, 결혼을 안 했다고 쳐도 우리 언니는 절대로 누구를 질투하거나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내가 오랫동안 겪어봐서 잘 알아. 너는 우리 언니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한 거니?”
이것아, 너야말로 모르는 소리 작작해라. 너처럼 예쁜 여자들은 태생적으로 불같은 질투의 화신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니까 그러네. 나는 말이야. 니 언니의 속살에 점이 몇 개나 박혀 있는지까지 벌써 속속들이 다 꿰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여. 딱! 파!
“아무튼 내 말 들어. 나 말이야. 여자만큼이나 직감력이 높은 사람이야. 그러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가주라.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수창이 너 그러고 보니 고집이 무지 세구나? 알았어. 너가 왜 자꾸 우리 언니를 만나보고 가라고 하는지. 너 일분일초라도 더 나 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그렇지?”
“어떻게 알았어?”
“푸훗!”
“크크크!”
하지만 순결하고 고귀한 어린 처녀여. 그대의 타락한(?) 언니는 지금 엄청 상심 해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오. 이 철없는 정부 녀석 때문에 말이오. 딱! 파!
동네아이들이 모두 떠나간 텅 빈 운동장 위 칠흑 같은 밤하늘엔 듬성듬성한 별들이 이미 조는 듯 깨는 듯 흐리게 가물거리고들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유난히 크고 밝은 별 하나가 선뜻 눈 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저번에 보았던 바로 그 발광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천문현상에 대하여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저 발광체가 최소한 금성이나 화성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 눈치들을 챘으리라.
“그럼, 언니 집에 잠깐 들렸다 가는 거지?”
“알았다니까 그러네. 너가 그렇게 원하는데, 그렇게 해 주지 뭐.”
“고맙다. 그런데 주희야, 저 별 말이야. 어쩐지 유난히 튀어 보이는 거 같지 않니?”
“어디? 정말 그러네? 무슨 별이 저렇게 크지? 아, 맞다. 금성이야.”
띠요옹! 이 여자가 바로 그 무지한 사람 중의 하나였던가? 아니, 무지한 사람보다도 더 무지한 존재였던가? 어떻게 저걸 보고 금성이라고 단숨에 단정을 지어버릴 수 있는 거지? 하기야......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천문 현상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무렴 그렇고말고! 예쁜 여자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꿰고 있다는 것도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법이지 뭐. 화상아, 화상아, 아예, 업고서 춤이라도 추지 그러냐? 마누라가 예뻐 보이면 처갓집 말뚝에다가도 대고 절을 한다더니 이 화상이 딱 그 짝일세. 짜샤! 시비 좀 그만 붙어라. 안 그래도 나 지금 이 아이 업고서 춘앵무(이씨 조선 때 왕 앞에서 추어 보이던 정중동 동작의 춤- 글쓴이 주)라도 살랑살랑 추고 싶은 심정이니께. 허으! 딱! 파!
“금성은 아니고.”
“아니야? 그럼 뭐? 아 맞다. 화성이다. 화성. 틀림없어.”
띠요옹!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내 어찌 그대처럼 깜찍한 미소녀의 무지를 비난할 수가 있단 말이오. 감히 말이오 내 사랑! 딱! 파!
“화성도 아니고.”
“이상하네. 금성도 아니고 화성도 아니라면 그럼 저게 대체 뭐야? 아 맞다. 그럼 미확인비행물체다. 그거 맞아. 외계인이 타고 온 미확인비행물체. 가만, 그런데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어째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 우리 작은 공주님, 마냥 빈 머리는 아닌데? UFO라고 안 하고, 정확히 미확인비행물체라는 국산 말을 사용 해 주네? 어허허! 대견 혀! 정말 대견 혀!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니 말대로 저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 확신을 할 수가 있어야지. 저번에도 저게 저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었거든.”
“저번에도?”
“그래, 지난번에 여기서 운동할 때도 한번 본적이 있어.”
“그래?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 그렇다면,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관심을 가졌을 법 한데 왜 여태 보도에는 한 번도 안 나왔지? 그런 보도를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에고 대견한 것. 뉴스라고 안 하고, 보도라고도 하고. 어이구 장한 것! 그래, 그래야 되는 겨. 될 수 있으면 외래어 남용을 삼가고, 국산 말을 애용해 주어야 하는 겨. 독자들도 명심해야 혀. 딱! 파!
“나도 그 점이 이상하더라. 분명히 저게 금성이나 화성은 아닌데, 새 소식에는 안 나온단 말이야. 마치, 딴 사람들은 못 보고 나 혼자서만 목격한 것처럼 말이야.”
“새 소식? 아, 보도. 아무튼, 이상하긴 하다 얘. 어쩌면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던 새로운 별일수도 있는 것이고.”
띠요옹! 모르고 있던 새로운 별? 역시, 안 무식하다고 할 수가 없군. 하지만, 저 무식함이 오히려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만 하니, 이 무슨 해괴한 경우란 말이오 천지신명이시여. 내가 지금 아무래도 이 깜찍 소녀한테 급속히 미쳐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요 네네. 딱! 파!
“절대로 새로운 별은 아니야. 그런 건 없어. 어쨌든 우리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너가 너무 늦어지면 안 되니까.”
“그래. 하여튼, 앞으로도 계속 잘 관찰 해 봐. 혹시 아니? 수창이 너가 이 세상 사람들이 미처 모르고 있던 색다른 별을 최초로 발견한 선각자로 남게 될지?”
“그렇게 되면 나 유명인사 되는 건가?”
“난 그 유명인사의 아내가 되는 거고?”
띠요옹! 고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는 당돌한 소녀를 마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까지 후들려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 저렇게 당돌하고 깜찍한 미소녀가 내 아내가 되어 준다니. 정말, 귀엽고 대견하고 사랑스럽고. 나 어쩌면 좋으니? 이러다 나 너 때문에 미쳐 버리는 거 아니니? 그런데 정말, 입맞춤을 죄책감 없이 해 낼 수 있을까? 딱! 파! 몸뚱이를 죄책감 없이 빼앗을 수 있을까? 딱딱! 파파!
마치, 아주 오래 된 연인처럼 손깍지까지 꽉 낀 채로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요상한 별은 여전히 하늘의 한 귀퉁이에서 미동도 않은 채, 가만히 어린 연인들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기다려라. 내 너의 정체를 반드시 밝혀내고 말 껴!
대문을 밀치고, 나란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닷없이 미래의 아내가 될 소녀가 미래의 남편이 될 소년의 품안으로 토끼처럼 깡총하고 뛰어 들더니만, 쪼옥! 하고 예비 남편의 입술을 훔쳐 버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찡긋 해 보이며, 유령과도 같이 현관문 안으로 쏙 사라져 버리고 만 이 현실. 이 현실이 진짜 현실 맞는 겨? 나 방금 전 이상한 꿈 꾼 거 맞지? 응? 짜샤, 내 볼 좀 꼬집어 봐라! 꼬지입! 아야야!
혼이 다 빠져나간 채로 그저 멍하니 계속 현관문 쪽만을 응시하고 있는 우리의 애기엄마 정부 선수. 그 화상, 잘난 체는 혼자 다 하더니, 지가 먼저 애기엄마 사촌여동생한테 당했네 그랴. 흐! 대체 이게 뭔 일이래? 이거 정말 꿈 아닌 겨? 흐! 딱! 이 화상 이거 완전히 맛이 가 버렸나 보네. 딱! 파! 정신 차려 화상! 헤벌레! 쿵!
띵똥! 띵똥!
이건 또 뭔 소리여? 그려, 초인종 소리구먼. 흐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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