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7. 15:11ㆍ허세창장편소설
11
승주, 다시 가을의 오후입니다.
그리고 내 침울한, 아니 많이도 퇴색된 듯한 슬픈 영혼은
고요한 빛으로 이렇게 말없이 흔들립니다.
승주, 이 가을은 해 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또 다시 이렇게 허무한 낙엽들만이 날리어 가고......
승주,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창 문 밖, 먼 저곳 희미한 회색 빛 그리움들을
묵묵히 지켜봅니다.
승주, 지금 보고 있나요.
흔들리는 저 나무 잎새들 사이로 멀어져간
어느 이름 모를 낯선 여인의 가냘픈 저 뒷모습을......
승주, 지금, 느껴지나요.
어떤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흔적도 없이 다가 온
핏빛 낙엽 가을 그 향기의 간절한 의미를......
승주, 이제 창 밖 회색빛 도시 저 어두운 하늘위로
몇 개의 별빛들만이 가을 서늘한 바람으로
말없이 흔들리는데......
승주, 이제 나 역시도 이렇게 저 흔들리는 별빛들처럼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초라한 가을빛으로
처절히 흔들리는데......
(스무 살 승주에 미쳐있던 열네 살 수창의 여러 넋두리 중)
저 여자가 지금 이 시각에 왜 이 곳에? 아기는 어쩌고? 그리고 남편은? 정말,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다. 더군다나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뭇 사내들의 집중적인 시선 세례를 한 몸으로 받아내며 어느새 내 가까이까지 다가 온 애기 엄마. 그나저나 어쩌면 저리도 사람이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을까? 이런 곳에서 이렇게 보니, 다른 여자들하고도 비교가 되서 그런지 더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이건 정말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따로 없군. 그나저나 내가 이런 특별한 여자의 육체를 감히 취해 가졌던 것이 참말이기나 한 것일까? 혹시 그동안 백일몽(白日夢)을 꾸어왔던 것은 아닐까? 서포 김만중의 거 뭐시냐. 갑자기 제목이 안 떠오르네. 그래 구운몽, 느닷없이 그 소설이 생각 날 정도로 마음이 몹시 아리까리해 지는 기분이다. 에휴!
“허수창!”
역시 구운몽은 아니었던가. 여자의 입에서 분명히 내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말이지. 하지만, 무조건 외면을 해야 혀. 냉정해져야만 하는 겨. 어제 경솔하게도 그런 말을 덥석 던져 주긴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서면 안 되는 겨. 설사 네가 칼을 물고 우리 엄니 앞에서 나체 춤을 추어 댄다고 해도 절대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되는 겨. 주희를 위해서, 그리고 주미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끝내 대답을 하지 않고 외면을 해 버리자, 마침내 그 고운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색의 여신. 하, 저런 모습조차 어찌 저리도 매혹적일까. 어떻게 저렇게 원망하는 표정조차 환장하도록 아름다울 수가 있는 거냐. 내가 미친다니까 정말! 그래도 무조건 외면을 해야 하는 겨. 냉정을 잃지 말아야 혀. 어차피 너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기서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되는 일이여. 주미야, 제발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하고서 한번 만 물러나 주면 안 되겠니? 왜 자꾸 이렇게 전(前) 정부(情夫)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거니. 그나저나 뭇 사내들의 저 뜨거운 추파는 대체 어쩔 거여. 뭇 여자들의 저 시기에 찬 시선은 또 어떻고. 이러다 우리 주미 고운 얼굴 구멍 나 버리겠네. 어떻게 된 게 국민 학교 남학생 녀석들까지도 애 키우는 아줌마한테서 저렇게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냐. 하여튼, 나긴 난 여자라니까. 트로이의 파리스 녀석에게 납치당한 그리스 헬레네인들 저 여자보다 더 할 쏜가. 수십 년 면벽 수도 고승 녀석을 하루 밤 사이에 파계 시켜버린 황진이의 미색인들 저 보다 더 하리오, 또라이 연산 녀석을 질정 없이 휘어잡은 장녹수의 미색인들 저 보다 더 하리오. 또라이 숙종 녀석을 거침없이 잡아 채 버린 장희빈의 미색인들 저 여자 보다 더 하리오. 몽룡이 녀석을 훽 뒤집어지게 만든 춘향이의 그것인들 저것보다 더 할쏜가. 더군다나 저런 극강의 미녀를 쉽게 자신의 깔치로 만들어 버린 나란 녀석은 또 뭐란 말이냐? 아니, 잠깐 극강의 미녀들 중 하나라고 토씨를 정정 해 주어야 하겠네. 왜? 그야, 우리 승주 누나 역시도 당연히 동서고금 극강의 미녀 중 하나가 분명하니까. 아니다. 승주 누나는 따로 제외 시켜 놓아야 한다. 아무리 주미라도 승주에는 감히 필적하지 못하니까. 딱! 파! 또 우리 주희 친구 역시도 절대로 그에 뒤지지 않으니까. 화상! 대충 좀 해라. 니 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노골적이잖냐. 이 자식은 뻑 하면 시비야. 야, 이 자식아, 부정할 수 없으면 없는 것이지, 뭐가 또 그렇게 노골적이란 말이여? 너는 나한테 시비를 못 걸면 잠이 안 오는 녀석이지? 그렇지? 어떻게 알았냐? 띠요옹! 여기서 잠깐, 내가 위에서 파리스 녀석, 고승 녀석, 연산 녀석, 숙종 녀석, 몽룡 녀석 운운하며 지나가는 똥개 부르듯 한 것에 대하여 경기를 일으키는 독자가 분명히 있을 줄 믿는다. 유부녀나 따 먹는 고삐리 카사노바 주제에 저는 뭐 잘 났다고, 감히 하늘같이 지위가 높았던 사람들을 함부로 그렇게 모욕할 수 있느냐 하는 뭐......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이 제 아무리 나름대로 지위가 높았다고 할지언정, 내가 보기에는 나나 그들이나 도친 게 메친 게에 불과할 뿐이니까. 어차피 깔치에 환장하기로는 그들이나 나나 다를 것이 뭐냔 말이지. 내 말 틀렸어? 그리고 말이야. 저 귀족이니, 땡중이니, 왕이니, 양반이니 하는 족속들은 오로지 지들만 잘 먹고 잘 살줄 알았지 도대체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 해 준 게 뭐가 있냐 이 말이여. 지들은 호의호식 하며 맛있는 음식, 예쁜 깔치 마음대로 따 먹어가며 온갖 호사를 다 누릴 때, 일반 백성들은 피죽도 못 끓여 먹고 굶기를 밥 먹듯이 해 가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그런 세월을 보내지 않았느냐 이 말이여. 물론, 몽룡이가 그랬다는 야그는 아니고. 그 자식 모처럼 바른 소리 한번 하네. 딱! 파! 이쒸! 잘못했다고도 딱! 잘했다고도 딱! 이 새끼 너 도대체 딱! 의 기준이 뭐여? 잉? 내 마음이다 왜? 꼽냐? 어이구 이걸 그냥!
“자기야, 나 자기가 어제 한 말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 마지못해 한 소리란 거 다 알어. 그런 것도 눈치 못 챌 만큼 어리석은 여자 아니야. 하지만, 자기가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어. 나는 한다면 하는 여자야. 설사 자기가 빈말로 한 소리라고 해도 약속을 어기는 그 순간, 곧바로 자기 엄마한테 달려가 모든 사실을 다 털어 놓고 말 테니까. 그리고 결혼허락도 받아 낼 거야. 이거 절대 빈말 아니야.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 시켜 주기 위해서 이렇게 서둘러서 온 거야.”
“......”
주미의 속삭임이 무섭다. 대학물을 먹은 여자가. 거기다 음악을 전공했다는 여자가. 하지만 주미야, 나는 너의 그런 귀여운 협박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 또 너를 돌아보는 순간, 또다시 마음이 흔들릴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결코 네 사랑스러운 얼굴도 돌아보지 않을 거야. 미안 해 주미야! 네가 그렇게 발버둥을 쳐대도 다 소용없는 일이야. 이미 물 건너간 일이라니까.
시내버스가 와서 앞에 섰지만,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만원이었다. 이 또한, 굳이 내가 자전거 통학을 고집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원버스. 정말 내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다. 사람이 짐짝 취급을 당해야만 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정말 혐오스럽다. 하물며 그런데, 오늘은 이거 짐짝 취급은 둘째 문제고, 안내양이 버스의 발판 끝에다가 자신의 한쪽 발을 간신히 걸려 놓은 채로 힘차게 ‘오라이’ 소리를 연발하고 있는지라, 아예 승차조차도 못 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지고 있다. 이 버스를 놓치면 십여 분 가까이를 또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확실하게 지각을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그 비싼 택시를 탈수도 없는 일이고. 그럴 돈도 없다. 사실, 지각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교문 앞에서, 퉁방울 눈을 굴려대고 있는, 아니 노골적으로 그 짓거리(?)를 일삼고 있는 그 변태 인간 때문이다. 일초도 알짤 없다. 단 일초라도 늦게 학교 정문의 금을 넘어서게 되면, 당장에 그 변태 또라이한테 귓불을 잡힌 채로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는 속절없이 그 짓거리를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변태한테 똘똘이 녀석을 떡처럼 주물린다고 해서 아무나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생오라비처럼 면상 반반하고, 허우대 멀쩡한 녀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바로 나 같은 녀석들 말이지. 그 이외에는 무조건 엎드려뻗쳐 자세 아니면, 원산폭격(대가리를 땅에 박은 채, 손은 뒷짐을 지고 있어야 하는 벌. 재수 없게 대가리 사이에 왕모래 알갱이라도 끼어들게 되면, 그 아픔은 더 배가가 된다.)을 당해야만 한다. 나 역시도 저번에 딱 한번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 변태한테 끌려 가 속절없이 똘똘이 녀석을 떡처럼 주물림 당해야 했던 적이 있는데, 이놈의 똘똘이 녀석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서 순식간에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하게 경직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그 변태의 눈깔이 크게 뒤집어진 일까지 있었다, 변태 왈, 태어나서 지금까지 네 물건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녀석은 난생 처음이래나 뭐래나. 그러고는 밤에 자기 집으로 슬쩍 놀러오라는 객소리까지 덧붙이기에, 이건 뭐 꼰대고 뭐고 그 자리에서 그냥 반쯤 밟아 놓을까 하다가 아무리 추접스러운 인간이라도 엄연히 꼰대는 꼰대이기에 간신히 겨우 화를 눌러 참을 수가 있었다. 물론, 지금 생각 해 보면 그 때 참은 게 잘 한 일이었다. 만일, 진짜로 밟아 버렸다면 나는 그 때 분명히 퇴학처분까지 각오해야 했으리라. 변태가 분명히 학교 이사장 하고 사돈에 팔촌 관계라는 사실을 어디서 우연히 주워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무조건 내가 불리한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허수창이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추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었음. 따라서 일부 변태 성향을 지닌 학교 교사들이 잘못한 학생들을 교탁 앞으로 불러내서는 학생들 보는 앞에서 벌칙으로 불알을 마구 주물러대도 누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시절이었음. 물론, 당하는 당사자는 수치스럽고 찝찝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글쓴이 주)
사실, 그 날 지각한 이유 역시도 주미 때문이었다. 자다 말고, 새벽 세시에 일어나 그 통로 사각지점에서 또 그 짓거리를 벌였던 것이다. 내 엄니와 그녀의 법적인 남편 녀석 모두 누가 떠 메가도 모를 정도로 곤하게 수면을 취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말이지.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아슬아슬하게 훔쳐 먹는 떡이 오히려 더 꿀맛 같다는...... 딱! 파!
애기 엄마가 갑자기 내 등짝에다 자신의 불룩한 가슴팍과 하초 오목 부위를 강하게 밀착 시켜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 여자가 지금 미쳤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오로지 자기의 동태만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건 뭐 이판사판 공사판이 따로 없군. 그렇지, 이러면 되겠구나. 흐흐!
“누나! 나는 이 차 타고 가면 되니까, 어서 매형한테나 가보라니까! 매형 아침 밥 챙겨 줘야지?”
“......”
애기 엄마가 미처 대꾸할 말을 못 찾고 약간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내 앞에서 버티고 있던 안내양의 탄탄한 사과 두 쪽을 힘 있게 밀쳐 올리고는 슬슬 출발 해 가던 만원버스의 입구 발판 끝 가장자리에다가 간신히 한쪽 발끝을 걸쳐 놓을 수 있었다. 굳어진 주미의 모습이 개미처럼 멀어져 가고, 자신의 사과 두 쪽을 어린 고삐리 녀석의 손바닥 안에다 느닷없이 내어 주고 만 안내양은 벌겋게 변한 얼굴로 어린 학생 녀석의 면상만 찌를 듯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소리를 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제 코 앞에 마주 닿아 있는 고삐리 녀석의 면상 떼기가 제법 많이도 반반 해 보인 탓이었으리라. 사내든 계집이든 반반한 면상 떼기를 보유한 족속들은 이럴 때 편리해서 참 좋다. 크게 경을 쳐야 될 상황에서도 이처럼 두루뭉술 위기를 넘길 수가 있으니 말이지. 이 험난한 세파 속에서 참으로 유용한 무기가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예쁜 여자는 용서가 되도, 안 생긴 여자는 절대 용서가 안 된다는 말. 하지만, 이 안내양 아가씨는 젊다는 것 하나 빼 놓고는 용서가 될 만한 거리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미안 하오 안내양 누님. 본의 아니게 당신 화장실에 손을 대서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끝나면, 회사 내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채로 삥땅 검사까지 받아야 한다던데, 나도 모르게 그만 일이 급해서 이렇게 된 거요. 결코 그대의 엉덩이가 탐이 나서 그랬던 것은 아니란 말이오.
(허수창이 살던 그 시절엔 시내버스에도 안내양 제도가 있었는데, 실제로 안내양들이 하루 일과가 끝나면, 회사 관리직 직원들에 의하여 강제로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삥땅 검사를 받는 일도 많았다고 함.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 자주 문제가 되는 일이 많았음 - 글쓴이 주) 그만 좀 째려보라니까 이 여자야. 나 당신 꼬실 마음 절대 없어. 아닌 게 아니라,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 멀어질 때 까지도 안내양의 타는 듯한 눈길은 집요하게 내 머리 꼭지 뒤로 끈적끈적하게 매달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나란 녀석이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수업시간 내내 주미에 대한 우려 때문에 마음이 찜찜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혹시, 진짜로 입에 칼을 물고서 엄니 앞에서 나체 춤이라도 추어 보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혹시, 우리의 엽색 행각을 죄다 폭로하고, 결혼 허락까지 받아내려 엄니한테 강짜를 부려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더군다나 오늘은 하필 엄니가 하루 종일 집에 머물러 계신 날이기도 하지 않는가.
방과 후까지 찜찜한 기분을 종내 털어버리지 못하고서, 어린이 놀이터에서 주희와 다시 정기적인(?) 상봉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거의 매일 상봉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주희의 얼굴 표정이 평소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무슨 일일까. 혹시, 주미가 벌써 얘한테까지도 모든 사실을 다 까발린 거 아닐까? 아닐 겨. 그럴 리가 없을 겨. 아무리 철딱서니 없는 아줌마기로서니, 설마 그렇게까지......
“왜 그래? 얼굴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조심스레 물어 보았지만, 주희의 얼굴 표정은 오히려 더 싸늘하기만 하다.
“도대체 왜 그래? 집에 무슨 일 있어?"
순간,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주희의 외침!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깜짝! 정말로 주미에게서 무슨 말인가를 들은 것일까? 아, 이를 어쩔 겨? 결국 이대로 파국이란 말이여? 안 된다 주희야. 나는 절대로 놓아 줄 수 없다. 너 같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이대로 놓쳐버릴 수가 있을 겨? 너 때문에, 오로지 너 하나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는 그 여자를 눈물을 머금고 걷어 차 버리기까지 한 나인데.
“어제, 우리 집으로 주미 언니 전화가 왔었어."
허걱! 정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사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 실낱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애기 엄마가 그냥 안부 전화만 했던 것인지도. 제발 그래주었기를...... 천지신명이시여 이 불쌍하고 가련한 중생을 보살펴 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멘! 딱! 파!
“그랬니?"
설사 그렇다 해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와 몸가짐은 유지해 주어야 하기에. 딱! 파!
“수창이 너, 주미 언니가 그러는데."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빨리 까발려 줘 주희야. 나 괜찮아. 나 니 사촌 언니하고 엽색
행각 벌인 거 맞어. 그게 뭐 어쨌다고? 너 같으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서 그냥 참고만
있을 수 있어? 있어? 딱! 파!
“뭘? 그 누나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그랬는데?"
빨리 말 하라니까 야가 왜 이리 뜸을 들이는 겨?
“주미 언니가......"
그래 니 언니가 뭐라고 그랬는 디 그러는 겨? 답답해 미치겄다 야!
“너 절대 상종해서는 안 되는 학생이라고 그러더라. 학교에서도 공부는 안 하고 그냥 놀기만 하는 학생이래. 허구 헌 날 껄렁한 애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는 그런 행실 안 좋은......"
흐흐흐! 허허허! 컬컬컬!
고마워 주미야. 정말 고마워. 나를 상종해서는 안 되는 학생이라고 한 것도 좋고,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하는 학생이라고 한 것도 좋고, 행실 안 좋은 애라고 한 것도 다 좋고. 무조건 다 좋아. 딱! 파!
“뭐? 상종해서는 안 되는 애? 놀기만 하는 애? 행실이 안 좋은 애?"
그래도 시치미는 적당히 떼 주어야 하니까. 딱! 파!
“정말 이해 할 수가 없어!"
“뭐가?"
“주미 언니하고 너 사이 말이야. 주미 언니가 왜 그렇게 너한테 관심을 갖고 있는 거지?"
천지신명님, 하늘님, 단군님, 산신령님, 모두모두 고맙습니다요. 확실히 드러났네요. 주미가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의리를 져 버리지 않은 그 사실 말입죠. 딱! 파!
“주희 너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니? 너 지금 나 의심 하는 거야? 내가 뭐 니 언니하고 사 사귀기라도 한다는 거니 뭐니?”
에그, 말까지 더듬거려질 건 또 뭐냐. 딱! 파!
“그거야 모르지. 나 모르게 어쩌면 너희 둘이...... 사실, 주미 언니가 니 행실이 어떻고 저떻고 입방아를 찧어댄 거 자체가 문제는 아니야. 나도 그 언니 말을 완전히 신용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 언니가 왜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까지 내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그 언니가 애당초 너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그런 전화를 해 줄 리도 없는 거잖아. 너 하고 나 사이가 더 가까워지는 것을 미리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거란 생각이 들어 난.”
“너 지금 3류 소설 쓰고 있냐? 3류 소설 작가가 되기로 작심 했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을?”
“아니, 이건 말 될 수도 있는 이야기야. 그래, 그만두자. 너가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을 해도 지금 당장 진실을 확인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주희야, 제발 그러지 마. 내가 뭐가 아쉬워서 애까지 딸린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말이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해? 더군다나 너처럼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두고서?”
“그건 그 유부녀가 옥떨메처럼 못생겼을 때 얘기고. 우리 주미 언니, 한마디로 매력적인 여자야. 여자인 내가 봐도 그래. 너 같이 동생뻘 되는 남자애들도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그렇게. 결정적인 건 세상 모든 남자가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거지.”
똑똑하다. 그리고 사리판단이 아주 정확하다. 무서워......
“주희 너 자꾸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꾸 할래? 그러면 나 화낸다.”
“그래, 그만두자.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겠니.”
“주희야!”
그나저나 여자의 직감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인가? 어떤 심리학자는 여자의 직감 그거 다 돌팔이들이 꾸며낸 낭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남자나 여자나 다 도친 게 메친 게라는 말을 뇌까린 바 있는데, 내 생각은 그 사이비 심리학자와 전혀 다르다. 여자의 직감은 정말 무섭다. 주미와 사귀면서 절실히 느낀 바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여. 여자의 직감, 하나도 틀리지 않다니까. 지금 주희 이 아이만 봐도 짐작이 가지 않는가. 정확히 정곡을 찌르고 있지 않냐 이 말이여.
좀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는 작은 애기에게 영화나 시 이야기, 그리고 음악이나 미술 분야 같은 고상한 이야기, 또 세상에 떠돌고 있는 우스개 소리들까지 있는 대로 다 끌어다 대며, 관심을 돌려보려 필사적인 애를 써 보았지만, 헤어질 때 까지도 종내 떨떠름한 표정을 풀지 않고 있는 작은 애기. 그래서 몇 푼 남아있던 용돈마저 깡그리 다 털어가며 온갖 아부 다 떨어대고, 또 싫다고 하는 그녀를 억지로 택시까지 태워 집으로 보내주는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에그, 카사노바고 뭐고 여자 관리하기가 이리도 힘이 든다. 딱! 파! 저녁식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부족한 수면부터 먼저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이럴 때 딱 경공술이 필요한데 말이여. 정말 아쉽네. 하루빨리 호정무를 완벽하게 완성하여 경공술과 이기어검술까지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천하제일고수가 되어 보리라. 딱! 파! 왜 임마? 화상이 말이야 헛소리도 엔간히 해요. 헛소리 아녀 임마! 아니긴 뭐가 아녀 임마!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고, 칼이 어떻게 저 혼자서 휙휙 허공을 휘젓고 다녀? 그거 다 무협지 쓰는 인간들이 밥벌이 하느라고 구라 쳐 놓은 거라는 거 알어 몰러? 아니라니까 짜샤! 으이그 등신! 자꾸 등신 등신 하지만 마! 너 정말로 내가 경공술과 이기어검술을 완성하면 어떡할래? 나한테 뭐 해 줄 겨? 그럴 일 죽어도 없을 테니께 안심해라. 그러니깐 마 뭐 해 줄 거냐고? 밑져야 본전이잖아. 음, 그렇다면, 니가 정말로 경공술과 이기어검술을 완성한다면, 잠자고 있는 혜은이를 고이 안아다가 니 잠자리 옆에 눕혀 주지. 뜨억! 정말로? 딱! 파! 에라이 화상아! 후다닥! 짜샤야! 너 거기 안서!
저기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자전거포 이층집이 바로 어제 우리가 이사 온 그 집이다. 자전거포 주인이 바로 집주인이기도 하고. 가만, 그런데 저기 저게 뭐여? 으슥한 곳 담벼락 위로 길게 비치고 있는 저 어두운 그림자? 포대기에다 아기를 감싸 업고 있는 모습이 꼭 애 엄마 형상 같은 디? 가만! 혹시 집 주인 사내가 제 마누라 몰래 숨겨 놓은 거 뭐시냐? 그래 애첩 아닐까? 애까지 불쑥 내 지르게 해 놓고, 배은망덕하게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그런. 그래서 열불이 나서 애를 들쳐 업고 막 따지러 온? 왜 3류 잡지 연재소설 속에서 많이 등장 하는 그런 상황 있잖어. 딱! 파! 화상! 공부는 안 하고 3류 연애 소설 너무 많이 쳐 봤다. 두 눈 크게 뜨고 잘 봐라. 어떻게 저 여자가 집 주인 사내가 몰래 숨겨 놓은 애첩이 될 수가 있는지. 엥? 그게 아녀? 그럼 뭐여? 엥! 저거 어디서 많이 봤던 물건인 디?
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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