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30. 12:41ㆍ허세창장편소설
09
태양의 계절이 언제였던가.
아득한 기억으로 저 멀리 갔지.
너의 사랑스러운 그 느낌까지도.
그리고 다시 찾아온 이 가을 숲 속.
붉은 낙엽들이 반짝거리고
갈색 바람은 그 위를 묵묵히 서성거리지.
내 간절한 추회의 한 자락처럼.
밟히는 낙엽소리,
그리고 갈바람,
그들은 또다시 내게 말하지.
반가운 친구여! 어서 오세요.
우리들과 정답게 친구 해 봐요.
나는 웃음 지으며 대답을 하지.
친구들이여! 이리 와 봐요.
저기 보이는 물가까지 함께 가 봐요.
그래서 함께 숲 속 길 따라 호수로 가지.
그러면 낙엽과 바람은 내게 말하지.
호수가 정말로 아름다워요.
그래요 호수는 정말로 아름다워요.
그래서 우리는 정답게 웃지.
마치 저 환하게 미소 짓는 호수의 물빛처럼.
(스무 살 승주에게 미쳐있던 열네 살 수창의 넋두리 중)
아래층 여자와 이쯤에서 끝내려 한다. 물론, 그녀가 싫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꿀맛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그녀와 끝내려고 한다. 누구의 허물을 떠나, 남녀 관계라는 것이 애당초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가장 좋을 때 미련 없이 끝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가 그랬는데? 누구긴 누구여 바로 나지. 딱! 파! 사실, 책에서 본 내용이다. 하지만, 그게 진짜 맞는 말인지는 나 스스로도 아직 아리송하기는 하다. 아무튼 책 쓴 녀석이 그렇다고 하니까 일단은 믿어 볼 밖에.
애기 엄마가 나를 나쁜 놈이라 욕해도 좋다. 물론, 내가 느닷없이 이런 생각을 먹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녀의 사촌 여동생 때문이기도 하다. 내 나이 또래 여자 친구와 더불어 정상적(?)이고도 떳떳한 만남을 하고 싶어진 것이다. 물론, 두 여자를 동시에 품고서, 떳떳한 연애와 위험한 연애 관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그에 덧붙여 승주까지도 말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차마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지속 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여자들에게 미안한 일이고, 나 스스로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명색이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하여 무예 수련을 하고 있다는 놈이 말이지.
아, 큰 공주와의 이별이 이렇게 빨리 닥쳐오게 될 줄이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아,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작은 공주를 생각한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그래, 그 대신 우리 마지막으로 최후의 꿀 같은 만찬이나 진하게 즐겨보지 뭐.
다음날 늦은 오후, 주미의 거실로 갔다. 주미의 얼굴은 어제의 그 일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살짝 토라져 있는 느낌이 든다. 제기랄! 떼어 내 버리고자 하는 마당에 왜 또 저런 모습이 더 매력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겨. 이거 정말 미치갔구만. 아니다. 사나이 한번 결심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흔들리면 안 되는 겨. 하! 그래도 아쉽긴 하네 그려. 딱! 파!
철기무사의 강력한 공격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 여신의 성채가 또다시 활활 불타오른다. 성채 주인의 단말마와도 같은 긴 비명소리. 그리고 그에 화답하는 애의 울음소리마저도. 그러나 철기무사는 아랑곳없이 여신의 성채를 질기도록 헤집어 간다. 마침내 성채 주인의 애처로운 신음 소리가 시나브로 잦아들 무렵, 철기무사는 그 소리를 그대로 뒷전에다 남겨둔 채로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성문 밖으로 옮기어 간다.
긴 언덕 위 청란여고 정문 아래로 길게 내리 뻗친 회사물 포장길 위에 수많은 여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음이 가득 넘쳐흐른다. 청란여고 학생들의 방과 후 귀가 시간. 그 속에서 나는 오늘도 여전히 작은 공주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와의 만남은 언제나 이렇게 나를 설레게 한다. 큰 공주를 내친 후, 작은 공주 하고만 함께 하고 있는 날이 벌써 이렇게 열흘째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애기 엄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한번 결심한 일을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래서 결국, 그녀로부터 더 확실하게 벗어나기 위해 이사까지 가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닌가. 엄니가 대체 뭔 일인데 그러는 겨? 하셨지만, 외아들의 떼기장(억지)을 어찌 당하실 수 있으리오. 그래서 결국 내일은 새 전셋집으로 이삿짐을 옮겨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삿짐이라고 해 봐야 소형 화물 한 차 분량도 안 되는 단출한 규모다. 그래서 손수레를 빌리기로 한 것이다. 정인철, 외삼촌,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직접 이삿짐을 나르기로 했다. 작은 공주도 일손을 보태준다고 앙탈을 부려 댔지만, 어찌 귀하신 공주님께 감히 그런 수고를 끼치게 할 수 있으리오. 큰 공주 역시도 우리 집이 이사 간다는 사실 자체는 벌써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제 사촌 여동생이 쫑알거려 댔을 터이니.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계속 언덕길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침내 저 위 쪽으로부터 내 앞쪽으로 종종걸음을 쳐오고 있는 교복 입은 한 특출 난 소녀의 모습. 다른 여학생들과 비교해도 말 그대로 군계일학처럼 느껴진다. 그나저나 교복 입은 모습마저도 저토록 깜찍하다니. 저 뻔때(모양) 없이 시커멓게 생긴 교복(이 시절 남녀 학생의 시커먼 교복 모두 일본제국주의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한다. - 글쓴이 주)마저도 감히 우리 작은 공주님의 깜찍함 자체를 퇴색시키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여튼, 두 여자 모두 미색 하나는 타고난 것 같다. 아니, 승주까지 더 해서 총 세 여자네. 아니, 앞으로 더 취하게 될 내 미지의 여인들 숫자까지 더하게 된다면? 딱! 파!
“왜 이렇게 늦었니?"
“많이 기다렸어? 우리 담임이 잔소리를 길게 하는 바람에.”
“많이 기다린 것은 아닌데, 하여튼 이 학교나 저 학교나 그 놈의 꼰대들이 문제라니까. 어서 가자."
사실, 우리가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근처 텅 빈 어린이 놀이터. 금전 부담 안 드는 매우 저렴한 장소다. 다행히 그녀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는 곳이다. 함께 그네를 즐기며 호젓하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수 있어서 좋고, 또 애들만 없으면, 몰래 뽀뽀도 할 수 있어서 더 좋은 곳이다. 딱! 파!
“우리 오늘은 놀이터 가지 말고,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떡볶이? 배고프니? 너 살찌면 어떡하려고?”
사실, 내 수중에 전(錢)이 없어서 하는 소리다. 에그, 한심한 녀석. 너 왜 이렇게 미련하게 사냐 살길? 안 버려도 될 여자를 굳이 버리질 않나, 또 그 여자가 준다는 용돈 역시 굳이 마다하지를 않나, 그래 놓고는 제 여자 친구 떡볶이 사 줄 돈도 없어 이렇게 빌빌거리고 있질 않나. 하여튼 등신짓은 혼자서 도맡아서 해요. 너 이 새끼 말 다했어? 그래 다 했다 이 등신아 어쩔래? 이 새끼가 정말 에라이 퍽퍽! 억억! 왜 때려 이 등신 자식아. 등신짓은 혼자 도맡아 해 놓고 왜 엄한 나를 때리느냔 말이여? 야, 이 자식아. 그게 왜 등신짓이냐? 이리저리 문어 다리 안 걸치고 바르게 살고 싶다는 게 왜 등신짓이여? 그리고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제 계집한테서 용돈을 받아 쓰냐? 그게 불알달린 사내자식으로서 할 짓이여? 이 등신아! 너는 지금 돈 버는 직장인이 아니잖여. 용돈 타 써야 할 학생 놈이잖여. 이 자식이 그래도 끝까지 앙졸 거리네? 에이 죽어라. 퍽퍽퍽! 악악악! 아이고 동네 사람들아아! 등신 자식이 사람 잡아요오!
“살은 무슨. 걱정 말아 나 살 잘 안찌는 체질이니까. 너 사실대로 말 해. 돈 없어서 그러는 거 맞지? 걱정 말어. 너한테 돈 내라고 안 할 테니까. 어제 나 우리 아빠한테 용돈 두둑하게 받았다.”
“미안하다. 남자친구가 되어 가지고, 여자 친구가 먹고 싶어 하는 떡볶이 하나도 못 사주고.”
등신자식! 미안한 줄은 아는구먼. 이 새끼가 정말! 왜 이리 심줄이 길어?
“그런 소리 말라니까. 너희 엄마 떡 장사 하시며 힘들게 사시는 거 내가 다 아는데, 어떻게 너한테 돈을 쓰라고 할 수 있겠어. 앞으로도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말어.”
비참하군! 쥐구멍이라도 들고 싶다. 아니까 다행이네 등신 자식! 정말 미치갔구만! 죽지도 않고, 사사건건 나불거리는 이 자식을 대체 어찌 해야 하나? 수채 구멍에다 콱 쑤셔 박을 수도 없고. 메롱! 아아악! 으드드드!
“그래, 고맙다. 하여튼 주희 너는 하늘나라에서 옥황상제를 모시고 살다 내려온......”
가만, 이거 요상하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그렇지. 애기 엄마한테 아부를 떨 때 했던 바로 그 소리지. 에그, 이 덜 떨어진 놈. 촌스럽게 뻑 하면 그 놈의 선녀 타령은. 그나저나 한번 내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이거 어쩌냐. 으이그!
“갑자기 웬 옥황상제? 옳아. 그러니까 내가 하늘나라에서 옥황상제를 모시고 살다 내려 온 선녀 같다는 말 하려고 했던 거지? 맞지? 그렇지?”
눈치 무지 빠르네. 주미 뺨치네 그랴.
“그래, 너 마음 쓰는 거 보면 꼭 선녀 같다니까. 하늘나라에서 살다 내려 온 마음씨 착하고 어여쁜 선녀. 그리고 나는 그 선녀의 옷자락을 몰래 감춰 둔 나무꾼 소년.”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뭐. 흐흐흐!
“하여튼 수창이 너는 생각하는 게 정말 독특하다니까. 천사도 아니고, 선녀래. 아무튼 고마워. 어서 먹으러나 가자. 나 지금 정말 출출하단 말이야.”
이것아, 나는 천사를 싫어 해. 선녀를 좋아한다고.
“네 선녀님, 어서 가십시다요. 떡볶이 집으로.”
“오냐! 나무꾼 소년아!”
푸식!
떡볶이 진짜 잘 먹네. 무슨 소녀가 곰 같은 떡대 녀석보다도 더 잘 먹냐? 혹시, 위대(胃大)한 소녀? 그래, 열심히 먹어주렴. 그래야 무럭무럭 잘 크는 거 에요. 딱! 파! 다른 여학생들의 부러움과 질시의 눈길이 끊임없이 우리들을 힐끗거리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두 연놈은 굳건히 여물통 맷돌질에만 열중 해 있다. 뭐 어때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러는 게 뭐 어때서? 못 하는 것들이 등신이지 뭐. 딱! 파!
“주희 너 떡볶이 정말 잘 먹는구나?”
“너도 나 못지않은데 뭐?”
“떡볶이가 맛있는 이유 하나만 대봐?”
“그야, 쫄깃쫄깃 씹히는 맛에다가 매운 설탕과 고추장 맛이 절묘하게 조화된 달착지근한 맛 아니겠어?”
딩동댕! 가만, 쫄깃쫄깃? 그건 애기 엄마의 그 뭐시냐? 딱! 파!
“딩동댕! 맞아, 나도 쫄깃 거리는 그 맛 때문에 이렇게 좋아하는 것 같다. 사실, 쫄깃 거리는 것 치고 나쁜 건 없으니까.”
으이그 이 화상! 왜 임마? 내가 뭐랬는데? 됐다. 그만두자. 그 자식 싱겁기는!
“맞아. 국수도 쫄깃 거리는 게 좋고, 우동도 그렇고, 라면도 그렇고, 호떡도 그렇고, 떡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런 것 같아.”
용서 해 다오 주희야. 너의 아침이슬과도 같이 그 맑고 영롱한 마음에 자꾸만 썩은 오물을 덧씌우려고 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너처럼 보다 착하고 순수하게 살고 싶어. 이건 진심이야. 딱! 파! 화상아, 실천 못할 약속은 애당초 금물. 너는 절대로 그렇게 못 살 놈이란 거 내가 다 안다니까. 짜샤, 나 그렇게 살고 싶다니까 왜 자꾸 딴지를 거는 겨? 딱! 파! 넌 안 된다니까 그러네. 안 되기는 쥐뿔!
주희와 함께 떡볶이를 올챙이배가 되도록 찍어 먹고는 가게를 빠져 나오며 슬쩍 쫄깃한 그 여자의 동정을 떠 보기로 했다. 그녀가 혹시라도 우리 관계를 눈치 채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그 궁금증 때문이었다. 물론, 이미 걷어 차 버리고 이사까지 결정한 마당에 그녀가 굳이 알게 된다고 해도 더 이상 거리낄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때(?) 자신의 정부였던 녀석이 자신을 걷어 차 버린 이유가 바로, 자신의 사촌 여동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굳이 깨닫게 할 필요 까지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나 요즘 미치겄다. 막상 걷어 차 버린다고 선언 하긴 했는데, 그러고 나니, 오히려 더 많이 그녀의 쫄깃한 거시기가 그리워지니, 대체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한단 말고? 이것이 바로 꼰대들이 말하는 금단현상이라고 하는 것인가? 딱! 파! 화상아, 그 여자 거시기가 술이냐? 담배냐? 마약이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거나 이거나 새끼야! 도친 게 메친 게지. 꼬르륵!
“주희 너, 혹시 사촌 언니가 뭐라고 하는 말 못 들었니?"
"주미 언니? 뭘?"
아직 얘기 안했나보군. 고맙다 주미야. 흐흐!
“니 사촌 언니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말 못 들었냐고?"
“너에 대해서? 아니! 아무 말 없던데. 그런데 이상하네. 너 갑자기 왜 주미 언니 이야기를 꺼내고 그래? 그리고 주미 언니가 너에 대해서 뭘 물어? 가만, 너 혹시 그 언니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니니?"
컥! 이걸 어쩌냐? 아닌 게 아니라 몹시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등신 자식을 노려보고 있는 작은 공주의 날카로운 저 눈길. 그런데 왜 저리 사랑스러운 겨? 그리고 고혹적인 겨? 딱! 파! 하지만, 두렵다. 만일 이 애가 그동안 주미와 있었던 일을 모두 알아채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 혀. 바로 그래서 애기 엄마와 있었던 일은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꼭꼭 숨겨 두어야 한다는 결심까지 했던 거 아닌가. 그래서 더욱 더 철저히 그녀를 피해 다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물론, 주미는 지금 나의 일방적인 이별 선언 이후로, 너무나도 큰 충격에 휩싸여 있는 중이다. 그녀의 하염없이 괴로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두 눈에 선하다. 그런 모습조차도 어찌 그리 사랑스럽게 보이던지. 처연미의 극치가 따로 없었지. 그 순간, 그때까지의 모든 결심을 뒤 엎고 그냥 그녀를 다시 끌어안아 버릴 뻔 했었다. 가까스로 잘 참아내긴 했지만.
“너 왜 그래?”
작은 공주가 몸을 흔드는 바람에 간신히 큰 공주 생각에서 벗어나는 등신자식. 작은 공주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못하고서, 무섭게 등신자식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할까? 비상조치를 강구해야 하는데. 그래, 바로 이거여!
“흐흡! 수 숨 막혀! 흐흡!"
지나가던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들이 경악의 눈길로 흘깃거리고 있거나 말거나, 지나가던 남학생 여학생들이 제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입을 딱 벌리고 있거나 말거나, 등신자식의 뻔뻔한 이 비상조치는 점점 더 단호하고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으읍! 그 그만. 그만, 아흐읍!”
“그냥 놓아주려면 애당초 시작도 안했어. 요 귀여운 참새!”
“아흡! 아으흡! 그만! 아흐읍!”
멀어지고 있는 버스의 흐린 뒷 유리창 너머로 급기야 입술이 부르터 버리기까지 한 귀여운 작은 참새가 꽤나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나를 돌아다본다. 앙증맞은 두 볼떼기 역시도 더욱 더 싱싱하게 빛나고 있다. 비상조치 효과만점이군 그래. 딱! 파! 이젠 확실히 결정했어. 힘들긴 하겠지만, 분명하게 애기엄마를 떼 버려야 한다. 아니, 이미 떼 버렸다. 미안 해 내 사랑!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려 버린 나를 너도 언젠가는 이해 해 줄 날이 올 거야. 아니, 오히려 이런 힘든 결정을 해 준 나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게 될 거야.
골목길을 막 꺾어져 도는 순간, 저만치 집 대문 앞으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인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다. 딱 걸렸군! 그나저나 저 여자는 도대체가 왜 이런 상황에서조차 미워 보이질 않는 겨? 미워 보이기는커녕, 이제부터는 내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아쉽기만 하네 그랴. 딱! 파! 제기랄! 그냥 이대로 내 달아 가서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아 주면서 모든 걸 취소한다고 선언 해 버려? 이 못난 자식을 용서 해 달라고 무릎 꿇고 살살 빌어 봐?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일부러 더 차가운 표정을 짓고서 그냥 집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등신 자식. 그리고 일부러 더 애기 엄마를 못 본 척 하며 그대로 대문을 열고 안으로 쑥 발걸음을 들이 미는 등신 자식. 그래 지금까지는 아주 잘하고 있는 겨. 승주, 내게 힘을 주시오! 주희야, 나한테 힘을 주라! 딱! 파! 수십 년 면벽수련에 든 달마 스님답게 절대로 이 유혹에 무너지지 않도록 내게 힘을 주오 승주! 주희야! 자, 이젠 한 고비 남았다. 절대로, 절대로 뒤돌아보는 일 없이 마지막 계단을 힘차게 걸어 올라가 보자. 자, 힘내 보는 겨 허수창! 영찻! 영찻!
“허수창 너?”
깜짝이야! 이 여자야, 왜 왜가리는 소리는 내고 그러는 겨? 애 떨어질 뻔 했잖여! 그래도 안 되는 겨. 이 여자가 이렇게 내 몸뚱이를 뒤에서 결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져도 절대로, 절대로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안 되는 겨! 그나저나 이 여자 팔뚝 힘이 언제부터 이렇게 세진 겨? 당최 옴짝 달싹을 못 하겄네. 혹시, 산삼뿌리라도 삼킨 겨? 딱! 파!
'허세창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소설]잎새의떨림11 (0) | 2025.01.17 |
---|---|
[장편소설]잎새의떨림10 (1) | 2025.01.06 |
[장편소설]잎새의떨림08 (1) | 2024.12.26 |
[장편소설]잎새의떨림07 (1) | 2024.12.21 |
[장편소설]잎새의떨림06 (8) | 202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