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잎새의떨림12

2025. 1. 28. 10:30허세창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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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이 가을에 어떤 생각을 해 봅니다.

내 옛 친구와 연인......

그리고 좋은 사람들.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할게요.

그 때는 어렸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혼자서 조용히 숲길을 걸어봅니다.

찬란한 햇살, 우뚝 선 나무......

그리고 예쁜 가을꽃.

그들을 이렇게 다정히 어루만져요.

그 때는 어렸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요.

 

가을비 차갑게 포도 위에 내리던 날,

물 묻은 나뭇잎은 바람 따라 흩어지고,

내 가을 빛 그리움도 그렇게 찬란히 부서져가요.

이 가을에......

행복했었던 그 기억으로요.

그 때는 어렸었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니까요.

(스무 살 승주에 미쳐있던 열네 살 수창의 여러 넋두리 중)

 

애기 엄마를 피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갈등이 생긴다. 정말 어떤 의미로 주미의 저런 행동 방식을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나를 죽도록 사랑해서일까? 나 역시 아직까지도 주미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주미 같이 저런 강한 집착을 보여 줄 자신이 없다. 주미, 나에 비하여 대단히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여자, 뇌쇄적인 미모, 귀여운 아기, 성질은 더럽지만, 다시 학원 강사 노릇 충실히 하면서 돈 잘 벌어다 주는 법적인 남편. 그런데도 주미는 지금 저렇게 오로지 내게만 목을 매달고 있다. 정말, 나와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인가? 진정으로 남편과 이혼하고 나와 함께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식의 강한 집착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어디가 그토록 마음에 든다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땡전 한 푼 없는 고삐리에 불과하고, 정말 부족한 것이 많은 인간인데. 그래, 니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을 것이다. 정면 돌파가 오히려 나을 테지. 괴롭긴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확실히 너에게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주지시켜 주겠어. 너 역시도 그래야 하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화상, 너무 진지하니까 내가 다 어색하다. 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냐? 그렇다면, 내가 그 정답을 알려주지. 그것은 바로 네 녀석 물건 때문이여. 다른 이유는 없어. 네 녀석 물건이 가진 그 무지막지하고도 씬 능력 때문이여. 이 새끼가 정말! 우리의 숭고하고도 순결한 사랑을 그런 식으로 비하를 해?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다. 너 오늘 죽었어! 퍽!퍽!퍽! 에구! 에구! 동네 사람들아아! 물건 씬 놈한티 짜샤 맞아 죽어유! 화상아, 물건 씨다고 한 것은 비하가 아니라 칭찬이여 칭찬! 이 새끼가 그래도 퍽!퍽!퍽! 에구! 에구! 살아있는 생명체의 자연스런 생식 행위, 다시 말해서 성행위야말로 자연이 생명체에게 베푼 가장 거룩하고도 숭고한 선물이란 말이여 이 무식한 눔아! 퍽! 퍽! 퍽! 에구구! 꼬르륵!

“공주미씨.......”

새로 바뀐 주미의 짧은 바람머리가 승주만큼이나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먼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어 본다. 저 여자 혹시 내가 승주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거 눈치 챈 거 아녀? 그래서 승주 머리를 자기도 따라 해 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주미는 아무 대꾸도 없이 하염없이 애처로워 보이는 눈길로 가만히 내 모습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아, 주미야! 너 도대체 왜 그러니? 나를 말려 죽일 작정인 겨?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너를 꽉 부둥켜안고 모든 것을 취소할게 라고 잘못을 빌고 싶구나. 하지만 견뎌야 하느니. 너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꾹꾹 입을 앙 다물어야 하리. 주미야,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그 말뜻을 왜 너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니? 이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곱고, 깨물어 먹고 싶은 여자야.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 왜 주미 같이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 나 같이 행실 안 좋고, 놀기만 좋아하고, 불량 학생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는 놈팽이 따위에게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인지."

“주희가 그러든?”

그제야 비로소 굳게 닫혀있던 입이 열리는 주미.

“그래. 주희한테 그랬다면서?"

“그랬어. 그게 어때서? 내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자기 역시 잘 알고 있잖아. 자기를 꽉 붙들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계속 몽니를 부려야 한다. 너를 떼어놓기 위해서라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자꾸 갖다 부치면서.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단 말이여 이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곱고, 깨물어 먹고 싶은 여자야.

“아무리 그래도 그게 뭐야. 나 정말 주희에게 그 말 듣는 순간, 너무 기분 더럽고, 주미 자체도 완전히 싫어지고 말았어. 그러니 제발 이젠 우리 이쯤에서 끝내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

“어설픈 연기 하지 마. 나는 다 알고 있어. 자기가 아직도 죽을 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 역시도 그렇고.”

미치갔구만.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그래, 이렇게 해 보자.

“그래. 나 아직도 주미를 죽을 만큼 사랑하고 있어. 그래서 더욱 더 우리는 헤어져야 해. 주미, 사랑은 희생이라고 생각해.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희생 할 줄도 알아야 해.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주미의 행복을 빌기 때문에 주미와 이렇게 헤어지겠다는 거야. 왜 이런 내 심정을 몰라주는 거야?”

“주희 때문이 아니고?”

“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주미에게 더 이상 어떻게 몽니를 부려댈 수 있단 말인가? 주미의 말 대로 주희 때문인 것이 엄연한 사실일진데.

“그만 울어. 예쁜 눈 다 부르트겠다."

이대로 항복을 해야 하는 겨? 그냥 이대로 모든 결심을 취소 해 버려야 하는 겨? 사랑하는 여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이나 내가 이 여인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반증이겠지. 일단, 손수건을 꺼내들고는 흘러내리는 여인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내 준다. 마음 같아서는 눈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죄다 홀짝홀짝 받아 마셔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주희. 그래, 주희를 생각해야 한다! 주희가 이런 모습을 보면 그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 것인가. 지금도 저렇게 의심을 하고 있는데. 어쩌면 정말로 두 번 다시 나를 보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아니, 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주미를 떼어 버리고 주희에게만 집중을 해야 한다. 미치갔네 증말! 무슨 묘안이 없을까? 그냥 최대한 조심하면서 양다리를 걸쳐? 아니, 세 다리를 걸쳐? 승주도 있으니까? 물론, 승주는 아직까지 바보상자 속의 연인에 불과하지. 나는 그녀를 아는데, 그녀는 아직 나를 모르고 있지.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내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버릴 겨. 허수창 너 아니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거야 소리가 그 앙증맞은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게 말이여. 기다려다오 혜은이! 아니 김승주! 수창은 모르실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뒤돌아보아 주세요. 수창의 사랑은 나요. 수창만을 사랑해! 수창만을 사랑해! 정말! 정말! 사랑해! 진짜 진짜 좋아해! 수창을! 수창을! 사랑해! 라고 날마다 노래를 부르게 만들 겨! 아! 승주! 승주! 오, 내 사랑!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승주씨! 딱! 파! 정신 차리고 화상! 지금은 공주미와 함께 하는 시간. 그러냐? 푸르르르! 아무튼, 주희와의 사랑을 지켜가기 위해서라면, 주미뿐만 아니라 승주까지도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려야 하는데. 그래야 남들한테도 떳떳해질 수가 있는 데. 푸르르르! 아니여! 아니여! 주미를 사랑하고 있는데, 승주를 사랑하고 있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 겨? 아흐흐! 미치갔네. 어쩌면 좋냐? 딱! 파! 정신 차리고 화상! 이 새끼가 정말 남은 정신 헷갈려 죽겠는데 왜 자꾸 호박 통을 두들겨대고 지랄이여 지랄이? 어쭈! 개기냐? 더 맞아 볼래? 따다닥! 파바파!

“무슨 여자가 이렇게도 눈물이 많니?"

아닌 게 아니라 주미의 눈에서는 지금 폭포수 같은 눈물이 마구 흘러넘치고 있다. 아, 저 눈물을 죄다 받아 마셔주고 싶네. 진정으로. 눈물이 저렇게 많은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악한 여자는 아닌 듯싶고. 아니, 악하기는커녕 너무도 마음이 여린 듯도 싶고.

“안되겠어. 일단 다른 데로 옮겨서 얘기 해. 이러다가 우리 엄마한테 들킬 것 같다.”

그렇다. 이층 마당의 난간 쪽에 느닷없이 엄니의 얼굴이 불쑥 내밀어지기라도 하면? 그땐? 하기야, 임기응변을 발휘해서 이사 가시는 것도 못 봐서 죄송한 마음에 이렇게 아줌마가 인사차 들렸다고 하네요 라고 둘러 부쳐도 되긴 하겄네. 아무튼, 애기를 업고 있던 주미의 몸뚱이를 그대로 번쩍 들어 안고는 급히 한길 가로 나가서 마침 시 외곽 쪽에서 총알같이 달려오던 빈 택시 안으로 짐짝처럼 우겨 넣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이미 눈물을 그친 애기 엄마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침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온다. 약간은 짓굳은 표정까지 띠운 채로. 이럴 때는 누나가 아니라 꼭 개구쟁이 아가 같다. 귀엽게 칭얼거리는 개구쟁이 아가. 하기야, 네가 아무리 내게 누나뻘이기는 해도, 내게는 단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가에 불과할 뿐인 것을. 내 귀여운 아가가 안고 있는 아가의 아가는 여전히 귀여운 그녀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제 엄마가 저렇게 오두방정을 떨어대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을까? 하기야 제 엄마가 거실 바닥에서 온 몸을 비틀어 가며 엄청 난 교성을 내질러 대도 새근새근 잠만 잘 자는 녀석이니. 아무튼 대견한 녀석이여!

“그냥 아무 곳이나......”

그렇다. 지금 우리가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아무 곳이나 가고 있을 뿐이다. 오로지 엄니의 눈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나야 함으로. 진작부터 우리 관계를 수상쩍은 눈으로 후사경 속에서 힐끗거리고 있던 중년의 택시 기사에게 중앙로의 음악다방 거리에서 세워 달라고 주문했다. 요금은? 물론, 애기 엄마가 지불했다. 사나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용돈마저 죄다 주희를 달래 주느라고 써 버리고 말았으니 말이여. 어쨌거나 분위기 좋은 음악다방이라도 들어가 앉아서 애기 엄마를 다시 한 번 더 설득 해 보기로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자꾸만 우리를 힐끗거린다. 하기야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애 엄마와 교복 차림의 학생 녀석이 함께 길을 걷고 있는 모습 자체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닐 터. 아니, 더러 볼 수 있는 장면이기는 할 터.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애 엄마의 얼굴 가죽이 거리가 다 밝아 질 정도로 확 눈에 뜨인다는 사실이다. 고삐리 녀석의 그것 역시도 예사롭지가 않고 말이지. 그러니 둘의 곁을 스치는 뭇 군상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세례를 받지 않을 도리가 없을 수밖에. 이럴 때는 우리가 먼저 최대한 빨리 행인들의 눈길로부터 사라져 주는 것이 맞는 답이 될 것이다. 왜? 그야 재수 없게도 아는 사람과 맞부딪치기라도 한다면, 여러모로 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재수 없으면 뒤로 나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너한테도 아는 사람이 있냐고? 왜 이러실까. 아무리 내가 학교와 집 사이로만 시계불알처럼 오락가락 하는 모범학생(?)이기로서니, 아니 그 비스무리한 녀석이기로서니, 나름대로 이 도시에서 오다가다 부딪칠지도 모를 사람이 전혀 없을 것인가. 우선, 변태를 위시한 우리 학교의 여러 꼰대들 까라, 또 인철이 녀석을 위시한 동료 학생 녀석들 까라, 또 외가 쪽으로는 어제 이사를 도와 준 외삼촌도 있고. 물론, 친가 쪽으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외 아드님들이라서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친척어르신들이나 사촌들이 존재하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나를 볼 때 마다 고 녀석 참 지지배처럼 곱상하게도 생겼네 노래를 하던 엄니의 오랜 지기 분들이 또 있다. 도시 곳곳에 퍼져 살고들 계시니 그 분들이야말로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도 볼 수 있겠다. 결정적인 것은 혹시라도 방금 전에 헤어졌던 주희와 다시 또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주미의 법적인 남편 녀석 역시도 마찬가지고. 물론, 쓸데없는 기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던 주희가 다시 또 이곳에 나타날 리는 거의 만무할 테고, 지금쯤 학원에서 한창 수강생들과 씨름을 하고 있을 사내가 이곳에 나타날 리도 만무 할 테니 말이지. 하지만,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재수 없으면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에 맞아 뒈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우리네 인생살이 아니겄는가? 그러니 최대한 몸조심을 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본다. 일단 집에 들어갔던 주희가 갑자기 시내에 볼 일이 생긴다거나 부모님 심부름 때문에 다시 외출을 할 수도 있는 일이고, 또 학원 강사 녀석 역시도 녀석의 지기지우나 일가친척이 우연히 주미를 목격하고는 녀석에게 재빨리 연락해서 부리나케 이곳으로 행차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말 그대로 코딱지만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니까. 화상, 소설 너무 길게 쓰지 말고, 다음 야그 계속 진행 바람! 독자들이 질려 함! 그러냐? 지송합니다 독자 여러분, 즉각 다음 이야기 진행하겄습니다.

‘야간비행’이라고 하는 개성적인 이름의 음악다방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다. 요즘 이 도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악다방으로 우리 고삐리들에게까지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확성기의 엄청난 고음이 찢어발길 듯 고막을 비집고 든다. 하필이면 하드 락(Hard Rock)이다. 고것들, 달콤한 승주 노래나 틀어주덜 않고. 딱! 파!

“자기야, 음악이 시끄러운데 괜찮겠어?"

“괜찮아.”

“애기 때문에 안 되겠어. 다른 조용한 곳으로 옮기자?”

“괜찮다니까 그래.”

그러나 아기가 놀라 깨서 울면 내게도 그렇고 주미에게도 그렇고 다방손님들에게도 그렇고 모두에게 여러모로 민폐가 될 게 뻔하다. 주미를 차분히 설득하는데 있어서 장애 요소이기도 하고. 상관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주미와 애기를 양팔에 하나씩 번쩍 들어 안고서 다시 길가로 나섰다. 이 여자가 본래 내가 이렇게 안아 주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여자의 집안에서 그 짓거리를 할 때는 더 더욱. 꼴깍! 그렇게 이리 저리 갈 곳을 물색하다가 이번엔 지하상가 쪽으로 내려섰다. 저 멀리 한 쪽에 핫도그(젓가락처럼 길쭉하고 둥근 나뭇가지에다 쏘시지 하나를 꿰고, 그 위에다 반죽한 밀가루를 둘둘 말아 붙여서 튀김기름에다 즉석으로 우둘투둘하게 튀겨내는 1970년대 중반 방식의 핫도그. 덴뿌라, 떢볶기와 더불어 그 시절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길거리 음식중의 하나였음-글쓴이 주) 집이 보이기에 주미를 그 곳으로 데려 가서 그것과 더불어 덴뿌라를 좀 사 먹었다. 돈은? 당연히 주미의 지갑에서 나왔다. 난 돈 없는 학생이니까. 딱! 파! 주미의 입가에 자그맣게 매달려 있는 덴뿌라 조각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떼어 내서는 그대로 내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급격히 환해지는 애기 엄마의 얼굴. 내 사랑을 보다 더 확실히 확인한 기쁨이겠지. 여기서 잠깐, 하드 락, 핫도그, 덴뿌라...... 당연히 양키 식, 쪽발이 식 단어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말로는 정확히 어떻게 바꿔 불러야 할 것인지를 몰라 눈물을 머금고 일단은 그냥 그렇게 호칭 해 본 것이다. 하드 락을 견고하고 시끄러운 두드림 음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핫도그를 뜨거운 개라 하기도 그렇고, 덴뿌라를 오징어 밀가루 둘둘말이 튀김이라 하기도 그렇고, 아무튼, 적당한 용어를 빨리 개발 해 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누가? 물론, 내가 해야 하겄지. 남들이 할 리는 만무하니까. 어쨌거나 이 덴뿌라(물오징어를 잘게 썰어 그 겉 둘레에다 밀가루 반죽을 입혀서는 기름에다 즉석으로 튀겨내던 1970년대 중반의 일본식 길거리 음식- 글쓴이 주) 역시도 맛있기는 드럽게 맛있다. 떡볶이, 핫도그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 3총사 중의 하나라고 할까나. 붕어빵과 호떡 역시 엄청 좋아하기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2등자리를 내 주어야 할 정도다. 군고구마와 옥수수, 번데기 역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다 알다시피 나는 가난한 집 떡장수 아줌마 아들 아닌가. 철사를 씹어도 소화가 될 정도로 한창 먹성 좋은 나이임에도, 대개의 경우는 그냥 침만 삼키고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훌륭한 물주(?)를 만나서 모처럼 큰 호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에그, 미련 곰투가리 같은 녀석. 예쁜 물주가 바가지 째 퍼 주겠다는 용돈까지 마다하고, 또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그 물주를 어거지로 떼어버릴려고나 하고. 너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사니? 왜 그렇게 등신처럼 세상을 사는 거여? 이쒸! 자꾸 등신 소리 할 껴? 몰라서 묻는 견 마? 너도 알다시피 이게 다 주희 때문이잖어. 잘 알면서 딴 소리 하고 있어 짜식이 말야. 에그, 등신도 가지가질세. 주희가 뭔 상관이냔 마? 그냥 몰래 양다리 걸치면 되지. 안 틀키면 되잖언 마! 이 자식 이거 정말 안 되겠구만? 이랬다저랬다 도대체가 일관성이 없네. 짜샤 너 똑바로 말 해! 니가 주장하는 절대 정의 내지는 도덕적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대체 뭐여? 자꾸 이랬다저랬다 헛갈리게 하덜 말고 한 가지만 확실히 대란 말이여. 나도 몰란 마! 그 때 그 때 다르단 마. 됐냐? 이 새끼 이거 정말 안되겠구만! 에라이 퍽! 퍽! 퍽! 에구! 에구! 동네 사람들아아! 사람 살려유! 아니, 짜샤 살려유! 오늘 물건 씬 놈 한티 연타석으로 아구창나유우!

애기 엄마와 애기를 다시 양손에 하나씩 번쩍 들어 안고서 지상으로 올라와서는 역전 쪽을 향하고 부지런히 걷던 도중 마침 첫눈에 뜨인 다방 안으로 재빨리 파고들었다. 이 여자 창피한 줄도 모르고 내 한팔 안에서 가느다란 종아리를 시계추마냥 흔들어대기까지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좋아하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다 주미야. 마지막으로 이렇게 봉사를 해 주는 겨? 다방 안으로 총알처럼 파고 든 이유는 역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게 될까봐서다. 대산다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그런 곳이 아니고, 다방아가씨들 끼고 앉아서 노땅들이 손가락 장난이나 치는 그런 곳이라서 그런지 일단 크게 시끄럽지는 않았다. 아니, 시끄럽기는커녕 은은하게 실내를 흐르고 있는 노래 느낌이 더 없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른 노래도 아니고 바로, 내가 사랑하는 그녀 혜은이, 아니 승주의 ‘당신만을 사랑 해’였으니 말이지. 아, 승주! 승주! 딱! 파!

구석자리 한쪽에서 다방 아가씨들을 하나씩 낀 채, 승주의 노래에 취해 있던 중년 사내 둘과 아가씨들 모두의 시선이 휘둥그레 이쪽을 향하고 있다. 하기야, 이런 황당한 상황이 처음일 테니까. 애 엄마와 아기를 양손에 하나씩 번쩍 안아 든 고삐리 녀석의 난데없는 등장이라니. 시나브로 확대되어 가는 저들의 동공. 바로 그 때, 허벅지 살을 열심히 주물리고 있던 아가씨 하나가 자리를 발딱 차고 일어나서는 주방 쪽으로 부리나케 종종걸음을 쳐 간다. 그리고는 소반 위에다 물 잔 두 개를 받쳐 들고는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은 쪽으로 빠르게 종종걸음을 쳐 온다.

“어머, 너무 멋있당! 힘이 무지 센 가 봐요? 그런데 교복 입은 오빠는 이런 곳에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번 한번 만 딱 봐줬다. 너무 멋있어서! 그런데 차는 뭘로 할 꼬에요?”

이 여자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투가 왜 이래? 말투가 좀 간살스럽네. 게다가 애기 엄마는 아예 투명 인간 취급을 해 버리네? 우리 주미 투명 인간 되서 어쩌냐? 하지만 주미는 주미대로 통통녀를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다. 니가 아무리 그래봐야 나한테는 쪽도 못 쓴다는 그런 표정으로. 흐흐흐!

“자기 뭐 마실래?"

순간, 가느다랗게 실눈으로 변하는 통통녀의 눈. 아니 얘 왜 이래?

“우유. 자기는?"

“난 유자차."

“.......”

급기야 입술까지 굳게 다물어지고 만 통통녀. 뭘 그려 이 아가씨야? 고삐리하고 애기 엄마는 연애하지 말라는 벱(법의 충청도식 표현 -글쓴이 주)이라도 있어? 딱! 파! 있다 화상, 바로 간통법. 알어 알어 짜샤! 간통법 나도 알어! 내가 여기서 말하는 법은 그 의미가 아니고 딴 의미여 짜샤! 딴 의미? 그게 뭔 디? 본래 암수 애정문제의 경우, 자연의 법칙에서는 간통이니 뭐니 하는 그런 개념 자체부터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 말이여. 결혼한 유부남과 시집 안간 처자가 서로 붙어먹든, 결혼한 유부녀와 장가 안든 어린 총각이 서로 붙어먹든 말이지. 특히, 동식물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자연이 니들 그러면 안 된다 하는 거 봤어? 봤냐고? 그게 다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둘러씌워 놓은 허울 논리 아니냐 이 말이여. 물론, 부모 자식 간이나 인척간에 서로 붙어먹는 경우는 유전학 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으니 좋을 것은 없겠지만. 딱! 파! 왜 임마? 부모 자식 간이나 인척간에 붙어먹는 경우는 아니라니까. 아무튼, 화상 너는 정상적인 놈이 아니여. 아주 반사회적이고, 위험한 놈이여. 짜샤 너 지금 나 겁주는 거냐? 좋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기로 하자. 에게게! 나중은 무슨. 캥기니까 괜히 뒷걸음 질 치는 거 봐? 이 새끼가 증말! 너 자꾸 말 시키며 시간 낭비하게 만들래? 독자들이 짜증내고 있는 거 안 보여? 흥! 독자 녀석들 그까이 꺼 짜증내거나 말거나! 이 새끼가 정말! 퍽퍽퍽! 에구 에구 물건 씬 놈이 또 사람 패네. 동네 사람들아아! 화상 이 자식 이거 버릇 들었어유! 에구구! 사람, 아니 짜샤 살려유우!

평소 유자차를 좋아하는 주미가 우유를 주문하는 것이 색다르게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굳이 그런 것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아니다. 주문을 받은 통통녀가 굳어진 표정을 종내 숨기지 못하고, 주방 쪽으로 통통통 종종걸음을 쳐 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쟤, 질투하는 꼴 좀 봐. 내가 자기보고 자기라고 하니까.”

“내가 자기라고 하니까 이 꽉 무는 꼴은 또 어떻고?”

“그나저나 쟤, 너무 통통거리는 거 갖지 않아?”

“풋!”

“자기야, 우리 정말 하릴없다 그치?”

“뭐 어때? 이렇게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옥이 됐든, 극락이 됐든 다 좋아."

“내가 그렇게도 좋은 거야? 정말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따라올 거야?"

“자기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가 지옥으로 가면 자기도 나를 따라올 거면서.”

이 엄청난 자신감은 대체 무슨 근거에서? 하기야, 맞는 말이긴 하지. 주미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나도 즉시 접시 물에 코를 박고 따라 죽는 시늉이라도 하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여자를? 그렇다. 떼어내야만 한다. 주희! 주희! 주희! 그 깜찍하고 앙증맞은 계집애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겨 이 여자야. 그리고 승주 때문에도 더 그렇고. 딱! 파!

“자기야, 우리 지금 당장 어디로 도망 쳐 버릴까?"

나 지금 흰 소리 한 거 맞지? 도대체 왜 이러냐 허수창?

“굳이 도망 칠 필요도 없어. 그냥 같이 살면 되는 거야. 나는 이혼 해 버리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을까? 설사, 그래버린다고 쳐도 무슨 수로 내가 너를 먹여 살린단 말인가? 또 애까지 더 생기면 어떡하고? 신문 배달을 해서? 구두닦이를 해서? 그런 거 가지고 무슨 생활비가 될까. 이틀 정도 쌀 팔아 먹고 나면 똑 떨어질 텐데. 둘이서 쫄쫄 굶고 앉아서 구멍만 파먹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한테 피아노 강사 일을 시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내의 체면이 뭐가 되는가. 여자한테 빌붙어 사는 사내의 꼬락서니라니. 애는 어떻게 건사하고? 생각만 해도 내 스스로가 저주스러워진다. 역시, 정답은 아니여. 주미 너는 너대로 그 인간과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 되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주희 하고 정상적인 이성 교제를 하면 그만인 겨. 그것이 가장 현명한 모범 답안인 겨. 딱! 파!

“주희는 어떡하고?”

주희하고의 관계를 주미가 이미 알고 있는 이상, 굳이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만나. 그리고 혜은이도 계속 좋아하고.”

쿵!

이 이 여자한테 스 승주 좋아한다고 말한 일이 있었던가? 없다. 진실로 없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봤는데 너 주희 하고 그냥 만나도 돼. 그 대신 나하고의 인연만 끊지 말아 줘.”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해? 자긴 자존심도 없어? 그리고 혜 혜은이는 또 뭐야?"

제기랄! 왜 갑자기 이렇게 말이 더듬거려지는 겨?

화상, 속 보이는 짓 그만! 이 새끼가 정말! 퍽퍽! 에구에구!

“자기 혜은이 좋아하잖아. 새삼스럽게 뭘 안 그런 척이야. 그리고 곰곰이 생각 해 보니까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더라고. 나라고 해서 왜 자존심이 없겠니. 하지만, 어떻게 자기가 같은 또래의 여자 친구와 사귄다고 하는 것을 반대만 하고 있을 수 있겠어? 내 욕심이지. 더군다나 주희는 내 사촌동생이기도 한데.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제발 나를 버리지만 말아 달라는 거야. 주희 하고 사귀면서도 얼마든지 나하고의 관계를 지속 해 나갈 수 있잖아. 혜은이도 열심히 좋아하고 말이야.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안 그래?”

“미쳤어! 그걸 말이라고 해? 어떻게 자기하고의 관계를 지속 해 가면서 자기 사촌동생까지 만나라는 거야? 금방 들통 날 일을. 그리고 주희를 만나면서 들게 될 죄책감은 어떡하고? 자기라면 그 죄책감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걸 왜 죄책감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런 죄책감은 가질 필요도 없어.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 없다더라. 자기 역시도 마찬가지야. 자기 논리대로라면 옛날 조선시대 왕들이나 양반 남자들 역시도 처첩을 거느렸으니 다 죄책감을 가진 도둑놈들이란 말이니? 더군다나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그건 경우가 다른 거지. 그 시대엔 그런 것이 통용되는 시대였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

“그거야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거지. 시대상황이 무슨 상관이야. 그 시절에 그런 짓이 죄가 아니었다면, 지금이라고 해서 무조건 죄가 되란 법도 없는 거야. 다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도덕적인 잣대가 무슨 고무줄이니? 똑같은 행동을 두고 그 시절엔 죄가 아니고 지금은 죄가 된다는 게?”

“자기는 같은 여자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옛날 여자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바보야, 옛날 여자들이 뭐가 불쌍하니? 오히려 남자들보다 더 호강하고 살았는데? 말이 남녀차별이지 실제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남자들처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못했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여자들이 오히려 더 편안하게 살던 시대야. 남자들처럼 군역을 책임지기를 했나, 그렇다고 해서 농사일 같은 힘든 중노동을 크게 감당하기를 했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힘든 일은 거의 가 다 남자들이 해 온 것도 사실이잖아. 더군다나 벼슬길이라는 것도 일부 특수 계층의 남자들에게나 해당 되는 이야기지, 그 시절 모든 남자들이 다 벼슬길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와! 우리 주미 무지 똑똑하다. 아참, 대학교 나왔지. 딱! 파!

“아무튼, 그럴 수 없어. 그건 자기 생각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지금 시대는 그런 생각이 죄악이 되는 시대임이 분명하니까. 나도 자기의 애타는 심정은 잘 이해 해. 나 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그 사실까지도.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나 역시 아직도 자기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어. 그건 죄악이야. 그러니 이제 두 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기야, 부탁이야. 그래줄 수 있겠지?”

“싫어. 그럴 수 없어. 죄악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죄악이 아닌 것이 되는데, 왜 그렇게 해야 만 되는데? 자기야, 그건 절대 죄악이 아니야. 현명한 선택일 뿐이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죄악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것이 바로 자연이 정해 놓은 이치이기도 하고.”

우리 주미 오늘따라 유난히 더 똑똑해진 거 같네? 대학원은 안 나왔지 아마? 딱! 파!

“자긴 정말 말이 안 통하네. 그래. 그만 두자. 무슨 말을 해도 지금 자기는 억지를 부리고 싶을 테니까. 나도 괴로워. 그러니 이젠 그만 두자. 제발.”

“안 돼! 자기는 절대 내 곁을 떠날 수 없어. 자기가 내 곁을 떠나 버리는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 해. 이거 절대 거짓말 아니야. 알겠니?”

“공주미!”

정말, 미치고 환장하겄네. 설득하려다 오히려 되 물리고 말았으니. 이토록 찰거머리 같은 여자를 무슨 수로 떼어낸단 말이여? 사실, 주미의 말대로 양 다리, 세 다리를 걸치는 사랑이 죄악이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규정조차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허울에 불과할 테니까. 아니, 시대 상황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식으로 해석이 되어지는 것을 보면, 절대적 도덕률이란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미의 생각도 맞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미의 주장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설사 그 주장이 맞다고 쳐도 주희가 그것을 싫어할 테니까. 아니, 주미 역시도 싫게 느껴질 테니까. 주미라고 해서 왜 내가 주희를 만나는 것이 달갑게 여겨지겠는가. 그저, 나 하고 헤어지는 일이 두려워 저런 억지를 부려대고 있을 뿐.

유자차와 우유 잔을 소반에 받쳐 들고 온 통통녀가 왈가닥처럼 그것들을 탁자위에 탁탁 내려놓는다. 이 여자도 가만히 보면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승주의 노래는 이제 ‘진짜 진짜 좋아해’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집 아가씨들 역시 승주의 노래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흐흐!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미의 입술 역시 보일 듯 말 듯 딸싹거리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승주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서양 고전 음악을 전공한 여자가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다니. 하긴, 이 시대 최고의 인기 여가수 노래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겠지. 바로 그 순간, 주문한 음료를 탁자위에 탁탁 내려놓고 있던 통통녀가 자신의 통통한 허벅지살을 은밀히 내 허벅지살에 착 밀착 시켜온다. 얼렐레! 재빨리 주미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녀는 마침 아이의 얼굴을 돌아보고 있던 참이다. 다방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밤 아홉시 가까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통통녀의 눈치가 심상치 않다. 더 노골적으로 변하기 전에 신속히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마침, 애 아빠의 저녁 강의 시간도 끝나가고 있으니 말이지. 딱! 파!

“그 얘기는 나중에 더 하기로 하고 일단 일어나자. 애기 아빠, 강의 끝날 때 됐네."

흠칫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 본 주미가 알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아무리 남편으로 인정하기 싫어도, 아직까지는 애 아빠가 엄연히 자신의 법적인 남편이란 사실을 차마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완전히 질투심에 사로잡힌 통통녀의 샐쭉해진 표정을 뒤로하고, 재차 주미와 아기를 한손에 하나씩 번쩍 번쩍 들어 안고는 총총히 다방을 빠져 나와 마침 앞으로 다가와 서던 택시에 올라탔다.

“부사동이요.”

“예에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일분쯤 달려가고 있는데, 주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기, 그 여자가 허벅지살 밀착시켜 줄 때 기분 좋았지?”

“뭐?”
아 아니 이 여자가? 그걸 또 언제 본 겨?

“그걸 또 그새 본 거야?”

“내 눈이 매 눈이란 걸 몰라? 하지만, 그 여자 그렇게 단숨에 밀쳐 버린 거 정말 마음에 들었어. 그러니 앞으로도 주희 외에는 더 이상 다른 여자한테는 관심도 가지지 마! 내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야. 혜은이도 그냥 가수로써만 좋아 해! 그 이상은 안 돼!”

“주미야!”

택시 기사의 뻣뻣해진 목을 보니, 통통녀 만큼이나 많이 놀란 모양이다. 하기야, 나 같아도 그럴 테지. 젊은 애기 엄마와 어린 고삐리 녀석의 수상스럽고도 요상스러운 대화 내용이라. 길이 전혀 막히지 않은 탓으로 불과 십여 분 만에 우리 집 앞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옆 자리의 주미를 슬쩍 돌아보니, 그녀는 좀 전의 그 말을 끝으로 요조숙녀처럼 앞쪽만을 골똘히 응시하고 있는 중이다. 천하의 공주미라도 택시 기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리라. 미안해 자기야. 나도 자기를 미치도록 사랑 하고 있어. 그 대신 이제부터는 승주와 주희 외에는 다른 여자한테 눈길 돌리지 않겠다는 거 굳게 맹세 할 게. 딱! 파! 화상 또 지키지도 못할 약속 함부로 남발 하는 겨? 쉬! 짜샤, 지금은 주미와 영원히 이별할 시간. 에게게! 영원한 이별은 무슨? 짜샤 너 정말 말 안들을 래? 팬다? 후다닥! 흐흐! 그 자식! 

“아저씨 저는 요 앞에서 내릴 겁니다. 그리고 이 아주머니는 집까지 따로 잘 좀 모셔다 드리고요."

“예 알겠습니다.”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강행했다.

“그럼 아주머니 안녕히 가세요. 오랜만에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늘 아름다운 모습 잘 간직하시고, 또 아가도 건강하게 잘 키우시길 바래요. 언제 또 뵙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 뵐 날이 있겠지요. 그럼 안녕히......”

“너, 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내일 오후에 무조건 우리 집으로 와!”

사납게 변해버린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두 눈이 귀엽게 꼭 앙다문 입술 위에서 고삐리 녀석의 면상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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