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잎새의떨림15

2025. 3. 2. 09:12허세창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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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서산에 걸려있는 붉은 해를 보았다.

해는 많은 세월을 항상 저렇게

노을 빛 가득히 하늘을 물들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게

짧은 이별을 고했다가는,

다시 눈부신 새벽으로

돌아오곤 하였으리라.

그리고 받는 거 하나 없이도

누구에게나 따뜻한 미소를 주고

사랑한단 말 한 마디 듣지 못 하였어도

기꺼이 따뜻한 사랑을 보내 주었으리라.

붉은 해,

이제는 산 너머로 기어코 숨어버리고

머 언 먼 하늘만이 수줍은

승주의 홍조 빛 그 얼굴처럼

자꾸만, 자꾸만,

커다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스무 살 승주에게 미쳐있던 열네 살 수창의 넋두리 중)

 

월요일 늦은 오후에 다시 또 유진숙의 자취방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누구여? 유진숙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의 그녀 친구도 아니었다. 또 다른 생소한 여자의 코맹맹이 목소리. 최소한 30대 중 후반은 될 것 같은 농익은 아줌니의 기생처럼 나긋 거리는 목소리.

“여보세용?”

용? 

“예, 거기 유진숙씨 자취방이죠. 진숙씨 좀 부탁드립니다.”

“누구세용?”

“예, 저......”

선뜻 누구라고 대답하기가 무엇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줌니가 먼저 내 이름을 알고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혹시 수창이라는 그 학생 아니에용?”

“네? 아 네네! 그런데 저기 아줌마가 제 이름을 어떻게?” 

“어머, 아줌마가 뭐양! 나 아직 시집도 한 번 안 가본 팔팔한 아가씨인뎅. 그나저나 내가 거기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공? 그야 우리 진숙이가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길래 알았지잉.”

거기? 팔팔한 아가씨? 우리 진숙이가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길래 알았지잉? 그건 그렇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처녀 아가씨가 초면부터 아무한테나 잉잉 거려대니. 떽! 이런 교양 없는 노처녀 같으니라고. 그리고 그 놈의 양, 뎅, 공, 잉 좀 안 붙일 수 없냐? 이거 원 똥구멍이 다 간지러워져서 원!

“그랬었군요. 그런데 저기 진숙씨 좀......” 

“진숙씨? 지금 이 시간에 걔들이 여기 왜 있엉. 일 나갔징.”

일이라니? 여대생이 무슨 일?

“일......이라니요?”

“어머, 진숙이 고 기집애 다 말 해 준 게 아니었구낭. 고 앙큼한 것! 그냥 장난삼아 말 상대 해 준 거라더니, 다른 꿍꿍이속이 또 있었엉. 하도 신나게 떠들어 대길래 난 또 거기한테다 죄다 말 해 준 줄 알았징. 진숙이 걔 내가 데리고 있는 애잖앙. 손님들한테도 아주 인기 짱이라니깐.” 

내가 데리고 있는 애? 손님들한테도 아주 인기 짱? 이게 무슨 자다가 홍두깨 이단 옆차기 하는 소리여? 요조숙녀처럼 현숙해야 될 여대생 처녀가 어디 할 짓이 없어 밤일을? 아무리 용돈이 궁해도 그렇지. 가만, 그럼 혹시 의심했던 대로 여대생 쪽이 아니라 그쪽? 정말?

“여보세요? 진숙씨 대학생 아닌가요?”

“대학생? 학생이 진숙이한테 감쪽같이 속았구낭. 놀전 다니다 짤린 앤뎅. 깔깔깔! 그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소린데 학생 일찌감치 냉수 먹고 속 차리는 게 좋을 거양. 공부해야 할 고삐리 학생이 화류계 여자한테 관심을 가져서야 어디 쓰겠엉? 알았징?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령. 보아하니, 진숙이 걔가 제 직업을 바른대로 안 대고 현직 대학생이라고 끝까지 속인 이유가 학생 얼굴이 제법 반반해 보여서 고랬던 같은뎅, 고것은 절대 안 될 말이징. 내가 허락할 수가 없징. 내 밑에서 일 하면서 사사로운 연애 따위를 허락 할 수는 없징. 진숙이 걔한테는 내가 확실히 주의를 줄 테니깐 고렇게 알고 있어용 학생. 이제 우리 볼일 끝났으니깐 이만 끊자공. 내 말 꼭 명심해야행. 안 그랬다가는 큰 코 다치고 말테니깡!”

딸깍!

(놀전은 과거 1970년대 대전시 자양동에 소재하던 중경공업전문대학교를 지칭하는 별칭이다. 머리가 석두인 아이들이 주로 가는 전문대학교로 소문이 나서 그런 별칭이 붙었었다.-글쓴이 주)

“여, 여보세용?”

아차 용이 아니고. 그나저나 고 앙큼한 것이 정말로 나를 속였단 말이징? 그리고 전화 받았던 그 아가씨도 마찬가지공? 푸르르! 공주미와 공주희를 내 여자로 만든 치기만으로 마치 세상물정을 다 알아버린 것처럼 거들먹거려 댄 꼬락서니라닝. 가만, 그러고 보니 짐작이 간당. 나와 헤어지고 난 뒤, 재빨리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전 정지 작업을 해 두었겠징.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서도 제 마담한테까지 나 데리고 놀았던 이야기를 자랑삼아 막 떠들어 놓았던 것이공. 세 여자가 모여 앉아서 하하호호 얼마나 신이 났을깡. 까드득! 그럼 진숙이가 들고 있던 그 책들은? 그렇겠징. 놀전 다닐 때 썼던 소품도구였을 뿐이공.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들어서 가짜 여대생 내지는 현직 여대생 행세 하는 화류계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실제로 허수창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에 가짜 여대생 행세를 하는 화류계 여자들이 너무 많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는 보도 내용이 많았음- 글쓴이 주)

그런데 그녀들이 그렇게 가짜 여대생 행세를 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건전한 일을 꾸미려고 그런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 거라는 점이다. 보나마나 나 같은 어리버리들을 호려서 마음껏 등이나 쳐 먹자는 수작이겄지. 특히 돈 많아 보이는 사내라면 더 금상첨화일테고. 그런데 유진숙은 왜 굳이 나 같은 가난뱅이 고삐리 녀석에게 관심을 보여 온 것일까? 굳이 왜 그런 비경제적인 짓거리를 사서 한 것일까? 처음 그 느낌처럼 진짜로 내가 한 사내로서 마음에 들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지금까지 마주치면서 경험했던 길거리의 그 수많은 여염집 여인들의 경우만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유진숙, 좋다. 그런 순수한 동기에서 내게 관심을 보인 게 확실하다면, 내 기꺼이 너를 용서 해 주지.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는 누가 대학생이니 아니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까짓 학벌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이여. 그냥 얼굴 이쁘고 몸매 곱고 마음씨만 착하면 되는 것이지. 우리 승주를 보라지. 그녀 역시 선화국교, 호수돈 여중, 호수돈 여고 졸업 학력이 달랑이지만, 얼굴 예쁘고 몸매 곱고 마음씨 착한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여가수가 되어 있지 아니한가 이 말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거나 졸업한 여자들을 일부러 배척한다는 뜻은 아니다. 배척은커녕 얼굴 되고, 몸매 되고, 마음씨만 되면, 무조건 내 여자로 받아먹을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다. 지방 국립 대학교 음악과를 나온 공주미처럼 말이지. 딱! 파! 왜 또 짜샤? 화상, 주미는 얼굴 되고 몸매는 되지만 마음씨가 착한 건 아니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하, 고자식. 그래 니 말이 맞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 주미의 마음씨가 사악한 것도 아니잖냐 짜샤? 주미도 알고 보면 마음씨가 고운 여자여. 너무 노골적으로 남자를 밝히는 색녀과라서 그런 거지. 짜식이 말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뻑 하면 사람 중상모략하고 있어. 에라이 너도 한 방 먹어 봐라. 퍽! 꽥! 짜샤 죽는다. 동네 사람들아아! 짜샤 살려! 짜식이 말야 꺄불고 있어.

그러고 노처녀 마담 너 지금 뭐라고 그러고 전화 끊었냥? 뭐라공? 큰 코 다칠 테니깡? 이라고라고라공? 이런 제기랑! 그러니깡 내가 계속 진숙이한테 찝적 거렸다가는 양아치 애들 시켜서 단단히 혼을 내 주겠다 이 말이징? 에라이, 이 호랭이가 물어가도 시원찮을 말코 같은 여자양! 어디서 감히 호색무인, 아니 이 호정무인을 겁주고 있엉? 내가 우리 학교에서 얼매나 무서운 놈인지 니가 아냥? 니가 알엉? 그깟 양아치 몇 마리 수십 마리, 혼자든 떼거리든 우르르 대들어 봐야 단숨에 묵사발이 되고 말어 이 여자양. 승질 같아서는 이놈의 여편네를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숨도 못 쉬게 콱콱 눌러 놓을까 보다. 며칠 동안 운신도 못하도록 말이영. 식식! 화상, 진정해라. 나도 니가 양아치 수십 마리 정도는 한 자리에서 그냥 단체로 해 치워 버릴 정도의 무서운 무예 및 무술고수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깟 팍 삭아 시들어 버린 노처녀의 거시기를 뭔 맛으로 섭취하려고 그러냐? 그게 맛이나 나긴 하겄냐? 이 자식 아직도 골로 안 갔네. 그래, 잘됐다. 떡 본 김에 제사라고 짜샤 니가 대신 맞아 주어야겠다. 퍽퍽퍽! 꽥! 동네 사람들아아! 짜샤 살려어! 꼬르륵! 짜식이 말야. 노처녀 거시기 맛이 오히려 더 짭조름하다는 야그는 못 들어 봤냐 이 촌닭아?

 

이제, 내일 모레 12월 24일이면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방안에 편안히 누워 고교 2학년의 마지막 겨울 방학 계획을 구상 해 본다. 주희와 함께 어디 장거리 여행이라도 떠나 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주미와 함께? 진숙이와 함께? 옥자와 함께? 승주와 함께? 아니, 승주는 일단 빼고. 흐흐흐! 이럴 때는 여자 많은 것도 고민이여. 딱! 파! 이쒸! 아니, 어떻게 나 같은 놈한테 이런 여복이 넝쿨 째 굴러들어올 수 있단 말이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신기하고 배부르고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단 말이여.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춘향이는 커녕, 박씨 부인도 꿰차지 못 해 빌빌 싸던 놈이 말이시.

(춘향이가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고, 박씨 부인은 우리나라 고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추녀를 대표하는 여자임. 궁금하신 분들은 박씨 부인이 등장하는 고전소설을 찾아서 직접 읽어 보시길 - 글쓴이 주)

따르릉!

누구? 주미? 진숙? 옥자? 승주? 아니다. 육감이지만 틀림없이 주희여. 틀림없을 껴.

“창, 지금 모 해?”

척 하면 삼천리군. 그나저나 언제 들어도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이 목소리. 주미의 거시기 만큼이나 승주의 거시기 만큼이나 사내의 가슴을 마구 휘젓고 드는 이 솜사탕 같은 목소리.

“공부하고 있었지 뭐. 그런데 우리 희는 하루 종일 뭐 하고 있었을까?”

참고로 희는 주희의 약자다. 좀 느글거려도 참아주시길! 딱! 파!

“그야 당연히 창만 생각하고 있었지 뭐. 창도 그랬어?”

“그럼, 나도 하루 온 종일 우리 희만을 생각 하고 있었지.”

지금 이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다. 하루 온 종일 희 생각을 하느라고 혼이 난 것도 사실이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승주, 주미, 진숙, 옥자 생각이 다발적으로 동시에 끼어들기는 했어도. 딱! 파!

“희, 자전거 타고 총알처럼 그쪽으로 달려갈까? 그 공원으로 나와 줄래?”

“지금?”
“싫어?”

“싫다기 보다...... 좋아. 그럼 어서 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우리 집을 나와 동쪽으로 100여 미터를 가다보면, 대전 천을 끼고 뚝길이 양 갈래로 길게 이어져 있다. 그 뚝 길을 따라서 남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한참 달려 가다보면, 천변가로 면해 서 있는 주희네 한옥 기와집이 눈에 뜨인다. 특이하게도 요즘 세상에 한옥 기와집이다. 그리고 주희네 한옥 기와집에서 좀 더 달려가다 보면, 드디어 한적한 공터 위에 조성된 간이 천변공원 하나가 나타나게 된다. 도시 변두리의 천변 가에 면해 있는 장소인 탓으로 하루 온 종일 인적은 거의 뜸한 곳이다. 그런 이유로 그곳이 요즘 들어서 바로 우리 둘만의 새롭고도 호젓한 밀회의 장소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월요일. 거의 삼 일만에 주희를 다시 직접 보게 되는 셈이다. 나로서야 물론, 매일 보고 싶기는 하지만, 주희가 굳이 원하는 바이기에 마지못해 따라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으로서도 다른 여러 가지 볼 일이 많기도 하고 말이지. 그 볼 일들 중에는 당연히 카사노바질도 포함이 되어 있다. 딱! 파!

꽉 끼는 청바지에 엷은 주황색 상의 차림의 주희 모습이 깜찍하고 예뻐 보이기는 하지만, 약간은 추워 보이기도 한다. 꽉 끼는 청바지? 그러고 보니 유진숙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었지. 내 성향이 아무래도 꽉 끼는 청바지 차림을 많이 선호하는 것 같다. 여자의 하관 윤곽이 그대로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앞으로 주미한테도, 옥자한테도, 승주한테도, 또 그 밖에 내 여자가 될 뭇 여인들에게도 꼭 그런 차림을 해 보라고 명령(?)을 해 봐? 딱! 파!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치마 차림이 싫다는 뜻은 아니다. 치마 차림 역시 너무나 매력적이니 말이여. 사실, 치마 입은 모습이야말로 우아한 여성미의 결정판 아니겄는가?

“외투라도 좀 걸치고 나오지 그랬어?”

“괜찮아. 별로 안 추워!”

그러면서도 좁고 동그마한 어깨를 살짝 오므려 보이는 희. 가련한 것. 주저 없이 짧은 외투를 벗어 희의 몸뚱이를 폭 감싸 준다. 옷이 좀 커서 그런지 예쁜 소녀 허수아비가 큰 포대 자루를 걸친 것 같다.  

“너 꼭 허수아비 같다?”

“그런 걸 왜 벗어주고 그래. 너 알어? 여자가 몸뚱이에 지방 성분이 더 많아서 남자보다 추위에 더 강하다는 거? 그래서 똑같이 얼어 죽을 상황이면, 오히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견딜 수 있다는 거?”

“알어 나도. 그래도 그냥 입고 있어. 새 나라의 공주님은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요.”

“풋!”

입을 가리고 예쁘게 웃는 희. 미치겠다. 깨물어 먹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지?”

“무슨 말이야? 겨우 삼일 째인데.”

맞다. 그래도 이것아, 나는 한 3년 된 것 같단 말이여. 그나저나 우리 희, 어쩌면 이리도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울까? 진짜로 확 깨물어 먹을까 보다.

“삼일 째나 못 봤는데 겨우? 나는 한 3년은 된 것 같은데?”

“그렇게나 내가 보고 싶었어? 나는 너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너, 자꾸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면, 3년 동안 안 만나준다?”

딱! 파! 화상, 3년은 고사하고 하루만 못 봐도 비비 꼬아 대는 주제에 말 같지 않은 소리 작작 좀 혀. 이쒸! 너 안 찌그러지냐? 알았어 꼬르륵! 그 자식 참!

“3년? 흥! 니가 그러면 나는 너 영원히 안 만나 줄 꼬앙.”

꼬앙?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그렇지. 노처녀 마담. 이런 제기랄. 하필이면 우리 희가 그 여자 말투를 흉내 낼 게 뭐여? 이런 걸 보고 바로 우연의 일치라고 하는 겨? 그나저나 3년도 아니고 영원씩이나? 이건 뭐 그냥 애 타서 죽으라는 소리네. 요 앙큼한 것!

“영원히? 좋아. 영원히 못 만나기 전에 미리 못 해 볼 거 다 해 봐야지.”

“갑자기 왜 이래? 징그럽게.”

“징그럽기는...... 이리 와 봐!”

“야아, 자꾸 이러지 마아!”

“알았어. 잠시 보류다. 그런데 희 너, 이번 겨울방학에 뭐 할 거야?”

주희 학교와 우리 학교의 겨울방학 시작일이 같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뭐하기는, 열심히 밀린 공부 해야지.”

“그놈의 공부, 지겹지도 않냐?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겨울여행이나 뜨자.”

“겨울여행?”

“그래 겨울여행!”

“어디로?”

“그냥 아무데나.”

“아무 데나?”

사슴 같은 눈망울을 어여쁘게 굴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희의 가녀린 몸뚱이를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꼭 껴안아 주고 말았다. 도저히 인내 할 수 없었기에. 그리고 영원이라는 그 끔찍한 단어 역시 자꾸만 마음속을 치받고 들었기에. 새 같이 가녀린 희의 몸뚱이가 내 커다란 몸뚱이 안에서 가늘게 미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몸을 빼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 그대로 쏟아질 것처럼 명멸하고 있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빛들을 가만히 우러러본다. 희의 부드러운 볼과 창의 볼이 접착제처럼 밀착이 되어 진 채로. 별똥별들은 시시때때로 긴 꼬리를 끌며 먼 하늘가로 흘러내리고. 그래, 희.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절대로 영원히 못 만날 존재가 아니니까. 우리는 절대로 영원히 헤어질 수 없는 존재이니까. 그 때, 희의 달콤한 목소리가 다시 또 창의 귓전을 헤집고 들었다.

“저 별들, 지금 똥 싸고 있는 것 맞지?”

“에그, 분위기 깨지게.”

“맞는 말인데 뭘. 그래서 이름도 별똥별이잖아.”

“그래, 그건 맞아. 근데 별똥별은 별똥별이고, 우리 이러고 있는 거 정말 좋지?”

“왜 이래 자꾸, 징그럽게! 좋아. 그렇다고 인정 해 보지 뭐.”

“얼마큼?”

“흠, 저 별똥별만큼!”

“정말?”

“정말이라니까!”

“희!”
“응?”

“사랑해!”

“......”

“너는 왜 나 사랑한다는 말 안 해?”

“그래, 나도 너 사랑해.”

“그런데 왜 잠깐 망설인 거야?”

“그냥, 너무 좋아서.”

“희......”

“창......”

닭살도 좋다. 돼지비계도 좋다. 나 이런 식으로 느글거리는 분위기 조성되는 거 아주 선호 한단 말이여. 그런데 왜 자꾸만 영원이란 단어가 신경에 거슬리는 겨? 그냥 농담이었을 뿐인 디. 희가 이렇게 내 품 안에 폭 안겨 있음에도 말이지. 이렇게도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어린 처녀를 철저히 기만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그럴 것이다.

“자전거 탈래? 뒤에 타?”

하지만, 고개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드는 희.

“엉덩이 살 상할까 봐 싫어.”

띠요옹!

그래 희, 사실은 나도 그냥 이러고 있는 게 더 좋단다. 나도 어여쁜 처자의 엉덩이 살이 상해 버리는 꼴 따위는 보기 싫으니까. 내가 약속할 게. 언젠가는 근사한 차 안에다 우리 공주님을 편하게 모셔 준다고. 그리고 승주 공주도, 주미 공주도, 진숙 공주도, 아니 그냥 진숙이도, 옥자도. 딱! 파! 화상, 왜 사람 차별 혀? 다 같은 사람이고 여자인 디, 왜 누구는 공주고, 누구는 그냥 이름만인 겨? 왜 니 멋대로 사람 차별 하는 겨? 이쒸! 너 안 나선다고 그러더니 또 나서냐? 내 맴이다 화상! 너, 그러다 언젠가는 여자들한테 된통 당한다. 사람 함부로 그렇게 차별 하는 거 아녀. 그 자식, 지가 무슨 도덕군자라도 된 양 설레발치고 있네. 알았어 짜샤.

“그래, 그냥 이렇게 있자.”

“창 너한테 안겨 있으니까 정말 포근하고 따뜻해서 좋네. 영원히 그냥 이러고 있고 싶어.”

“정말?”

“응!”

“희?”

“응?”

“사랑해!”

어쩌다 이렇게 비계 사내가 되어버린 겨? 사랑에 눈이 멀면 자동으로 이렇게 되어 버리는 겨? 그래도 좋아. 돼지비계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무조건 그냥 좋단 말이여. 딱! 파!

“나도 사랑해! 그런데 창, 남자들은 자전거 탈 때 거기 안 아프니? 내 생각엔 많이 아플 것 같은데. 여자들은 안 그런데, 남자들은 거기가 볼록하게 튀어나왔잖아. 그게 안장에 안 닿는 거야?”

띠요옹!

하기야 내가 너를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엉뚱한 면 때문이기도 하지. 깜찍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면에다가 이런 엉뚱한 매력까지 더해졌으니 말이지.

“그게 그렇게 궁금해? 하지만, 걱정 안 해도 돼.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닿기 전에 그걸 떠받치고 있는 씨앗 주머니가 먼저 안장에 물컹하게 닿아서 보호를 해 주니까 말이야.”

“그렇구나. 근데 그걸 뭘 그렇게 복잡하게 에둘러서 설명을 하는 거야. 그냥 잠지 밑에 있는 불알이 보호 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면 되지.”

헉! 잠지 밑에 있는 불알...... 얘가 왜 이래 자꾸? 분위기가 너무 느글거려서 김치 한 조각 집어 먹자는 건가? 맞다. 바로 그거다. 딱! 파!

“너 너무 노골적이다. 조신해야 될 어린 처자가......”

“어때. 우리 둘뿐인데.”

“하기는 우리 둘 뿐이지. 희!”

“응?”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진하게 입술박치기나 해 볼까?”

“못났어 정말! 그걸 꼭 말을 하고서 해야 하는 거니? 그냥 확 덮쳐 버려 이 바보. 흡!”

그렇게 진하게 입술박치기 의식이 진행 된 후,

“희, 우리 그럼 24일 날 저녁에 거기서 보는 거야?”

“어디?”

얘가 또 왜 이럴까? 다 알면서.

“거기 말이야.”

“아 거기? 알았어!”

그렇다. 독자들은 아직 모르는 우리 둘만의 거기가 있다. 희의 더 이상 부러울 것 없을 것 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얼굴, 그리고 그 떨리는 분홍빛 입술 위로 창의 화롯불 같은 입술이 서서히 포개어 내려지고 있었다. 이러다 두 연놈 입술 다 부르터 버리는 거 아닌지 몰러. 딱!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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