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6. 10:16ㆍ허세창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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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물든 도시의 가로수 잎들을 바라본다.
아, 저 엄청난 퇴색 빛의 존재들이......
그래서 문득 나는 등가방 하나 달랑 짊어지고서
총총히 이 복잡한 도시를 떠나서 간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아름다운 산천의 모습들과
그 속을 맑게 호흡하며 걸어가는 내 자신이......
가을 여행은 그래서 언제나
마치, 저 먼 하늘과 산의 단풍 모습들처럼
내 스스로가 명백히 살아있음을
빨갛고 울긋불긋하게 증거 해 준다는 것.
그리고 어느 낯선 마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벅찬 희열로 닿아 버릴 수도 있다는 것.
승주,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당신의 향기 같은 저 가을 속으로
분주한 상념 되어 떠나서 간다.
(스무 살 승주에게 미쳐있던 열네 살 수창의 넋두리 중)
“이러지 말아 공주미씨!"
아, 힘들다.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마치 남인 듯 성까지 더 해서 부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마음을 더 굳게 다져먹어야 혀. 너 여기서 물러서면, 앞으로 훨씬 더 많이 곤란한 상황들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말이여. 그 화상, 무예수련 한다는 놈이 겁은 디게 많네 그려. 짜샤! 너는 어째 이랬다 저랬다 줏대가 없냐? 사귄다고 딱! 안 사귄다고 딱! 도대체 뭐연 마? 사귀라는 거여 말라는 거여? 나도 몰러! 니 맘대로 혀! 꼬르륵!
“공주미씨! 그렇게 애쓰지 마!”
“허수창! 나는 다 알고 있어. 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절대로 나를 버리지 못 해!"
아,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마치 사채업자 마누라의 목소리 같은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이런 제기랄! 하지만, 마음을 더 굳게 다져 먹어야 한다. 여기서 그냥 항복을 해 버리고 말면, 더 더욱 떼어내기가 힘들어진다. 마치, 저 북극의 매서운 칼바람처럼.
“어차피 우리 관계는 오래 갈 성질이 아니었잖아. 그러니 공주미씨, 더 이상은 미련을 갖지 말고 이쯤에서 그냥 끝내자. 당신 말대로 나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 맞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순리인 것 같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했잖아. 공주미씨 남편도 바보가 아닌 바에야 언젠가는 눈치를 채고 말 테고.”
그러나 스물다섯 살의 사랑스러운 애기 엄마는 순순히 고삐리 정부 녀석의 말을 따라 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매달려 온다. 하, 미치겠다 정말! 니가 자꾸 이러면, 내가 더 힘들어진단 말이다 이 꽉꽉 깨물어 먹고 싶도록 사랑스러운 여자야. 나라고 해서 너와 헤어지고 싶은 줄 알어?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지?
“단지 그 이유 때문이야? 단지 그 것 때문에? 바보 같은 놈. 그따위 것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그 인간이 알게 된다고 해도 이혼하면 그만인 거야. 싫은 사람과 억지로 더 살 필요도 없으니까. 언젠가 너도 그랬잖아. 그 인간을 먼 외딴 섬으로 귀양 보내 버릴 거라고. 그런 말까지 해 놓고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나약해진 거니? 수창아, 나는 오로지 너뿐이야. 그 인간하고 헤어져 빈 몸뚱이가 되더라도 오로지 너만 내 곁에 있어주면 더 바랄 것도 없어."
고맙다 공주미. 그토록 나를 생각 해 주다니. 눈물겹도록 고맙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헛똑똑이야. 어떻게 달랑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같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내쳐 버릴 수 있단 말이니. 진짜 이유는 그대의 귀여운 사촌 여동생 공주희 때문이란 말이다. 너만큼이나 어여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깜찍한 그 소녀 때문이란 말이여. 오로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란 말이여. 그래서 너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란 말이여. 이런 내 마음을 왜 몰라주는 겨? 이 버리기 정말 아까운 여자야! 화상,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진짜로 니가 애기 엄마한테 상처를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공주희와 헤어지고 공주미와의 관계를 지속 하는 게 정도인 겨. 왜? 그야 당연히 공주미가 공주희 보다 먼저 네 여자가 되었던 때문이지. 그리고 이미 살도 수없이 섞은 사이고. 말하자면, 공주미가 오히려 엄청나게 너에 대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거란 말이여 이 멍청한 녀석아! 그런데도 니가 지금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부려대고 있는 거란 말이여 이 멍청한 녀석아! 이 이자식이? 너 자꾸 그렇게 멍청이 소리 해 댈 겨? 쥐기뿐다? 어쭈! 멍청한 녀석이 이제는 되도 않는 경상도 사투리 흉내까지? 가관이네! 가관이여! 으아악! 짜샤 너 때문에 나 못 살어! 못산다니 께! 후다닥! 짜샤아! 너 거기 안스냐아!
“사람 마음은 변할 수 있는 거잖아.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싫어 절대로 난! 그 인간이 다 알아버려도 좋다니까. 이젠 정말 미련도 없어. 이혼 해 버릴 거야. 그리고서 너와 단둘이 어디로 멀리로 가서 새 출발 하고 싶어."
주미가 이제 막 나가고 있다. 그만큼 다급해져 있다는 반증이겠지. 불쌍하고 가련한 여자.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주희만 아니라면, 나도 얼마든지 그러고도 싶다. 하지만 절대 안 되는 일이야. 나는 진심으로 네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주희를 사랑하고 있다. 너를 이렇게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오늘따라 더 눈에 뜨이게 수척해 보이는 주미의 얼굴. 가련한 것. 그 얼마나 많은 고뇌를 겪었으면 저 지경까지? 하지만, 저토록 수척해진 얼굴이 오히려 더 처연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이 역설은 또 뭐란 말인가. 아, 나도 너와 헤어지고 싶지가 않다. 너처럼 사랑스러운 여자를 차마 어떻게 내쳐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서 더 더욱 너를 내쳐 버려야만 한다.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깊어질수록, 오히려 더 악착같이 더 너를 걷어 차 버려야 하는 겨!
바로 그 때, 채 닫아 걸리지 않았던 대문의 안쪽으로 누군가가 불쑥 들어서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절초풍하여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는 불륜 남녀. 죄 지은 것이 많기에......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거기에는 그녀의 법적인 남편이 아닌, 연세 지긋한 돗자리 행상 하나가 한 손에 돗자리를 번쩍 치켜들고는 희죽이 웃어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하나가 빠진 자리 사이로 시커멓게 입 속이 비쳐 보이는 모습이 마치, 웃으면 복이 와요 속의 고전 해학극장 배삼룡 모습 딱이다.
이제 막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주미가 당장 나가달라고 요청을 하자, 느닷없이 혀를 낼름 해 보이며 바람처럼 대문 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늙은 돗자리 장수. 그렇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지극히 황당하고도 기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시점에서는 당연히 누구라도 허탈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털털거려주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륜 남녀는 그저 놀란 눈으로 돗자리 장수가 사라진 장소만을 망연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그때, 갑자기 고양이 울음 같은 애의 울음소리가 정적의 공기를 가르고 든다.
“애 깼나 봅니다. 얼른 들어가 봐요 공주미씨!"
이렇게 깍듯이 하오체를 붙여주면, 떼어내는데 어느 정도 더 효과가 있을까? 딱! 파!
“애 깬 게 대수야? 그 인간의 씨앗,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 그러니 자기야, 제발 마음을 돌려줘. 나 자기하고 이대로 헤어지면 절대로 견뎌 낼 수가 없을 거야. 어쩌면 약 먹고 칵 죽어 버릴지도 몰라.”
이제는 노골적인 협박까지? 하지만 주미야. 우리는 반드시 헤어져야만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꼭 헤어져야만 한다니까. 화상아, 너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할래? 짜샤 너는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알았어! 꼬르륵! 저 자식이 증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공주미씨가 들어가기 싫다면, 그럼 나 먼저 올라가지요. 피곤하기도 하고, 내일 이삿짐도 날라야 되니까요."
순간, 그 육감적인 입술을 주름이 지도록 꽉 앙다문 채, 번개처럼 고삐리 녀석의 가슴 팍 안으로 뛰어드는 애기 엄마. 그리고는 그 백짓장같이 얇은 손바닥을 들어 거침없이 고삐리 녀석의 면상을 후려치려던 찰나, 어느새 녀석의 우악스런 손아귀 안에 철사처럼 가느다란 여자의 손모가지가 먼저 꽉 잡혀 버리고 만다. 화상, 그냥 한 대 얻어맞고 말지 그걸 또 회피하냐? 짜샤! 아무리 연약한 여자의 손바닥이라도 일단 싸대기로 맞으면 누구나 다 아픈 겨. 에그, 화상! 너 같은 겁돌이 자식이 무슨 무예 수련을 한다고. 이쒸! 너 죽을래? 쪼다! 죽이지도 못하면서 맨날 죽인대. 아아악! 이 새끼가악! 에게게! 병신 꼴갑까지? 으드드드드! 나 미쳐! 나 미쳐어! 병신! 미쳐라! 누가 말리냐! 허흐흐흐!
“이거 놔! 이거 못 놓니?”
“공주미씨, 제발 부탁입니다. 이제 제발 나 좀 놔 주세요."
“세상이 두 쪽 나도 절대 그럴 수 없어! 이거 못 놓니?”
고삐리의 두 팔 안에 폭 옥죄어진 채로 물고기처럼 마구 몸뚱이를 파들거리는 미의 여신.
“주미씨 제발!”
“안된다니까! 너가 그렇게 자꾸 고집을 피우면, 나도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있어!”
“뭘?”
“니 엄마한테 다 털어놓고 말 거야. 그동안의 우리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결혼 허락까지도 받아 낼 거야."
뜨어억!
“공주미! 너 미쳤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 안 미쳤어. 그리고 뭐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하고 나 하고는 이미 육체적으로도 깊이 맺어진 사이인데, 안 될 게 뭐야? 우리는 이미 실질적인 부부사이가 된 거라고.”
주미가 이렇게까지 악착스럽게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평소 주미의 성격을 감안 해 본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이긴 하지만. 아, 주미야. 네가 이토록이나 내게 애착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니? 하지만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일이여!
“우리 집, 내일 이사 가는 거 주미도 잘 알잖아. 그러니까 제발 이쯤해서 이성을 회복 해 줘. 나도 주미가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란 말이야. 주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주미와 나의 관계가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나면, 그 땐 우리 둘 다 더 이상 낯을 들고 살지 못하게 돼. 그 뒷감당을 대체 어쩌려고 그래? 그러면 이렇게 하자. 우리 완전히 헤어지는 게 아니라, 잠시만 떨어져 지내는 것으로. 아주 조금만. 그리고서 주미가 남편하고 정식으로 이혼을 하게 되면, 그 때 우리도 정식으로 합치는 거로. 그러면 법적으로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거잖아. 어때 괜찮지? 이 제안마저도 거절한다면, 나 정말로 주미를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거야?"
결국 항복을 하겠다는 말인데, 여자가 저렇게까지 나오는 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일단은 이렇게라도 꼼수를 부려 본 다음, 나중에 가서 다시 방법을 모색 해 보는 수밖에. 음, 이제야 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주미는 지금, 몸의 꿈틀거림도 멈춘 채,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힘차게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고 있는 중이다. 내 혀로 흘러넘치는 눈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잘 핥아 준 뒤, 종잇장처럼 가벼운 여체를 번쩍 안아 들고는 그녀의 집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발버둥질을 치고 있는 젖먹이의 곁에다가 여자의 몸뚱이를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다시 현관문 밖으로 터벅터벅 발길을 돌려 나온다.
“그 약속 절대 어기면 안 돼? 만일 그랬다가는 나 진짜로 입에 칼 물고 자기 엄마 앞에 서게 될 거야?”
뒤 꼭지로 갱엿처럼 매달려 온 주미의 마지막 그 말을 수도 없이 되새김질 해 가며 묵묵히 이삿짐을 꾸리고 있는데, 자정이 다 되어서야 마침내 엄니가 돌아오셨다. 엄니는 요즘 길거리 노점 한 자리를 차지하시고서 밤늦게까지 떡을 팔고 계신 것이다.
“다 팔았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어서 남은 건 그냥 다 떨이로 넘겨 버리고 들어왔어.”
“저녁은 드시고?"
“떡 집어 먹어서 배 안 고퍼. 너는 뭐 좀 먹었냐?”
“예."
“그람 어여 짐이나 싸자. 하여튼 고놈의 황소고집 때문에 내가 못산다니 께. 무슨 놈의 고집이 그리도 쇠심줄이여?"
“죄송해요 엄니, 앞으로 잘 할 게요. 엄니는 고생했으니까 이젠 좀 쉬세요. 내가 다 할 게요."
“시방 병 주고 약 주는 겨? 다 필요 없어. 그냥 같이 할 껴! 이깟 게 뭐가 힘들다고.”
심통이 나신 엄니와 함께 이삿짐을 꾸리면서도 역시 주미의 동태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이윽고 그녀의 법적인 남편이 귀가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요즘 들어 항상, 만취가 되어 들어온다는 그녀의 법적인 남편. 주미는 요즘 그런 법적인 남편 때문에 더욱 더 힘들다고 했었다. 원수 같은 법적인 남편은 그렇게 점점 술 따라지가 되어가고, 사랑하는 실제적인 남편은 이렇게 자신을 떠나가려 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더 마음이 괴로울 것인가. 미안해 내 사랑. 하지만, 한번은 꼭 겪어야 할 아픔이잖아. 아픔만큼 성숙해지는 법이라는 말도 있고 말이지. 딱! 파! 왠 마? 니가 영화배우냐? 왜 자꾸 간지러운 대사 씨부려 댄 마? 내 맘이단 마! 나는 뭐 간지러운 대사 좀 씨부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정해져 있냐 새꺄? 딱! 파!
일요일 아침, 외삼촌이 도착하고, 뒤를 이어 인철이 녀석까지도 줄을 대어 들이 닥쳤다. 오늘 이사를 도와주기로 한 일꾼들이다. 그렇게 나와 어머니, 외삼촌과 인철이 네 사람이 힘을 합쳐 이삿짐을 하나 둘씩, 아래층으로 들어 내렸다. 이삿짐이 단출하니 그다지 힘들건 없다.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주미의 집 거실 창문은 굳게 닫혀 져 있고, 가리개까지 완벽하게 둘러 쳐져 있다. 평소에 잘 볼 수 없던 장면이다. 그리고 집안으로부터는 아무런 기척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삿짐을 들어 내리고 있던 인철이 녀석이 마침내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게다 은밀히 속삭여온다.
“여자 어디 간 겨? 왜 안 나와 보는 겨?"
“안 나와 볼 겨.”
“왜?”
“진작 찢어졌으니 께.”
“뭐? 진작 찢어져? 언제? 왜?”
그 자식, 궁금한 것도 디게 많네. 하기야. 첫 눈에 홀딱 넘어 가 버렸으니 어련하겠지만 서도.
“싫증이지 뭐!”
“싫증? 저렇게 예쁜 여자한테 벌써 싫증?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단 말이여? 너 지금 미친 거 아녀?”
이 자식이 왜 자꾸 남의 속을 뒤집는 겨? 뒤집길?
“다 그런 거연 마. 아무리 예쁜 계집, 잘생긴 사내라도 몇 번 육체관계를 갖다보면 싫증이 날 수도 있는 거여.”
“그거 참 요상하네. 나는 저런 여자라면, 평생 업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꼴깍!”
인철이 녀석이 한 없이 아쉬운 표정으로 연신 침을 꼴깍거려대는 와중에 엄니가 작은 이불 보따리 한 개를 들고 내려오시다 말고는 뿌루퉁 한 소리를 내신다.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이란......"
엄니가 지금 언급하고 계신 요즘 젊은 것들이란 당연히 주미와 그녀의 법적인 남편을 의미한다. 아무리 그래도 엄니 같이 시골에서 성장기를 보내신 어르신들의 생각으로는 이웃 간에 소 닭 보듯이 지내는 도시민들의 요즘 행태가 좀 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뭐."
주미의 입장을 고려해서 대신 그렇게 변명을 해 보지만,
“없긴 왜 없어. 있는 거 다 아는 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웃 간에 저러면 못 쓰는 벱이여. 이사 가는 것 뻔히 알면서도 어찌 저러고 앉아 있을 수가 있댜? 끌끌끌!"
급기야 혀까지 차고 마시는 엄니.
우리 엄니가 저러셔도 절대 나오면 안 돼 주미야. 그냥 나오지 말고 꼭꼭 숨어 있어야 혀. 그리고 미안 해. 이젠 정말 안녕이다. 너와 함께 했던 황홀했던 그 모든 순간들, 기막힌 경험이었다. 우리의 즐거웠던 모든 기억들일랑 이제는 훨훨 저 허공중으로 날려 버리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영원히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 안녕 내 사랑! 딱! 파!
근디 와 이리 찜찜한 겨? 그래, 바로 그거여. 저 여자가 이사 간 집까지 찐드기처럼 따라붙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감, 바로 그 것 때문이지. 가능성 거의 백 할이라고 봐도 무방할 겨. 절대로 안 찾아 올 리가 없지. 그리고 내게 완전히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은 그 순간, 실제로 엄니한테 우리 관계를 털어놓고 말 겨. 아니, 입에 칼 물고 죽겠다고 난리를 칠지도 몰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니께. 진짜로 그러면 어쩐댜? 이거 정말 미치갔구만! 인철이 녀석한테 양보 해 버리자고 해도, 저런 정도 녀석 가지고는 성에 찰리도 없을 것이고. 에고 골치야. 그래, 일단 이사부터 끝내 놓고, 그 때 가서 더 궁리를 해 보자. 반드시 좋은 수가 있을 겨!
손수레에 짐을 싣고 몇 차례 더 양쪽 집을 오간 끝에 드디어 마지막 짐을 때려 싣고 영원히 이 집을 떠나갈 찰나가 되었다. 고맙게도 주미와 그녀의 법적인 남편은 아직까지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기특한 것들! 다행한 일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또 서운하기도 한 이 감정은 뭐냐? 아니여! 미련을 가지면 절대로 안 되는 겨! 이건 정말로 섭섭해 할 일이 아닌 것이여! 그리고 이렇게 한번 떠버리고 난 후에는 두 번 다시 이 집과 이 동네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겨! 딱! 파!
이삿짐을 새 전셋집으로 모두 옮기자마자, 외삼촌과 인철이 녀석은 각자 볼 일들이 있다며 곧바로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의외였다. 맛있는 짜장면을 시켜 준다는 것도 마다하다니. 그 바람에 짜장면 두 그릇 값은 굳었지만. 그 바람에 밤늦게까지 어머니와 단 둘이서 이삿짐 정리를 계속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장사를 하루 쉬고서, 집안 정리를 마저 완전히 끝내놓겠다고 하시는 엄니를 홀로 남겨 두고는 시내버스 정류장 쪽으로 등교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사 때문에 꽤나 피곤했던지 평소보다 눈이 늦게 떠지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자전거 등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두커니 시내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횡단보도 저 건너편으로부터 이 쪽 편을 향하여 또각또각 도로를 건너오고 있는 한 성장(盛裝) 여인이 눈에 뜨였다.
허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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